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지상 위에 아무도 보이지 않자 사람들은 의구심에 휩싸였다.
30여 분을 그대로 안쪽으로 비행했지만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한번 내려가 보는 건 어떨까요?”
“우리끼리 뭘 할 수 있습니까? 내려갔다가 적의 매복에라도 걸린다면 바로 죽는 거요.”
마법사들로만 이루어진 멤버라 쉬이 내려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그들이 기구의 방향을 돌렸을 때였다.
한 마법사가 한쪽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려 보니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적이 공격 수단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기에 마법사들은 서둘러 기구의 고도를 높였다.
“크……. 큰일 날 뻔했군.”
“뭔가 이상합니다.”
“뭐가 말이요?”
“사람들이 전부 멈춰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세밀한 관찰이 어려운 먼 거리였다.
하지만 적어도 사람이라면 움직여야 할 것을 한참을 바라봐도 사람 형상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한번 내려가 봅시다.”
“어허, 우리 임무는 공중 정찰이요. 괜히 일이 잘못됐다가는.”
“장벽은 식물처럼 계속 자라고 있습니다. 언제 기구보다 높게 자랄지 몰라요.”
사람들은 옥신각신했지만 이내 두 사람만을 내려놓고 공중에서 대기하자는 데에 동의했다.
두 사람을 땅에 내려놓은 기구는 약속대로 장벽 근처의 공중으로 이동했다.
두 사람의 이름은 헨델과 그리브로, 혈기 왕성한 젊은 나이였다.
내려가서 조사를 해보자고 의견을 내고 동의한 장본인들 중 하나였다.
“그리브 씨, 보입니까?”
“보이긴 하는데 좀 더 가까이 가봅시다.”
두 사람은 집과 장애물을 엄폐 삼아 조금씩 사람들 무리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간 뒤 둘은 잠시 서로를 마주 보고는 머뭇거리며 엄폐하던 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대체 뭐죠?”
“그……. 글쎄요. 저도 이런 광경은 처음이라.”
사람들로 보이던 것은 동상이었다.
마을 광장에 모여 있는 동상들은 모두 괴로워 보이는 듯한 표정과 동작을 하고 있었다.
텅텅-
노크를 하듯 동상을 두드리자 두터운 소리가 났다.
“왜 이런 곳에 동상이…….”
“그나저나 엄청 잘 만들었네요. 주조 기술이 상당합니다.”
동상들은 수준급 주조 기술로 만들어진 듯 보였다.
옷자락 주름이나 피부의 주름 하나까지.
미세한 것들도 표현해낸 것은 마법사인 그들로 하여금 예술적 감각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넋을 놓고 동상들을 살펴보던 두 사람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졌다.
“서……. 설마.”
너무도 생생한 표현력에 그들은 합리적 의심을 하게 되었다.
동상의 숫자는 어림잡아 2,000.
그리고 그들이 있는 곳의 마을 가구 수는 500여 가구 정도로 보였다.
무엇보다 2천 개가 넘는 동상을 아무런 이유 없이 마을 공터에 세워놓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공포에 질린 모습이나 고통에 찬 모습의 동상은 더더욱 만들 필요가 없었다.
혹여나 있을 적군들에게 겁을 주는 용도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 목적에 값비싼 금속 재질로 이 정도 퀄리티의 동상을 이만큼이나 만드는 것도 우문이었다.
“설마 이거 진짜 마을 사람들?”
“사람을 동상으로 만드는 마법은 들어보지 못했어요.”
둘은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싹함에 몸이 움츠러들며 뒷걸음질 치려는 찰나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기구 쪽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이미 기구는 구름 위로 올라간 뒤.
하늘에 있던 기구에선 진작 다가오는 무리들을 확인하고 피한 모양이었다.
둘은 허둥대다가 가장 가까이 있던 판자집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광장에 도착한 사람들은 오그리아 제국의 병사 복장을 하고 있었다.
전원 말을 타고 있었고 한 명은 큰 수레를 달고 있었다.
“자, 서둘러라.”
병사들은 말에서 내려 수레로 다가가 뭔가를 집어 들었다.
투구 같은 물건을 동상들에게 씌우자 수도꼭지 같은 것에서 점성의 액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봐, 하나라도 흘리지 말라고. 부족하면 네 녀석이 죽을 수도 있어.”
“아, 네 조심하겠습니다.”
병사들은 급히 수도꼭지에 물병을 가져다 대었다.
점성을 가진 액체는 물병에 담겼고 어느 정도 흘러나오다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동상은 갈라지며 무너졌고 이내 먼지로 변했다.
충격적인 모습에 둘은 입을 틀어막았다.
그들은 부서진 동상의 투구를 이내 다른 동상에 씌우며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었다.
“저게 대체 뭡니까?”
“저도 모르죠. 그리브 씨는 저보다 클래스도 높잖아요. 모르십니까?”
“설마 마나를 추출…….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둘은 복잡한 심경으로 계속해서 그들을 주시했다.
어려 보이는 사람들의 동상일수록 흘러나오는 점성의 액체의 양이 많아 보였다.
“사람들한테서 뭘 뽑아내는 것 같은데. 저게 뭘까요.”
“모릅니다. 하지만 당장 보고해야 할 게 생긴 것 같네요.”
둘은 집을 나서기 위해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까치발을 들어 다른 출구를 확인하고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오래된 마찰음이 새어 나오자 둘은 그 자리에서 굳었다.
“무슨 소리야?”
“문이 열리는 소리 같은데.”
병사 몇 명이 둘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헨델과 그리브의 등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집 안은 좁았고 문을 나서면 바로 적들이 볼 수 있을 정도로 한산한 공터.
눈을 질끈 감고 뛰려는 찰나 다른 병사가 말했다.
“바람이겠지. 시간 없으니 딴 짓하지 말고 빨리 모아. 오늘 분 못 모으면 뒷감당은 누가 할 건가.”
“네, 알겠습니다.”
병사들이 등을 돌리자 둘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자신들에게 등을 돌린 병사를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나섰다.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곳까지 도망친 그들은 땅에 주저앉았다.
“후아, 들키는 줄 알았네.”
“다시 내려오겠죠?”
구름 위로 도망간 기구를 말하는 거였다.
날이 저물어갈 때 병사들은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해가 지고 달이 떴는데도 기구가 보이질 않자 그들은 다시 불안해졌다.
“설마 돌아오지 않는 건…….”
“최악의 경우도 생각해 둬야겠네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그들은 해가 떠도 기구가 보이지 않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도 고팠고 밤새 이슬을 맞아 그들은 사시나무 떨 듯 하고 있었다.
“필요한 것만 챙겨서 바로 나옵시다.”
두 사람은 집들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말라비틀어진 빵을 챙기고 허름해 보이는 옷을 챙겼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자국의 마법사 복장.
오그리아 제국령에서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옷까지 갈아입은 둘은 장벽을 따라 걷기로 했다.
* * *
혼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는 태훈의 요청으로 황제와 단둘이 이루어졌다.
황제는 흔쾌히 그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무리한 요청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무엇인가?”
“이번 혼담은 없던 것으로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태훈의 말에 황제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왜지?”
“이번 전쟁 중 저는 제 아내를 한번 납치당한 적 있습니다. 한 명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데 둘을 지키기엔 무리가 있겠죠.”
“자네 정도 되는 인물이 국가 간의 정혼에 대해 그 무게감을 모르진 않을 터.”
“그 무게감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너무도 잘 알기에 이렇게 실례인 것을 알면서도 부탁드리는 겁니다.”
“흠, 그렇다는 건 우리와는 척을 지겠다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이미 차관도 받았고 헤이링 황자를 통해 연구 개발을 통한 투자금도 요청한 상태입니다.”
“그건 전달받았지. 그럼에도 혼담을 파토 내려는 건가?”
“죄송합니다. 지금은 제게 주어진 것만을 신경 쓰고 싶습니다.”
황제는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으로 대륙의 정세는 우리와 세레니스의 양국 다툼이 되겠지. 그 가운데서 중립으로 있을 수 있겠나?”
“저는 중립으로 있을 겁니다.”
“그게 자네 마음대로 될까?”
“최선을 다할 뿐이죠.”
황제는 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좀 더 생각해 보게. 어느 배가 더 안전할지 고민해 보게.”
더 고집을 부리면 될 것도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태훈은 알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을 나선 태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압도적인 자신의 무력을 보여주며 어느 정도 자기 뜻대로 일을 결정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책임져야 할 식구와 사람들이 있는 상황이라 함부로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태훈은 파케 영애를 찾아갔다.
그를 본 파케 영애는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와, 사무실 좋은데?”
아카데미 수석 교수실을 본 태훈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원목으로 만든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수석 교수 자리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헤헤, 다 왕자님 덕분이죠. 일은 잘되셨어요?”
“음, 잘 안 되네. 이쪽에서 먼저 하겠다고 한 일이니 쉽진 않겠지. 아, 너에겐 피해가 안 가게 할 테니 걱정하지 마.”
“피해라고 한들 뭐 있겠어요? 여기 아니더라도 할 일은 많아요.”
“저번에 부탁한 건 찾아봤어?”
“찾아보긴 했는데 많지는 않아요.”
그녀는 태훈에게 몇 권의 얇은 책을 건넸다.
책에는 원유에 대한 연구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정도밖에 없었어요.”
“응, 고마워.”
원유를 연료로 증기기관을 쓰는 얀 제국이 원유에 대해 연구를 어느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연구 자료를 부탁했던 것.
파케의 말대로 연구는 많이 이뤄지지 않는 듯했다.
보관법이나 보관 용기의 제작 방법.
지구의 상식을 가지고 있는 태훈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시추에 대해서는 나와 있는 게 없군. 극비로 보관 중인 건가.’
시추 장비의 설계도나 원유 탐사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비단 얀 제국에만 석유가 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기회가 되면 꼭 손에 넣고 싶었다.
“고마워, 도움이 됐어.”
“표정을 보니 별 도움이 안 된 거군요.”
낙담하는 파케의 어깨를 두드린 그는 다른 부탁을 했다.
“혹시 황제 직속 연구 부서라는 곳. 정보를 좀 얻을 수 있겠어?”
“왕자님도 불멸에 대해 관심이 있으세요?”
“불멸? 왜 그렇게 생각해?”
“황제가 나이에 비해 젊기도 하고, 아카데미 내에서는 황제가 죽지 않는 법을 연구한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거든요.”
아카데미를 나온 그는 이번에는 크로이츠 상회로 향했다.
상회를 매각한 이후 세레니스 제국과 공국에 있던 파케 영애의 연구소는 통째로 얀 제국으로 넘어와 있었다.
황제 직속의 부서가 담당한다는 말답게 크로이츠 상회의 건물은 철통같은 경비 상태에 있었다.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그는 누군가를 보고 급히 몸을 숨겼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맨 앞에 있던 사람이 글렌 의원이었다.
그만 봤다면 반갑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겠지만 그 뒤로도 아는 얼굴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그중에는 자신의 누이도 있었다.
“누님, 많이 변했구나.”
살이 통통하게 오른 아넬리아.
아무드 왕국에서 헤어진 뒤로는 보지 못했던 누이가 반가웠다.
그밖에도 제노비아의 복색을 갖춘 귀족도 보였다.
그들은 엄중한 경호 아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구성 인원으로 봐서는 상회의 주주총회인가.’
태훈은 궁금증이 일었지만 섣불리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얀 제국의 수도와 마찬가지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결계가 있었다.
괜히 힘을 사용해 무리하게 엿보다가 들키는 날엔 입장이 곤란해졌다.
‘그래도 잘됐어.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겠군.’
그의 품 안에는 편지가 몇 통 들어 있었다.
자금 융통을 위해 글렌 의원과 카나리스의 국왕에게 보내는 편지.
글렌 의원이 이곳에 있으니 그를 통해 전달하면 편지를 보내는 데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그는 근처 식당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그들이 나오길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