128화
태훈의 신분이 높고 국빈이라 한들 외국인이 수도의 결계에 접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자신이 왕자였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결계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두 부류였다.
황실의 직계와 결계를 관리하는 마법사.
태훈은 헤이링 황자를 먼저 찾았다.
헤이링 황자는 태훈에게서 사정 설명을 듣고는 생각에 잠겼다.
“흠, 그런 일이. 그럼 공왕님은 결계가 누군가에 의해 일시적으로 작동을 멈췄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그것밖에는 없습니다. 범인은 결계를 이겨낼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마법적인 측면에서는요.”
“그럼 누군가 결계를 건드렸다고 볼 수 있겠군요. 설마 저를 의심하고 계시는 겁니까?”
“헤이링 황자님을 찾아온 이유는 결계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알려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흠, 아무리 그래도 부외자에게 그런 정보를 넘길 수는…….”
“음, 역시 그런가요.”
태훈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계를 작동시키는 메인 회로는 황궁의 지하에 있을 게 분명해. 딱히 파손 없이 결계를 멈추었다면 황궁을 드나드는 자가 틀림없을 터.’
태훈은 아카데미를 찾아갔다.
“황실 마법사의 명단이라.”
파케 영애는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서재에서 책을 하나 빼 들었다.
태훈의 앞에서 펼치자 몇몇의 프로필이 나와 있었다.
“저희가 연구하면서 간혹 마법사들 도움을 받을 때가 있거든요. 그 사람들이에요.”
“이 사람들이 황궁에 드나들어?”
“그건 모르겠어요. 그래도 아카데미에 드나들 정도면 나름 실력 있는 마법사들일 거예요. 그런데 왜 그러시죠?”
태훈은 열매를 도난당할 뻔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고 난 파케 영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결계에 접근할 수 있는 자가 열매를 훔치려고 했다는 거죠?”
“그렇게 되지.”
“그런데 그 열매라는 게 인지도가 없는 보석이라면서요. 굳이 왜 그걸 노리는 거죠?”
“아…….”
순간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는 듯이 태훈은 잠시 멍해졌다.
“결계에 접근할 수 있는 마법사 정도면 굳이 돈이 필요할 것 같진 않고. 황실 가족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 같은데.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종족의 보물을 구태여 원하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듣고 보니 네 말이 맞아. 그리고 처음 그걸 홍보할 땐 엘프의 보물이란 단어는 뺐어. 전쟁 영웅이 지니고 있던 보석이라는 이름으로 홍보를 한다고 했지.”
“그럼 그걸 한눈에 알아보고 일을 저질렀다는 말이 되네요.”
“고마워. 뭐가 먼저인지 이제 깨달았네.”
“조심히 가세요.”
태훈은 그길로 바로 엘프들을 찾아갔다.
그의 심각한 표정을 본 얀의 기사들은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너희가 가져온 엘프 나무의 열매. 그거 단순한 보석은 아닌 것 같은데.”
“직접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단순한 보석이 맞습니다.”
“단순히 보석을 노린다면 경매장 주인을 살해하면서까지 물건을 갈취하지 않아. 전당포를 터는 게 더 간단하지. 내가 모르는 게 있다면 지금 말하는 게 좋아.”
“정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엘프 나무의 열매는 대대로 지도자만이 관리하는 열매. 저 또한 처음 본 것이고 어머니께 들은 것이 없습니다.”
“너희도 모르는 건가?”
니나의 뒤에 있던 엘프들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를 살피니 셋 모두 정말 모르는 듯했다.
‘이렇게 되면 여왕 말고는 답을 해줄 자가 없는 건가.’
하지만 여왕을 만나서 자리를 비우기도 애매했다.
무엇 하나 매듭진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카데미로 다시 돌아온 그는 직접 알아보기로 했다.
파케의 도움을 받아 아카데미의 서고로 향했다.
그러곤 책을 이 잡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뭘 찾으시는 거예요?”
“엘프와 관련된 책들.”
“저도 같이 찾아드릴게요.”
“아니야, 나 때문에 시간 뺏길 필요 없어. 나 혼자도 충분해.”
“그럼 사서한테 말해놓을게요.”
도서관 사서는 서고에 있는 책들 중 엘프와 관련이 있는 책자들을 가져다 태훈 앞에 가져다 놓았다.
내용을 이 잡듯 뒤졌지만 엘프의 나무와 관련된 내용은 쉬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엘프에 대한 자료가 생각보다 많군.’
그는 자신의 앞에 놓여진 책들을 보며 감탄했다.
엘프는 기피하는 종족이었기에 사람들은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았다.
카나리스에서도 엘프에 대한 책자는 두어 권이었고 살면서 엘프에 대한 책은 별로 보지 못했다.
그런데 자신의 눈앞에는 마법서만큼이나 방대한 책들이 쌓여 있었다.
책을 살피던 태훈은 이내 그 책들이 원본이라는 것을 알았다.
오래된 문헌일 경우 책의 내용을 그대로 카피하여 새롭게 책을 만들어 보관했다.
책의 부패를 막는 마법도 있긴 했지만 책을 똑같이 베껴 보관하는 것이 돈을 적게 잡아먹었다.
그런데 책은 모두 베껴 쓴 것이 아닌 원본.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필체가 모두 똑같았다.
행여 한 사람이 베껴 쓴 것이 아닐까 하고 사서에게 물었다.
잠시 확인해 보겠다는 사서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책을 필사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원본이란 말이었다.
책은 오래되어 보이는 너덜너덜 한 것부터 비교적 깨끗한 것까지 있었다.
한눈에 봐도 오랜 세월 누적된 책들인데 한 사람이 썼다는 건 쉬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책의 저자를 묻자 사서가 고개를 갸웃했다.
“책에 저자가 없습니까?”
“없으니 묻고 있지 않나.”
“그렇다면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사서는 바깥으로 나갔다 잠시 후에 다른 사람과 들어왔다.
나이가 지긋한 여자였고 태훈의 앞에 놓여 있는 책들을 보더니 눈이 잘 보이지 않는지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흠, 이건 알 길이 없겠군요. 이 책들은 제가 여기 부임하기 전부터 있던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책을 반입할 때 기록을 하지 않습니까?”
“물론 책의 저자부터 해서 기록을 해둡니다. 그런데 그 기록지 보관 연수가 30년이죠. 이 책들은 그 이전에 들어온 책들입니다. 더욱이 한 번도 대여가 없던 책들이라 대여 장부에도 아마 안 남아 있을 겁니다.”
30년이 넘은 책들.
한 명의 필자.
책 커버로 보았을 때 상당한 기간에 걸쳐 쓰인 자료.
‘그렇다면 이 중에 오래된 책은 30년을 훨씬 상회하는 햇수를 넘겼다는 건데. 한 사람이 작성했다면 저자는 이미 사망했겠군.’
글자를 배우자마자 책을 썼을 리는 없을 테니 저자는 이미 백골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시간이었다.
그는 하루 종일 자리에 앉아 책들을 뒤졌다.
그러다 몇 권 남지 않았을 때 그는 열매라는 글귀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엘프의 나무는 그 기원을 세계수라는 것에 두고 있다. 이 땅 위에 처음 나타난 엘프는 그 나무에서 태어났고 그 열매를 먹고 늙지 않는 몸을 얻었다고 한다.’
?
열매에 대한 것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글의 뉘앙스로 보았을 때 검증이 된 내용이 아닌 유추에 가까운 문장이었다.
다른 책들을 끝까지 살폈지만 열매에 관한 기술은 그것이 전부.
이곳 아카데미의 서고는 황실과도 같이 공유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의 자료는 없었다.
‘열매를 노리는 건 이 미신 때문인가?’
그것 말고는 달리 생각되는 이유가 없었다.
서고를 나온 그는 다시 한번 엘프를 찾아갔다.
그러곤 여분의 열매를 보여달라 했다.
받아 든 열매는 여전히 단단한 투명 껍질에 싸여 있었다.
“이 안에 있는 과실을 꺼낼 수 있나?”
“불가능합니다. 그 투명한 껍질은 오리하르콘과 맞먹는 강도입니다.”
“그럼 검기는 가능하겠지.”
태훈은 검을 꺼내 검기를 생성했다.
검기를 본 니나의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
“뭐……. 뭘 하려는 겁니까?”
니나가 말릴 틈도 없이 검기가 과실에 닿았다.
단번에 두 쪽을 낼 생각이었으나 검기는 과실을 가르지 못했다.
데구르르.
과실은 흠집 하나 나지 않은 채 뒹굴었다.
“무슨 짓입니까?!”
“안에 있는 과실을 꺼낼 수는 없겠군.”
‘그나저나 내 검기로도 안 잘리다니. 오리하르콘보다 더 단단한 건가?’ 단순히 과즙이 굳은 것만으로 그 정도 강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책에 적혀 있는 대로 엘프의 동안과 장수 비결이 과일에 있다면 아예 이해 못할 상황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미 과실을 하나 훔쳐간 놈도 더 이상 이걸 노리지 않겠군.’
단순한 보석의 값어치를 노린 걸 수도 있었고 희귀한 것에 눈독을 들이는 인물일 수도 있었지만 지금으로선 더 공격받을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상대가 더 구미를 당길만한 것을 준비할 수 밖에.
태훈은 웃으며 다시 한번 경매장으로 향했다.
* * *
태훈은 경매장을 다녀온 뒤 침상에 몸을 뉘였다.
상대가 미끼를 물면 자신을 찾아올 것이 뻔했기에 뜬눈으로 밤을 기다렸다.
밤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인기척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이는군.’
태훈은 창문과 문을 번갈아 보았다.
창문을 통해 들어올 것이냐 문을 통해 들어올 것이냐.
그러다 이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상대방은 기척을 숨길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더욱이 그 기척과 오리진의 기운은 익숙한 것이었다.
그는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어디 가십니까?”
“아, 잠시 산책 좀. 대기하고 있게.”
“동행하겠습니다.”
자신을 따라나서는 얀 제국의 기사를 대기시켜 놓고 태훈은 거처 뒤에 있는 뜰로 나갔다.
“나오시죠. 기척을 숨길 생각도 없잖습니까.”
그가 말하자 어둠 속에서 한 인물이 나타났다.
잠시 잊고 있었던 남자.
태훈은 자연스레 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상대는 손바닥을 보이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네. 오늘은 대화를 하러 온 것이니.”
낮은 중저음.
달빛에 드러난 것은 홀든이었다.
“대화? 염치도 없나요?”
“우리가 좋은 관계가 아니게 됐지만 대화 정도는 할 수 있는 사이 아닌가.”
“관계를 비튼 것은 장군님입니다. 아니, 이제 장군님이란 호칭은 쓰지 않도록 하지. 홀든.”
태훈의 살기가 홀든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아내와 아이를 위험에 빠뜨린 남자가 제 발로 찾아올 줄은 몰랐다.
주위를 살폈으나 헤라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혼자서 오다니 배짱이 두둑하군.”
“말했잖나. 대화를 하러 온 것이라고.”
“대화의 필요성을 못 느끼겠는데. 말해, 너희들은 장벽 너머에서 뭘 하고 있지?”
“그건 나도 모른다. 내가 그곳을 떠난 것은 그 이전이니까. 장벽은 소문으로만 들었다.”
“그걸 믿으라는 건가?”
“흥분하는 것도 이해해. 난 그럴 만한 일을 저질렀으니. 하지만 내가 자네를 배신한 건 우리 모두를 위한 거였어.”
“무슨 개뼉다구 같은 소리야.”
태훈은 검을 뽑아 들었다.
검기가 흘러나오며 공터의 잔디를 베어 흩날렸다.
“난 그자와 거래를 했어.”
“그자라면 마데우스를 말하는 건가.”
“그자는 자신에게 협력하면 내가 염원한 것을 이뤄주겠다고 했네. 자신이 신이 되면 뭐든지 가능하다고 하면서.”
“그 말을 믿는 건가? 그리고 그게 당신 염원이랑 무슨 상관이야?”
“내 염원은…… 과거를 바로잡는 것이네.”
“과거를 바로잡다니?”
“난 내가 죽었던 시간으로 되돌아갈 것이네.”
“뭐? 그 말은 노량해전 때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는 시간과 공간을 지배할 수 있다고 했어.”
“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다니. 세계의 파멸을 원하는 놈의 말을 믿나.”
“그가 원하는 것은 파멸이 아니야. 불합리한 시스템의 정지일 뿐. 아무것도 모르고 이용당하는 사람들의 해방이야.”
마데우스를 대변하는 홀든의 모습에 태훈은 싸늘한 표정으로 대했다.
단단히 세뇌를 받은 것인지 아니면 진정 추종자가 된 것인지 열변이었다.
“자네는 시스템에 대해 듣지 못했는가?”
“들었지. 하지만 그걸 안다고 사람들을 떼죽음으로 몰 순 없어.”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내 과거를 바로잡을 수 있어.”
“당신 과거에 잘못된 것은 없어. 후손 대대로 칭송받으며 전해져 왔다고.”
“난 노량에서의 싸움에서 살아남을 거네. 그리고 그길로 왜놈들 정벌을 나설 거야.”
그는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노량에서 고비를 넘긴 다음 왜국으로 쳐들어가 정복한다.
그리하여 일제강점기를 없던 것으로 하고 나라의 분단도 막겠다는 것이다.
“내가 그 싸움에서 죽지 않았다면 분명 자네가 살던 미래는 바뀌었을 거야. 수백만의 백성들이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되고 같은 민족끼리 피를 흘리지 않아도 돼.”
홀든은 분노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