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그럼 이걸로 모든 정리는 끝난 것 같군요.”
“모두들 수고가 많았습니다.”
얀 제국과 세레니스 제국의 사신이 서로 손을 맞잡자 회의장의 모두가 일어섰다.
마탑이 부서진 지 한 달.
마탑이 부서지자 언데드들은 우왕좌왕하며 같은 편인 오그리아군을 공격했다.
그 기세를 몰아 연합군은 전 전선에서 강하게 밀어붙였다.
오그리아군은 수세에 몰리기도 했지만 일부 지휘관들이 사라지면서 지휘 체계에 문제가 생겼다.
그러다 자신들의 영토까지 밀려나면서도 사력을 다해 연합군의 진군을 늦췄다.
그러다 오그리아의 영토 3분의 1을 장악했을 때 연합군은 거대한 장벽을 보았다.
높이가 10여 미터에 이르는 장벽은 오그리아 영토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다.
단순한 성벽이라면 공성 병기를 투입하면 그만이었지만 평범한 장벽이 아니었다.
시체가 같이 반죽되어 있는 장벽은 강력한 흑마술이 펼쳐져 있었다.
총국은 장벽을 부술 만한 신관을 동원할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
실제로 역량이 되지 않았다.
결국 장벽을 사이에 두고 연합군은 일주일간 장벽을 넘을 궁리를 했다.
몸을 회복한 태훈이 알약을 집어 삼키고 돌파를 시도했지만 실패.
부서지긴 했지만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장벽은 금세 복구되었다.
연합군은 더 이상 전쟁이 지속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연합군을 해체했다.
다만 종전은 아니었다.
유지비가 많이 드는 연합군을 해체하고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세레니스와 얀이 오그리아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는 일종의 휴전 상태였다.
오그리아와는 일절 협의되지 않은 휴전이었지만 마냥 대군을 대치시킬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마탑이 무너진 직후부터의 전투에서 오그리아의 많은 손실이 있었기에 오그리아도 전쟁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해 내린 결단이었다.
태훈은 전쟁을 이렇게 일단락해도 좋은지 이미르에게 물으려 했다.
하지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뮤즈는 없었고 물의 지니는 자신도 정령왕들을 볼 수 없다며 되레 난감해했다.
결국 수중에 넣은 오그리아의 영토는 국경이 맞닿은 얀 제국과 세레니스 제국, 그리고 크로이츠 공국이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나머지 국가들은 영토를 나누어가진 세 국가가 포상금을 지급하기로 되어 있었다.
문제는 크로이츠 공국에는 더 이상 자금이 남아 있질 않다는 것.
상회는 얀 제국에게 넘어갔고 남아 있는 자금은 공국의 요새화에 모두 들어갔기 때문이다.
생전 걱정해 본 적 없는 돈 문제가 골치를 썩이자 태훈은 결국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세레니스와 얀에서 저금리의 유상 차관을 융자받을 수 있었던 것.
땅를 안 받으면 돈이 지출되지 않아도 되었지만 태훈은 엘프들에게 약속한 땅을 내어주어야 했다.
물론 연합군 측에도 엘프들의 공로를 어필했지만 그것은 엘프들의 안전 보장에 관한 것만을 얻어낼 수 있었다.
“약속을 지켜줄 줄은 몰랐군.”
“이제부턴 이웃이니까 잘 지내보자고.”
엘프들은 크로이츠 공국과 맞닿은 위치의 영토를 할당받았다.
“빚이 생겨난 것 같은데 도울 일은 없나?”
“없어. 말썽 일으키지 말고 땅굴이나 폐쇄하도록 해.”
엘프들은 당분간 요새에 남아 있기로 했다.
할당받은 영토로 엘프들이 모여들기 위해선 요새를 지나쳐야 했고 따로 관리 인력을 뽑아낼 수가 없었기에 엘프들이 담당해야 했다.
“우리들은 어찌하면 좋습니까?”
“흠…….”
전쟁이 일단락되며 생긴 문제 중 하나는 드래고니안들의 거취 문제였다.
아직 루세프는 잠에서 깨어나질 않는 상황.
거기에 신탁을 내린 신이 잠수를 탄 상황이니 그들의 저주가 풀린 것도 아니었다.
“아직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니고 루세프의 상황도 저러하니 난 일단 여기에 남는 걸 권하는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선택은 너희 몫이야. 난 너희들을 붙잡을 권리가 없고 살던 곳으로 돌아가 평화롭게 지내겠다고 하면 최대한 편의를 봐주겠어.”
드래고니안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루세프 대신 임시로 족장을 맡은 자는 몇몇 드래고니안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남는다 하면 그쪽이 곤란해지는 건 아닙니까?”
“너희의 능력을 탐하는 자들이 나를 좀 괴롭히긴 하겠지. 그래도 감당이 안 될 수준은 아니야.”
“그렇다면 남겠습니다. 아직 신탁이 이행된 것도 아니고 족장이 저런 상태니…….”
“내 영지에서 만큼은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해주겠어. 뭐 쥐꼬리만 한 영지지만.”
태훈은 한쪽 옆에 쌓여 있는 서류더미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리 길지 않은 전쟁이었지만 처리해야 할 문제는 산적해 있었다.
대부분 대금 결제에 관련된 서류들.
태훈은 알을 불러 재정 상황에 대해 물었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당장 이번 가을부터 차관의 이자와 원금이 빠져나가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이곳은…….”
“수입원이 없지.”
애당초 이곳은 세레니스 제국이 오그리아와 마주하고 있던 요새가 있던 위치.
영지라고 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싸움만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었고 특산물도 없었다.
거기다 당장 급한 건 식량이었다.
전쟁 중엔 사방에서 전쟁 물자가 들어왔고 5황녀의 배려로 당분간은 걱정이 없겠지만 앞으로가 문제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험난한 지형이라 논이나 밭은 꿈도 꾸기 힘들었다.
“흠, 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는 건가.”
“뭐 좋은 아이템 없습니까? 왕자님은 돈 버는 데에는 귀재셨잖습니까.”
“그게 하루아침에 되는 줄 알아? 내가 어릴 때부터 몇 년을 고생했다고 생각해?”
상회를 얀 제국에게 통째로 넘긴 것이 후회되었다.
그가 전문 분야인 제약을 위주로 한 또 다른 상회를 만들기엔 상황이 껄끄러웠다.
차관까지 저리로 빌린 마당에 그것은 상도덕이 아니었다.
또 이미 팔아넘긴 크로이츠 상회와 같은 격의 상회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얀 제국과 척을 지겠다는 말 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냥뿐인가요?”
“전쟁 통에 몬스터가 짐승은 씨가 말랐을 거야. 근본적으로 다른 해결책이 필요해.”
산악 지형이었으니 산에 대해 잘 아는 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가 택한 인물은 구레드르.
“흠, 쓸 만한 광물 말인가.”
“작은 영지지만 딸린 식구들도 있고 빚도 갚아야 합니다. 돈이 될 만한 광물이 있겠습니까?”
“파보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일단 철광석은 나올 것 같긴 한데.”
구레드르는 말하면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맥을 찾는 데만도 수개월이 걸리고 광산을 만들고 채굴까지는 수년이 걸린다고 했다.
거기다 매장량 또한 얼마일지 모르니 수지타산이 맞을지 장담할 수 없다고 하였다.
태훈은 고민에 빠졌다.
시간도, 물량도 장담할 수 없는 사업에 인력과 자금을 투입할 수는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의 눈에 정리를 하고 있는 군대가 보였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각 국의 군대가 짐 정리를 하는 모습이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얀 제국의 특이한 복색이 눈길을 끌었다.
물끄러미 그것을 지켜보던 그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얀 제국에 가봐야겠어.”
“거긴 왜 가십니까?”
“돈이 될 만한 아이템이 있어.”
그는 연합군을 이루기 전 얀 제국의 황자와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
산업혁명을 이끌어올 기술.
석탄을 뛰어넘는 석유.
그는 오일 머니를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에 랑 노인이 꺼내온 혼사 문제와 자신을 도와줄 파케 영애도 얀 제국에 있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알이 물었다.
“앞으로 얀 제국과 사업을 할 생각이십니까?”
“거기서 개발하고 있는 기술은 대륙의 판도를 바꿀 거야. 마법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의 기술이지.”
“그렇게나 대단한 기술입니까?”
“응. 그리고 거기엔 원유라는 자원이 필수적이지. 거기선 이미 채굴에 성공한 모양이니 필요한 지식들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중요한 기술에 대해 순순히 협조해 줄까요?”
“혼사 이야기까지 끌고 왔잖아. 아예 절망적이진 않아.”
“그럼 부인께는 뭐라 말씀을…….”
“혼사 이야기를 꼭 성사시키겠다는 건 아니야. 최대한 이용해 보자는 거지.”
“쉽게는 안 될 겁니다.”
“그러니까 네가 도와줘야지.”
“그럼 부인께는 뭐라 말씀드리죠? 원래 다음 주면 이곳으로 돌아오실 예정이었습니다만.”
“어차피 여기보단 세레니스가 더 안정적이야. 험한 길 오게 하는 것도 그러니 당분간 거기 있으라고 전해줘. 5황녀에게는 내가 말할게.”
태훈은 랑 노인을 찾았다.
그가 얀 제국을 방문해 보고 싶다는 뜻을 밝히자 랑 노인은 뛸 듯이 기뻐했다.
“본국에 미리 기별을 넣도록 하죠. 언제쯤 방문하실 예정이신지?”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그럼 이왕에 저희와 함께 가시죠.”
랑 노인은 본국에서 준비할 시간을 줘야 한다면서 본인의 귀국 날짜를 며칠 늦추면서까지 동행해 주겠다고 했다.
본인의 입지가 올라가는 일이니 랑 노인은 적극적으로 그를 도왔다.
?
랑 노인과 함께 도착한 얀 제국은 첫 풍경 자체가 인상적이었다.
아시아 복식을 보고 당연히 건축 양식도 그러겠지 했지만 의외로 다른 왕국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높게 올라가는 다른 왕국과는 달리 넓게 퍼지는 형식의 건물들이 쉽게 눈에 띄었다.
태훈은 얀 제국의 영토에 들어서면서부터 주위를 눈여겨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산업화가 이루어지진 않았는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풍경에 실망했다.
그러던 중 태훈은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기둥들을 볼 수 있었다.
단번에 그것이 시추를 위한 물건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수도와 가까워질수록 그러한 물건들이 자주 눈에 들어왔다.
수도에 입성한 그를 맞이한 것은 증기기관을 보여준 헤이링 황자였다.
“어서 오십시오, 공왕. 얀 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신탁 전쟁의 영웅을 모시게 된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안으로 드시죠.”
태훈은 말에서 내려 헤이링 황자를 뒤따랐다.
“저자가 크로이츠인가.”
“단신으로 오다니. 담이 큰 것인가 아니면 그만큼 자신 있는 것인가.”
그를 뒤따르는 호위 병력이나 가신은 전무했다.
오롯이 태훈은 단신으로 얀 제국을 찾은 것이다.
물론 얀 제국이 태훈과 척을 지진 않았으나 그래도 공왕의 신분을 가진 인물이 혈혈단신으로 다른 나라를 찾은 전례는 없었다.
황제는 세레니스 제국의 황제와 비교하면 젊은 편이었다.
“우리 제국에 온 것을 환영하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이번 기회에 얀 제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갑작스레 찾아온 점 또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허허, 그럴 필요 없네. 제국은 전쟁 영웅을 환영하네.”
정정한 모습을 과시한 황제는 길게 말하지 않고 직접 단상에서 내려와 태훈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 모습에 신하들은 놀라는 듯했지만 태훈은 무엇 하나 꿀릴 것 없다는 듯 당당한 자세를 보였다.
“자네를 위해 조촐한 자리를 마련했으니 같이 가지.”
황제가 안내한 곳은 안뜰이었다.
실내가 아닌 실외였고 축구장 몇 개는 이어놓은 듯한 터에 엄청난 수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거기에 온갖 음식과 장식품들이 놓여 있었고 황제와 태훈이 입장하자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마치 우리 국력은 이 정도는 된다는 듯 과시하는 모습이었다.
“전쟁의 피로도 다 풀지 못했을 테니 오늘은 조촐하게 마련했네.”
‘이게 조촐하다고?’ 태훈은 속으로 실소를 터뜨렸다.
결코 가벼운 자리도 아니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하게.”
“감사합니다.”
황제는 몇몇 신하들과 면담을 나누며 자리를 떴다.
지금껏 태훈이 본 왕들과는 사뭇 달랐다.
대부분 나이가 들어 정치 같은 것들은 아들이나 귀족들이 맡아 했지만 얀의 황제는 자신이 직접 하는 듯했다.
헤이링 황자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익숙하게 주변을 돌아다니며 얀 제국의 귀족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러던 중 익숙한 인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상대도 태훈을 발견했는지 손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아, 모처럼 두 분이 만나셨으니 담소라도 나누시지요.”
헤이링 황자는 알아서 자리에서 빠져주었다.
손을 흔든 것은 다름 아닌 파케 영애였다.
“잘 지냈어?”
“네, 잘 지내고 있죠.”
“조금 수척해 보이는데?”
“할 게 너무 많아서요. 배우고 또 배우고. 끝이 없어요. 아, 이쪽은 얀드로 님이세요.”
파케 영애는 자신의 상관인 얀드로를 소개시켜 주었다.
더불어 증기기관의 최초 설계자라는 것도 덧붙였다.
태훈의 눈이 빛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반갑습니다. 얀드로입니다.”
“크로이츠입니다. 파케가 잘하고 있나요?”
“물론입니다.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깨우칩니다. 덕분에 제 자리도 염려 없이 넘겨주었죠.”
“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저도 얀 제국의 기술에 관심이 많거든요.”
“저도 파케 영애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실질적으로 파케 영애가 공왕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하더군요.”
“과찬이십니다. 그럼 오늘은 학자의 신분으로 대화를 나누어 볼까요?”
“허허, 좋습니다. 견문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겠군요.”
얀드로는 기분 좋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