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건물에서 나온 글렌 의원을 조용히 따라간 태훈은 그의 주머니 속에 쪽지 하나를 넣었다.
잠시 후 글렌 의원은 수행원 없이 혼자 나타났다.
“오랜만이군.”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뭐 그렇지. 자네가 와 있다는 건 알았네. 시간이 된다면 보려 했는데 잘됐군.”
“무슨 일로?”
“카나리스에 문제가 생겼어.”
글렌 의원이 말하는 것은 카나리스의 왕가 문제였다.
연합군을 조직해서 운영할 당시 태훈의 얼굴을 본 카나리스 관련 인물들이 그의 정체에 대해 소문을 냈다고 했다.
머리색과 눈동자 색이 다르지만 나이 또래나 생김새가 메드니안과 너무 흡사하다.
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고 했다.
‘일부러 내가 있는 곳에는 카나리스군의 병력을 받지 않았는데.’
태훈도 자신을 알아보는 귀족이 있을까 봐 자신이 있던 요새에는 카나리스군을 배치하지 않았다.
외부로 모습을 노출하는 것도 피했지만 사람들의 눈을 모두 피하기는 무리였던 것 같았다.
왕자의 신분으로 있던 시절 선와과 더불어 그를 차기 국왕으로 만들려던 귀족들이 술렁인다는 것이다.
“난감하군요. 안 그래도 카나리스에 볼일이 있었는데.”
“무슨 일로?”
“자금을 좀 빌리려 했습니다. 이번에 얀 제국과 회사를 하나 만들려고 하는데 초기 자금이 부족해서요.”
“우리 쪽에서 빌리면 되지 않나?”
“이번엔 상황이 좀 다릅니다.”
상황을 설명하자 글렌 의원이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렇군. 시제품이 없다라.”
“순전히 신용만으로 빌려야 하는데. 의원님 쪽에서는 회의를 통과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아마 의회를 설득하긴 힘들 걸세. 차라리 자네가 메드니안의 신분이었다면 전적을 봐서 신용으로도 충분히 가능할 텐데.”
“메드니안은 없는 사람이어야 하니까요. 그보다 이 상태라면 로텐바르 형님한테 의지하는 것도 힘들겠군요.”
주머니에서 용돈 빼서 쓰듯 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결국 귀족들이 아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그럴 경우 로텐바르는 자금의 사용처에 대해 해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결코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겠지.”
“그럼 다른 쪽으로 알아봐야겠군요.”
“뭔가 시제품이 나온다면 우리 쪽으로 오게.”
글렌 의원과 헤어진 뒤 태훈은 숙소로 돌아왔다.
카나리스에 손을 벌릴 수 없다면 그에게 특별한 연고지는 없었다.
다음 날, 태훈은 헤이링 황자를 찾아갔다.
얀 쪽에서 부담할 정확한 대금의 액수를 알기 위해서였다.
협의 끝에 받아낸 금액은 태훈이 예상한 총 금액의 6할.
“남은 4할은 어떻게 준비하실 수 있겠습니까?”
“준비해 봐야죠.”
“그리고 저희 누님과의 혼담을 없었던 것으로 해달라고 부탁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애초에 사업을 위한 자리였으니까요.”
“짐작은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승낙하셨다면 6할이 아니라 전액을 지원받으셨을 수도 있으셨을 텐데. 길을 돌아가시려는군요.”
“제가 좀 피곤한 성격이죠.”
“일단 아버님께는 공왕님께서 사업 관련하여 고민이 많으니 시간을 좀 더 두자고 말해두겠습니다.”
“……이상하리만치 제 사정을 봐주시는군요. 이유가 있습니까?”
“이유라면 호기심이죠.”
“호기심?”
“전 공왕님이 참 신기합니다. 이 나라에 오자마자 단 하루 만에. 악마의 피에 관해 사업을 제시한 게 신기해요.”
헤이링 황자는 웃고 있었다.
그 웃음에서 섬뜩함을 느낀 태훈은 웃어넘겼다.
그러곤 어디서 그런 점을 느꼈는지 물었다.
“악마의 피는 얀 제국에서 철저하게 비밀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파케 양을 접점으로 자료를 얻었다고는 해도 엄청난 대금을 필요로 하면서 상품 개발을 하자고 했을 때 조금 의아했습니다. 대체 이 남자는 뭘 근거로 이렇게 자신 있어 하는 것인가.”
“제가 자신 있어 보이던가요? 분명히 기약 없는 개발 기간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래도 공왕님의 목소리에서 자신감을 느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를 뿐이지 반드시 만들 수 있다는 느낌이었어요.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요.”
그 말에 태훈의 입술이 살짝 꿈틀거렸다.
황자의 눈치가 보통이 아니었다.
“자신감도 사업에 필요한 요소죠. 황자님 협상 실력을 보니 잘 아실 것 같은데요.”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리며 한 말이었다.
“공왕님께서 그런 칭찬을 해주시니 뿌듯하네요. 모쪼록 이번 계약건에선 잘 부탁드립니다.”
황자의 천진난만한 웃음에 태훈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
태훈은 수도에 머물면서 자금을 융통할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사이 황제의 권고대로 몇 번인가 제국 황녀를 만났지만 흥미가 없었다.
글렌 의원은 필요한 곳에 쓰라며 자신의 명의로 된 어음을 넘겨주었다.
개인으로 보자면 큰돈이지만 영지 운영 측면으로 봤을 땐 터무니없이 적은 돈이었다.
얀 제국에 온 지 일주일째 되는 날, 태훈이 있는 숙소로 누군가 찾아왔다.
니나 엘더.
엘프 여왕의 딸로 두 명의 엘프 수행원을 대동하고 있었다.
엘프들은 인간 사회에 모습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십중팔구 천대를 받거나 재수가 없으면 마법사와 짝을 이룬 노예 상인이 습격해 오기 때문.
어떻게 오게 됐냐는 태훈의 물음에 니나는 서신을 하나 건냈다.
서신을 읽은 태훈은 니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다른 엘프가 들고 서 있는 상자로 눈길을 돌렸다.
상자를 열어본 태훈의 눈이 크게 휘둥그레졌다.
“이게 얼마나 있다는 거지?”
“10개입니다.”
상자 안에는 영롱한 물건이 담겨 있었다.
주먹만 한 크기의 동그란 물체.
표면이 반짝거리는 게 마치 금속 공예를 해놓은 것처럼 되어 있었다.
서신에는 그것이 엘프 나무의 열매라고 되어 있었다.
“엘프 나무가 뭐지?”
“우리 엘프의 역사보다 오래된 나무입니다.”
“그런 게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엘프 나무는 성스러운 것. 위치는 대대로 여왕의 자리에 오른 자만이 알고 있고 세상에 공개된 적은 없습니다.”
“이건 과실이라기보단 보석 같은데.”
“나무의 열매는 시간이 지나면 안쪽에서 과즙이 흘러나와 표면을 감쌉니다. 그리고 점점 굳어지죠.”
태훈은 상자에서 열매를 집어 들었다.
무게는 투포환 공 정도로 상당히 무거웠다.
손가락으로 표면을 두들겨 보니 단단한 것이 쇳덩이 같았다.
과실의 껍질 위로 투명한 것이 감싸고 있는 형태.
언뜻 보면 크리스탈 안에 열매를 집어넣은 것 같았다.
“이건 보석류로 봐야 하는 건가?”
“그게 맞을 겁니다. 다만 이것의 값어치를 아는 인간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엘프 여왕은 태훈에게 과실의 처리를 맡기고 싶다고 서신에 써놓았다.
과실의 처리 후 비용으로 엘프들의 정착에 필요한 자금을 해결하려고 한다 했다.
“엘프 정착에 돈이 필요한가? 나와 처음 만났던 녀석의 말로는 바닥이며 나무 위며 자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했는데.”
“저희에게도 처음으로 영토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나름 국가에 어울리는 모양새도 갖추어야 하고 국경도 지켜야 하니까요.”
엘프들에게 덩그러니 놓여진 땅을 지키기란 막연했을 것이다.
거기다 이제 봄이 되어가고 있는 찰나라 새로 이주한 땅에서 먹을 것을 구하기도 어려운 상황.
태훈은 그들과 함께 보석을 처분할 곳을 찾았다.
이곳에선 금이나 보석 같은 것을 전당포에서 처분하고 있었다.
금이나 보석류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흔한 것이 아니었기에 딱히 보석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곳은 없었다.
태훈은 제법 커 보이는 전당포를 찾았다.
“우리는 바깥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어째서?”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밀폐된 곳에는 아직 익숙하지 않습니다.”
“뭐, 좋을 대로.”
끼익-
전당포 주인은 화려한 옷을 입은 귀족이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반쯤 누워 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명치 앞에서 공손히 모으며 반겼다.
“어서오십시오, 나으리.”
“보석을 처분하고 싶소만.”
“예예, 한번 보여주시겠습니까?”
태훈이 상자를 내밀자 전당포 주인은 한껏 기대하며 상자를 열었다.
귀족들이 보석을 처분할 때 자신은 유리한 편이었다.
귀족이 보석을 처분하는 경우는 딱 한 가지.
경제적으로 힘들 경우였다.
귀족들은 허영심의 끝판왕이라 자신이 가진 보석을 팔 정도로 형편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어디까지나 귀족들이 보석을 팔 때의 공식적인 이유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뿐이었다.
‘보자, 오늘도 하나 싸게 해먹을 수 있겠군.’
내용물을 본 주인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신이 여태껏 보아온 보석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던 것.
“잠시 꺼내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시게.”
전당포 주인은 보석을 이리저리 살폈다.
“안에 있는 것은 뭡니까?”
“엘프의 열매라는 과실이라고 하더군.”
처음 듣는 이름에 전당포 주인은 난감했다.
자신이 취급해 보지 않은 보석은 없었다.
하지만 엘프라는 흉흉한 종족의 이름이 붙고 단순히 유리공예품처럼 보이자 가치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이리저리 만져보고 돋보기로 살펴보던 주인은 생각에 잠겼다.
‘흠, 단순한 유리 세공품이라고 하기엔 강도가 좋아. 그렇다고 금속은 아닌데. 이런 걸 본 적이 있던가?’
거기다 과실이라고 했던 만큼이나 확실하게 단단하고 투명한 표면 아래 과실 같은 게 보이기도 했다.
전당포 주인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하지만 이 물건을 매입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어째서요?”
“희귀해 보이기는 하나 생소해서요. 값어치를 매기기가 힘듭니다.”
“음…….”
태훈은 어쩔 수 없이 과실을 다시 상자에 넣어 나왔다.
바깥에서는 표정이 굳어 있는 엘프들이 한쪽에 서 있었다.
그들의 표정이 어두운 이유는 반대편에 모여든 사람들의 얼굴로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가격을 책정하기가 힘들다는군.”
“역시.”
“무슨 문제 있나?”
“없습니다.”
니나는 없다고 했지만 수행하는 엘프 둘은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보나마나 지나가는 인간들이 그들이 불쾌하게 느낄 만한 언행을 보였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걸 누구에게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것에 대한 값어치를 대충 설명해 주지 않겠어? 협상하는 데 유리할 텐데.”
“어머니는 그 어떤 보석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사파이어나 루비, 다이아몬드보다도 더 그렇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보석류의 값어치는 희소성이었으니 그 말이 맞기도 했다.
땅을 파면 나오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태훈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전당포 안으로 들어갔다.
“이보게, 혹시 이걸 처분할 만한 곳을 아는가?”
“음, 아마 전당포에서는 매입하기가 힘들 겁니다. 그게 정말 희귀하다면 경매를 이용해 보시는 것도.”
그렇게 말하는 주인은 흥미가 떨어진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처럼 대목을 한번 볼까 했지만 태훈이 내민 상품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 터였다.
“참고하지.”
다시 전당포를 나온 그는 엘프들을 데리고 경매장을 찾았다.
각 수도에는 경매장이 있었다.
일반 사치품을 경매하기도 했지만 소매 상회들이 물건을 떼러오는 경우에도 경매장이 이용되고 있었기에 태훈도 예전에 몇 번인가 다녔었다.
얀 제국의 경매장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호리호리하고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가 태훈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본 경매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처음 뵙는 용모군요.”
“난 이곳 귀족이 아니오.”
“알고 있습니다. 용모가 이곳분이 아니시니까요.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물건의 처분을 의뢰하고 싶소만.”
“그럼 이쪽으로.”
광대 같은 느낌을 주는 남자는 한쪽으로 태훈 일행을 안내했다.
어두웠던 곳에서 환한 곳으로 이동한 남자는 자신이 경매장 관리인이라며 다시 한번 정식으로 인사를 건냈다.
그러곤 태훈 일행을 한번 스윽 쳐다보더니 말했다.
“음, 이 정도면 얀 제국 금화로 대금화 5닢은 되겠군요. 상당한 상등품입니다.”
“무슨 소리요? 물건은 아직 보여주지도 않았는데.”
“음? 뒤에 있는 자들을 팔러오신게 아닙니까?”
경매장 주인은 당연스럽게 뒤쪽의 엘프들이 거래 대상인 줄 알았다.
얀 제국에서도 이종족의 거래를 금하고는 있었지만 귀족들의 이종족 거래는 공공연한 비밀.
그 말을 들은 엘프들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허리에 있는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