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오그리아의 군영에서는 후방의 보급기지 습격에 대한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회의가 끝난 후 몇몇 귀족들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눈빛을 주고받은 자들은 끝까지 방에 남았다가 다른 자들이 나간 뒤 문을 닫았다.
“남작, 수도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그놈들이 모두 장악했습니다. 황실의 근위대도 모두 그놈들로 교체된 모양입니다.”
가면을 쓴 자들과 손을 잡은 건 자신들의 대업을 위해 이용하자는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뀌고 새로이 황제에 오른 자와 귀족들은 젊고 혈기가 왕성한 자들이었다.
마데우스라는 자가 언데드를 자유로이 다루는 것을 본 그들은 욕심이 생겨났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사의 군단을 앞세운다면 다른 두 제국을 능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연합군의 방어선이 단단했다.
거기에 후방 물자까지 기습당하자 몇몇 귀족들은 흐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이러다간 나라를 통째로 넘겨주게 생겼군.”
“어차피 신탁 때문이라도 놈들을 상대해야 합니다.”
“그럼 지금 일을 치르자는 겁니까?”
“으음, 놈들이 유바와 헬렌에게 한 짓을 보면 그렇게 믿음이 가지도 않아요.”
오그리아에서도 신탁의 내용은 알고 있었다.
다만 자신들의 목표를 어느 정도 이룬 뒤에 치자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녀석들의 병력도 전방으로 빠져 있는 지금이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하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도 없는데 놈들을 치는 건…….”
“유바와 헬렌으로 만족해야겠죠. 연합군과의 협상은 제가 맡겠습니다.”
유바와 헬렌의 병력은 이미 언데드화 되었기에 적은 수의 군대만으로도 충분히 점령할 수 있었다.
“황제는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황제는 놈들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렸소. 더는 우리의 황제가 아니오.”
“하지만 정권이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바로 갈아 치우는 건 무리 아닙니까?”
“일단 병을 핑계로 가두어둔 다음 1황자를 황태자로 내세웁시다.”
1황자는 이제 겨우 8세였다.
그들은 어린 황태자를 대리로 내세우고 자신들이 대리 정치를 할 생각이었다.
“그럼 결행은 언제합니까?”
“물자의 호위를 한다 하고 3군단과 4군단의 병력을 차출하여 후방으로 뺍시다. 수도의 우리 일행들과 합류시켜 황궁을 장악하면 될 듯하오.”
귀족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덜컥-
순간 방문이 열리자 그들은 얼음장처럼 굳어져 버렸다.
흰 머리와 정갈한 수염을 한 집사 차림의 남성이 들어왔다.
가면을 쓰고 있었기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집사 차림의 남성은 점잖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서 다들 뭐 하십니까?”
“어찌 노크도 없이 들어오는가? 여긴 회의실이거늘.”
“회의에 들어갔던 분들이 나오셨길래 회의는 끝난 줄 알았습니다만.”
목소리에는 미안한 감이 없었다.
되려 당당하다는 뉘앙스였고 귀족들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 후방 기습 사건 때문에 우리끼리는 따로 의견을 좀 나누었소. 사령관님은 어디 계시오?”
귀족 하나가 금세 대화 주제를 바꾸며 사령관의 행방을 물었다.
현재 오그리아의 사령관은 루센 공작과 노먼이라 불리는 가면을 쓴 자가 같이 맡고 있었다.
나이 든 집사는 노먼이라는 자의 시종이었다.
“무슨 일로?”
“그건 당신이 알 필요 없소만.”
“사령관님은 집무실에 계십니다.”
“그럼 수고하게.”
귀족들은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가면의 집사는 그런 그들의 뒤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귀족들은 건물을 나와 한적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들킨 건 아니겠지?”
“알아챈 낌새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수도는 그렇게 한다 치고 이곳의 병력은 어떻게 처리할 겁니까?”
아직 가면의 조직이 이끄는 좀비와 구울의 숫자는 10만을 넘었다.
거기에 헬렌과 유바에서 정신지배를 받은 성기사와 신관.
구울과 좀비들을 컨트롤하는 흑마법사들의 숫자도 상당했다.
수도를 장악한다 해도 노먼의 군사들이 황제 보호를 명목으로 군사를 돌려도 난감했다.
연합이라는 적을 두고 내분을 일으켜도 문제였다.
“연합군과 협정을 맺는 게 우선순위 같은데요.”
“우리 쪽에서 먼저 휴전이나 종전을 내세우면 내어주는 게 있어야 할 것인데 뭘 내어줄 겁니까?”
“내어준다면 그놈들의 목이겠죠. 우리는 대의를 위한 쿠데타여야 합니다.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그들은 자신들이 악의 무리에 맞서기 위한 세력임을 강조하려 했다.
그렇게 하면 일이 잘 풀린 뒤 연합군과의 회담에서 내어줄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거기에 더불어 신탁이 말한 악의 근원을 뿌리 뽑았으니 명분은 충분했다.
귀족들은 다 같이 노먼에게로 향했다.
가면을 쓰고 있는 노먼은 풍채가 좋은 남자였다.
귀족들이 우르르 몰려오자 노먼이 물었다.
“무슨 일이지? 부른 기억이 없는데.”
“사령관께 건의가 있어서 왔소.”
“건의?”
“이번에 후방 보급기지가 습격당하지 않았소이까. 보급에 차질이 생겼으니 보완을 할까 합니다.”
“그 소식은 들었다. 하지만 큰 손실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앞으로가 문제 아닙니까. 이번엔 소수지만 다음번엔 새까맣게 날아올지 누가 압니까?”
“그래서?”
“우리 쪽 병력 일부를 빼내어 후방으로 보내려 합니다.”
“그건 그쪽 지휘부의 생각인가?”
또 한 명의 사령관인 오그리아의 귀족의 지시냐고 묻는 것이었다.
“공작께는 우리가 말씀드릴 겁니다. 우선 이쪽에 먼저 보고하자고 해서 찾아온 것이오.”
그 말에 노먼은 실소를 터뜨렸다.
“무능하다 못해 얄팍하군.”
“뭐……. 뭐요?”
“말을 삼가시오!”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노먼을 보며 귀족들의 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대놓고 능멸하는 노먼의 모습에 주먹을 떠는 자도 있었다.
스윽-
노먼이 손을 움직이자 귀족들이 움찔거렸다.
가면을 벗자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다부진 체격과는 달리 나이 들고 날카로운 인상의 얼굴이 드러났다.
노먼의 눈에서는 붉은 광채가 깃들어 있었다.
“모……. 몸이…….”
그의 눈을 쳐다 본 자들은 몸이 굳었다.
옴짝달싹하지 않는 몸을 움직이려 노력했지만 밀랍처럼 굳어진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노먼의 눈에서 붉은 기운이 흘러나와 사람들의 눈으로 흘러들어 갔다.
“네놈들 계획은 다 알고 있다. 숨어 있는 놈들을 말해.”
“크윽, 의식이…….”
이내 동공이 붉은색으로 물들자 귀족들은 평온한 표정으로 잠잠해졌다.
“말해라, 이 일에 가담한 자들을.”
“아가멤스 백작, 세서리온…….”
사람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 이름들을 내뱉었다.
그것들을 모두 듣고 난 노먼은 이름들을 적었다.
“그게 끝인가?”
“그렇소.”
“네놈들은 아무도 찾지 못할 곳으로 가서 자결해라.”
“알겠소.”
귀족들이 문을 열자 그곳에는 집사가 서 있었다.
귀족들이 홀린 듯 떠나간 뒤 집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나머지는 어떻게 할까요?”
“신경 쓸 것 없다. 수도에 있다는 놈들은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해. 저녀석들의 부하들 중에 적당한 놈을 골라서 포섭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집사는 노먼에게 편지를 하나 내밀었다.
그것을 읽고 난 노먼은 편지를 불태워 버렸다.
“모든 준비가 끝났군. 다만 그놈이 문제야.”
“연합군 사령관 말씀입니까?”
“인질을 잡는 쪽은 실패했다는군. 어떻게든 그 녀석을 생포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하시렵니까?”
노먼은 다시 가면을 쓰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사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둘이 향한 곳은 연병장이었다.
그곳에는 거대한 키메라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머리가 셋이 달린 키메라는 둘을 보자 사납게 난동을 부렸다.
“직접 가시는 겁니까?”
“그분께서 3일 내로 정리하라고 하는군. 그러려면 직접 나서야지.”
“준비하겠습니다.”
* * *
정령계는 총 6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각각의 속성에 맞는 환경을 가진 구역들의 공통점은 푸른 하늘.
하지만 뮤즈의 존재가 출현한 이후에 하늘은 항상 보랏빛이었다.
화륵-
물 대신 시뻘건 용암이 흐르는 곳에서 허공으로 불길이 치솟았다.
불의 정령들이 속한 구역에는 커다란 산 하나가 있었다.
산 안의 동굴에는 불의 졍령왕의 거처가 있었다.
촤륵-
그 거처 한쪽 구석에 쇠사슬이 땅을 긁고 있었다.
사슬에 묶여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뮤즈였다.
자신의 손목과 발목에 묶인 쇠사슬을 끊어보려 했지만 쇠사슬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잠들어 있던 찰나 거대한 충격에 눈을 떴을 때 자신은 이곳에 묶여 있었다.
태훈이 처음 알약을 털어 넣었을 때였다.
뮤즈의 앞에 빨간 구슬 하나가 날아들었다.
“소용없다. 그 쇠사슬은 내가 직접 담금질을 해서 만든 물건이지.”
“왜 나를 이곳에 묶어두는 거지?”
뮤즈가 무표정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네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걸 가졌으니까.”
뮤즈의 반대편에는 거대한 솥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온갖 마법진이 새겨진 거대한 솥 주위에는 불의 정령들이 늘어서 있었다.
뮤즈가 저게 무엇이냐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짓자 불의 정령왕이 말했다.
“제련을 위한 도구다. 네가 신기들을 하나로 모으는 능력이 있더군. 신기가 뭔지는 알지?”
불의 정령왕은 뮤즈의 몸이 신기를 흡수하여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나에게 왜 그런 능력이 있지?”
“네가 혼종인 것이 큰 이유겠지. 두 속성 이상의 존재가 하나로 만들어지는 경우는 드물어. 그 인간 녀석이 어떻게 널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로선 잘된 일이지.”
“그 열쇠라는 것이 만들어지면 나는 어떻게 되지?”
불의 정령왕은 그 물음에는 답하지 않았다.
뮤즈는 마나를 끌어모았다.
정령계라 그런지 마나는 더 쉽게 모였지만 번번이 쇠사슬이 마나를 빼앗아갔다.
뮤즈의 눈에 다른 신기들이 보였다.
신기들이 솥 안으로 들어가자 이내 정령들이 뮤즈가 묶인 쇠사슬을 끌고 솥 앞으로 끌고 갔다.
그대로 솥 안으로 던져진 뮤즈를 보며 불의 정령왕이 말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라. 넌 가식 없는 세상을 위한 시작점이 되는 것이니.”
“……헛소리도 그 정도면 병이야.”
불의 정령왕에게서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
불길은 이내 솥 안으로 들어갔고 순식간에 뮤즈를 집어삼켰다.
어느새 솥 안에는 불길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고 뮤즈는 보이지 않았다.
솥에 새겨진 마법진이 빛을 내자 솥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잠시 뒤.
솥 안에는 녹아내린 쇳물 같은 것이 가득 차 있었다.
“이제 나머지들을 넣으면 되는 건가.”
그때 하급 불의 정령 하나가 정령왕에게 다가왔다.
“물의 정령왕이?”
물의 정령왕이 찾아왔다는 전갈에 불의 정령왕은 급히 자신의 구역 경계로 향했다.
각각의 정령왕은 허락없이 타 존재의 구역에 진입할 수 없었다.
경계면에 나아가니 물의 정령왕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불의 정령왕이여, 옛적에 신기들을 모아 처분한 것이 당신이었지?”
“그랬지.”
“그때 수거한 신기들을 모두 소각한 것이 맞는가?”
“물론이지. 그 잿가루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뿌리지 않았는가.”
사실이었다.
다만 후에 아무도 모르게 그 잿가루를 모은 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군. 자네도 지상의 소식은 들어서 알고 있겠지?”
“과거의 이변과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네.”
“그렇다면 신기가 재등장했다는 것도 알겠군. 그것에 대해 신께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시니 나와 함께 가도록.”
“지금 당장 말인가?”
“급히 찾으시니 바로 가야겠지. 자네가 직접 설명하게.”
“알겠네. 따라가지.”
불의 정령왕은 자신의 동굴 쪽을 한번 쳐다보고는 물의 정령왕을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