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다음 날 아침.
옷을 입고 있는 사이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태훈이 방문을 여니 청색과 분홍색 도포를 입은 중후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공왕님. 밤에 편히 주무셨습니까?”
“누구십니까?”
“수도의 치안을 맡고 있는 치안 대장 바울이라고 합니다.”
태훈은 그를 슥 훑어보았다.
무인이라기보다는 문관에 가까운 체격과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부하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참고인 조사에 응해주시겠습니까?”
태훈은 니나 일행을 불러 다시 한번 위병소로 향했다.
바울은 그에게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범인의 신상을 알아냈습니다. 이름은 모릭. A급 용병입니다.”
종이엔 모릭의 정보가 써 있었다.
‘검술과 마법을 사용하는 듀얼 적성자. 듀얼이면 A급을 받을 만하지.’
“이자의 실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마법은 2클래스 정도. 검술은 제법 실력이 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하필 공왕님께 걸렸으니 운이 없는 녀석이죠. 기존에 몇 건의 폭행으로 조사를 받은 전적이 있는 녀석입니다.”
“놈은 독극물로 죽은 겁니까?”
“그렇습니다. 혹시 이자를 전에 본 적이 있으십니까?”
태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마저 조사를 하도록 하죠. 일행이 짐을 도둑맞았다고 하던데 그 내용물은 뭡니까?”
“귀금속입니다. 판매처를 알아보기 위해 몇 개를 가져왔는데 그중 하나죠.”
“다른 목격자들 진술을 들었습니다. 건물 뒤편에서 불길이 일어나 손님들이 대피하던 찰나 모릭 혼자 건물 안으로 들어간 것을 본 사람이 있습니다.”
“불?”
태훈은 니나를 쳐다보았다.
“건물 뒤편에서 소란이 일어난 것은 알았습니다. 하지만 큰 불은 아닌 것 같아 방에서 대기하고 있었죠.”
“모릭은 일행분들도 건물 밖으로 나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게 아니었던 거죠. 그대로 물건을 절도한 뒤 달아난 것 같습니다.”
태훈은 다시 니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방에 세 명이나 버티고 있는데 상자를 뺏긴 거야?”
“처음엔 경계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마법을 쓰는 바람에 당황했습니다.”
“마법을?”
바울은 말도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수도에서 마법은 쓸 수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단 말인가? 우리 인간 대도시에서 마법을 쓸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네.”
“놈은 우리에게 공격 마법을 시전했습니다. 마법 공격은 생각도 못한 터라 대처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그 사이 녀석이 상자를 탈취했습니다.”
“숙소가 그 지경이 된 것도 사실 저희가 그런 게 아니라 놈이 마법으로 그렇게 만든 겁니다.”
엘프들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바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엘프들 말이 맞아. 나도 분명히 미약하지만 마나의 파동을 느꼈어.’
때아닌 엘프들과 바울의 설전이 벌어졌다.
그것을 태훈이 중재하면서 일단 그 이후의 일들을 물었다.
“그래서 궁금한 것이……. 귀금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른 누군가가 알고 있었습니까?”
“없습니다.”
“모릭이 수도에 들어온 게 하루 전입니다. 그 말은 모릭이 귀금속의 위치를 알 수 있었던 시간은 제로에 가깝다고 할 수 있군요.”
바울의 말이 옳았다.
모릭은 다른 의뢰 건으로 바로 전날 수도에 입성하여 의뢰를 보고했다고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일면식도 없던 모릭이 과실의 정보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적었다.
‘누군가 모릭을 고용했다는 거군.’
태훈은 몇 사람을 떠올렸다.
과실의 존재를 아는 것은 처음 들렀던 전당포의 주인.
그리고 경매장의 주인뿐.
정보를 흘렸다면 두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전당포 주인은 관심이 없었으니 의심이 간다면 경매장의 주인이었다.
“같은 물건을 경매장에 출품 등록했습니다.”
“흠, 경매장이라…….”
바울은 들은 것들은 종이에 적어 내려갔다.
“그럼 정보가 샜으면 경매장일 확률이 높군요. 그쪽에도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도둑맞으신 물건은 그것뿐입니까?”
태훈이 니나를 쳐다보니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일단 사건 자체는 절도로 분류하여 처리했습니다. 범인이 죽어 버려서 더 이상 조사는 어렵겠지만 철저히 조사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국빈급 인사가 당한 절도 사건이니 황궁에도 소식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리고 황실에서 호위 인력을 붙이고 싶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공왕님이 홀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만.”
“호위는 괜찮습니다.”
“허허, 공왕님의 무용담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같은 일이 일어나면 저희가 체면이 서질 않습니다. 불편하시지 않을 정도로의 호위만 붙여 드려도 되겠습니까?”
동시에 바울은 뒤에 있는 엘프들을 향해 곁눈질을 했다.
엘프들을 데리고 다니면 좋지 않은 일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저희 쪽 인력에는 엘프들도 공왕님의 손님으로 정중히 대하라고 할 테니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우리는 필요 없…….”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태훈이 니나의 말을 잘랐다.
“저희는 필요 없습니다.”
“며칠 더 머물러야 해. 이미 말썽이 한번 일어났으니 더 민폐 끼치는 것도 곤란하지 않겠어?”
“허허, 공왕님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저희 쪽에서 불편한 일을 처리해 주신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끝으로 그는 조서에 사인을 하고 위병소를 나왔다.
위병소 밖에는 4명의 기사가 서 있었다.
얀 제국의 기사들은 체인 메일이나 풀 메일을 입은 타국의 기사와는 달리 천과 가죽으로 된 튜닉을 입고 있었다.
전원 검은 머리에 동양인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황실 근위대 소속이라 밝혔다.
“저희 두 명은 공왕님을. 이쪽의 두 명은 일행분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얀 제국에도 여성 기사가 있군요.”
엘프들을 담당하는 기사들은 두 명 모두 여자였다.
태훈의 말에 남자 기사 둘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차별한다고 생각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 둘은 2황녀님의 기사들이고 실력은 보증합니다.”
“그럼 맡기겠습니다. 너희들도 여기 머무는 동안 최대한 협조해.”
니나 일행은 여성 기사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둘은 날 따라오도록.”
“네,”
둘은 태훈의 뒤를 따라 걸었다.
태훈이 향한 곳은 아카데미.
파케를 만나 볼일을 본 후에는 황녀와의 미팅이 있었다.
간단히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것이었고 형식적인 대화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던 중 한 병사가 다가와 태훈을 보좌하던 기사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그러곤 기사가 다시 태훈에게 다가왔다.
“위병 대장에게서 전갈이 왔습니다. 지금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태훈은 양해를 구하고 다시 위병소로 향했다.
바울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무슨 일입니까?”
“일이 생겼습니다. 오전에 경매장으로 사람을 보냈는데…….”
“보냈는데?”
“당시 사람이 찾아갔을 때 경매장 주인이 자리에 없었습니다. 병사 몇을 풀어 행방을 쫓다가 발견했는데 이미 사망한 후였습니다.”
“사망? 죽었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보시겠습니까?”
태훈은 위병소 한쪽에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바울이 천을 들추자 주검이 되어 있는 경매장 주인이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확실히 그 남자가 맞군요.”
“왼쪽 겨드랑이부터 급소까지 검상이 있습니다. 일격에 당한 것 같고 전문가의 솜씨입니다.”
“살해당했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조사하는 과정에 이자가 경매장을 나설 때 상자 하나를 들고 나갔다고 했습니다.”
“혹시…….”
“그 부분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들고 나갔다는 상자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사체는 어디서 발견됐습니까?”
“북쪽에 있는 다리 밑에서 발견했습니다.”
“음…….”
뭔가 이상했다.
‘이상하군. 주인이 따로 거래를 하려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주인은 물건에 관심을 보인자에게 태훈의 정체를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되레 인위적인 흥정을 통해 돈을 더 받아내라고 조언까지 한 참.
‘그랬던 그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단독으로 거래를 하려 했다?’
만약 그렇게 했다 치면 태훈에게 뭐라 변명을 했을지도 의문이었다.
잠시 후 보고를 전해 받은 바울은 경매장 등록 물품 물품이라며 그에게 내밀었다.
“이 목록 중에 없는 상품이 딱 하나 있다는군요.”
“제 물건이겠군요.”
“황제 폐하께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궁으로 속히 들어가시죠.”
태훈은 기사들의 안내를 받아 마차를 타고 궁으로 향했다.
황제는 근엄한 표정으로 태훈을 맞이했다.
“이야기는 들었네. 내 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면목이 없군.”
“애당초 예정에 없던 물건이었습니다. 미리 대비를 못했던 제 불찰도 있습니다.”
“제국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범인을 잡아내겠네. 그리고 듣자 하니 같은 물건이 더 있다고 하던데.”
“네, 9개가 더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 물건을 가져왔다는 엘프들을 볼 수 있겠는가.”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
니나 일행은 곧 도착했다.
영문을 몰라 하는 그들에게 태훈이 상황을 설명했다.
“그대들이 공왕을 따라온 엘프들인가.”
“그렇습니다.”
“이야기는 들었다. 내 나라에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을 겪게 한 것은 내 불찰이다.”
엘프들은 적잖이 놀랐다.
인간의 지도자.
그것도 제국이의 황제가 천대받는 자신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직접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송구합니다.”
“치안 대장에게 이야기를 들으니 같은 물건이 더 있다고 들었다. 그것을 내가 보관하는 게 어떻겠는가?”
“네?”
“황실 금고는 아무나 드나들 수 없다. 그곳에 보관하면 안전하지 않겠나.”
맞는 말이긴 했다.
“그대들의 물건을 되찾을 때까지 이곳에 남을 것 아닌가. 그동안 황실에서 보관해 주겠네.”
“배려는 감사합니다만 이 물건은 저희 종족의 보물. 그런 민폐는 끼칠 수 없습니다.”
순간 황제의 표정이 변했지만 금세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것을 눈치챈 것은 황제의 오라를 볼 수 있었던 태훈뿐이었다.
“그런가. 도움이 될 수 없어 미안하군.”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저희 물건은 저희가 되찾겠습니다.”
니나들의 의사는 분명했기에 황제도 더는 어찌하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라. 성심껏 도울 것이다.”
“감사합니다.”
황궁을 나온 니나들은 바로 도둑맞은 과실을 되찾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떠나가자 태훈은 자신을 따라오는 기사 중 한 명을 불렀다.
“뭐 좀 물어보고 싶은데.”
“네, 말씀하십시오.”
“이 도시에는 결계가 쳐져 있지 않나?”
“대마법 결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쳐져 있습니다만.”
“그래? 어제 사건 때 미약하게나마 마나의 파동을 느꼈는데.”
“그럴 리가요. 대마법 결계 내에서 마법을 쓸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정확하게는 얼마 없는 것이 맞았다.
태훈 정도라면 알약을 복용하면 사용이 가능했다.
문제는 사망한 용병 정도의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
엘프들의 마나는 아니었으니 그렇다면 마나의 파동은 용병의 것이 분명했다.
‘나는 나대로 이거에 대해서 조사를 해봐야겠군. 안 좋은 기분이 들어.’
* * *
헨델과 그리브는 장벽을 옆에 끼고 한참을 걸었다.
인기척이 느껴지면 장소가 어떻든 몸을 숨겼다.
다리 밑에도 숨고 몬스터 배설물 속에 숨기도 했다.
“대체 얼마나 걸어야 합니까?”
“불평할 틈이 없네. 어떻게든 강의 하구를 찾아야 해.”
그들은 바다로 이어지는 길을 찾고 있었다.
쪽배라도 찾아 해상을 통해 나가보려 했던 것.
하지만 첩첩산중만 이어질 뿐이었다.
그들은 이동하면서 처음 봤던 마을처럼 유령이 된 마을을 몇 차례 더 목격했다.
동상이 있는 마을도 있었고 아무것도 없는 마을도 있었다.
“대체 이 땅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글쎄, 내가 본 것이 맞다면 답은 흑마법밖에 없는데.”
“아시는 게 있습니까?”
“옛날 문헌에서 본 기억이 있어. 사람의 몸에서 마나를 추출한다는 법이 있던 것 같네.”
“일반인들에게도 마나가 있습니까?”
“정확하게는 몰라. 만물은 마나를 가지고 있고 그 양에 차이가 있다고 적혀 있었지. 흑마법 중에 그걸 추출한다고 했던 것 같네.”
“그럼 동상이 가루가 돼서 사라지는 건 뭐였습니까?”
“마나가 고갈되면 형체를 이루고 있던 것들이 그걸 유지하기 힘들어진다고 보았네.”
“그걸 다 어찌 알고 있습니까?”
“난 도서관 사서였어. 거기엔 흑마법에 관한 자료들도 있었지.”
“그런데 마나 고갈은 우리 마법사들도 종종 겪는 것 아닙니까? 그래도 우린 멀쩡한데요?”
“그건 나도 모르네. 아무튼 저들이 흑마법을 이용해 사람들을 재료로 삼는다는 것만은 알 수 있어.”
“그럼 그들은 그렇게 모은 마나로 뭘 하려고…….”
“그것까지 알아낼 틈이 있나? 우린 살아 돌아가서 알리는 게 급해.”
그들은 한참을 걸었다.
그러다 자그마한 오두막을 발견하고 잠시 지친 몸을 뉘였다.
오두막 안에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었다.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이 그렇게 됐을까요?”
“지금 우리가 병사들 말고 다른 사람을 본 적이 없잖나.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
“……소름이네요.”
그들은 냇가에서 목을 축이고는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점차 폭이 넓어지는 물줄기를 보며 일말의 희망을 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