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귀족 대표들과 엘프 대표들은 한 문장씩 가계약 조항들을 만들어나갔다.
엘프들의 목적은 하나였다.
불가침조약과 쓸모 있는 땅을 받길 원했다.
반명 귀족 대표들은 최대한 분배하려는 땅의 규모를 축소하려 했다.
지도를 펴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태훈과 팔레트는 이야기에서 빠져 있었다.
태훈은 잠자코 팔레트를 쳐다보았다.
지구의 기준으로 본다며 빠지지 않을 미모.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팔레트의 안색이 나빠지는 것 같았고 이내 땀 한 방울이 흐르는 것을 목격했다.
“팔레트라고 했나? 자세한 건 밑에 사람에게 맡기고 차나 한잔하겠는가?”
그 말에 엘프들의 시선이 한순간 태훈에게 쏠렸다.
“고귀하신 분은 인간과 하실 말씀이 없다.”
엘프 하나가 제지에 나섰다.
그러나 태훈은 개의치 않아 했다.
“괜찮다면 차나 한잔하지. 먼 길을 오느라 힘이 들었을 텐데.”
“이런 무례한…….”
엘프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팔레트가 손을 들며 제지했다.
“좋다. 어려울 것 없지.”
팔레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유리아가 태훈의 뒤를 따랐다.
엘프 쪽에서도 데리고 왔던 엘프가 팔레트의 뒤를 따랐다.
요새는 전쟁 때문에 모든 공간에 전쟁 물자가 놓여 있었다.
귀빈실이라는 것이 없었기에 태훈은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유리아가 직접 차를 만들어 내어놓았다.
“잠시 둘만 있게 해줘.”
태훈이 이야기하자 유리아와 호위를 하던 엘프는 멀찍이 떨어져 이쪽을 주시했다.
거리가 멀어지자 태훈이 얼굴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쳇, 들켰나.”
그러자 팔레트의 얼굴도 한순간에 구겨지며 혀를 찼다.
처음의 얌전하고 냉랭했던 표정은 사라지고 없었다.
“뭐 때문에 엘프로 변장한 겁니까?”
“변장은 아니야. 일종의 빙의지. 언제부터 알았어?”
“마주 앉았을 때부터요. 익숙한 기운이길래 설마 했습니다만.”
“내가 준 약 때문인가 보군. 내 기운에 익숙해져서 그래.”
대화 상대는 신이었다.
“왜 빙의로 나타난 겁니까?”
“이야기하자면 길어. 다른 녀석들한테는 말하지 마.”
이미르는 자초지종을 말하기 시작했다.
다시 현세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위에서 가만히 지켜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것.
하지만 자신이 저승에서 알아본 정보를 말해줘야 했기에 팔레트라는 엘프의 몸을 빌렸다는 것이다.
“팔레트라는 엘프가 동의하던가요?”
“난 신이야. 피조물 입장에선 영광이지.”
“뭐 그렇다고 치죠. 그런데 정령왕이나 지니를 통해서 전달해도 되잖아요.”
“그것도 좀 복잡하게 됐어.”
이미르는 자신이 저승에서 들은 것들을 고스란히 태훈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자신이 왜 비밀리에 태훈과 접선을 했는지도 말해 주었다.
“그러니까 그쪽에도 내부에 첩자가 있다?”
“첫 번째 라그나로크 당시에 신기들을 수거한 것은 정령왕들이야. 신기를 복제하려면 원본이 필요해.”
“원본이 있다면 구태여 복제를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처음 회수할 당시 신기들은 파손된 상태였지.”
“그럼 어느 정령왕이 배신을…….”
“지금 정령왕 중에 그 당시 정령왕이 었던 녀석은 둘이야.”
이미르는 불의 정령왕과 땅의 정령왕을 내세웠다.
신의 말이 전적으로 사실이라면, 그 둘 중에 배신자가 있었다.
그들이 신기를 파기하지 않고 갖고 있다가 적들에게 넘겨주었다는 말이 되었다.
“둘 중에 누가 첩자인지는 내가 밝혀내겠어. 혹시 알포네에 관해 아는 게 있나?”
이미르가 설명하면서 말한 두 신의 이름 중 하나를 듣자 태훈은 입을 다물었다.
큐브에서 갇혀 있으면서 겪은 일은 아직 누구에도 말한 적이 없었다.
자신의 내면 안에 한 명이 갇혀 있다고 말하면 어떻게 될지 경우의 수를 따져보았다.
결론은 아직은 말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아뇨.”
“위에서는 그놈을 미끼로 일망타진할 생각인 것 같으니 혹시라도 찾게 되면 보고해.”
“그런데 구태여 우리가 나설 필요가 있습니까? 위에서도 놈들을 잡고 싶어 한다면서요.”
“뭔가 구려. 여기 관리자인 나에게도 비밀로 하고 일을 진행시키는 게 이상해. 그리고 마데우스는 이미 한번 실패를 맛본 놈이야. 아무런 대책도 없이 똑같은 일을 벌이겠어?”
태훈은 알포네의 말이 떠올랐다.
마주 앉은 자리에서 세계의 진실을 들었을 때 그는 믿지 않았다.
솔직히 방금 전까지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신이 하는 내용과 맞아떨어지는 것이 몇 군데 있었다.
‘그 녀석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태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거짓처럼 보였다.
전생에 비슷한 소재를 한 영화가 몇 있었다.
“이봐, 뭘 그렇게 넋을 놓고 있어.”
“한 가지 물어봐도 됩니까?”
“뭔데?”
“천국은 어떻게 생겼죠?”
“그런 건 1급신이나 문을 연 자밖에 몰라. 실질적으로 문을 연 자는 다시 나오지 않았으니 1급신 정도겠지.”
“……그렇군요.”
“넌 눈앞의 일이나 신경 써. 신기를 모으고 알포네의 행방이나 찾아.”
“알포네를 찾으면요?”
“윗놈들보다 먼저 그 녀석을 미끼로 마데우스란 놈을 잡아야지. 내 차원에서 일을 벌일 값을 똑똑히 치르게 해주겠어.”
태훈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난 빙의하는 시간이 길지 못해. 오늘은 이만 돌아가마.”
그 말과 동시에 신의 기운이 사라졌다.
자신을 말똥말똥 쳐다보는 팔레트에게 태훈은 인사를 건넸다.
“반갑다. 크로이츠다. 사정은 신에게 들었어.”
“그렇군. 그렇다면 둘의 이야기는 끝난 건가?”
“맞아.”
“그렇다면 우리 일을 처리하도록 하지.”
팔레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신이 나와 대화했는지는 묻지 않네?”
“알 필요가 있나? 쓸데없는 호기심은 명을 재촉할 뿐. 그리고 지금 나에게는 엘프의 존속이 더 중요하다.”
“신에게 부탁해 보지 그래?”
“내 몸을 빌리는 대가는 추후에 받기로 했다. 할 말이 더 있나?”
없었기에 태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엘프와의 협상이 끝났다.
지도를 통해 엘프에게 양도할 지역의 후보를 정하는 것으로 1차 협상이 끝났다.
엘프들은 땅굴의 안내를 맡기로 하고 이종족으로 구성된 병력 3천을 밀리고 있는 평야 지역의 지원군으로 보내기로 했다.
회의장을 나서는 태훈의 팔을 알이 붙잡았다.
“왕자님.”
“음?”
“무슨 일 있으십니까? 표정이 안 좋습니다만.”
사실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허무함이 밀려올 뿐.
그 허무함은 알포네와의 대화를 상기하며 더욱 심해졌다.
“별거 아니야. 드래고니안들을 선두로 후방으로 침투할 병력을 뽑아. 나는 총공세 날짜를 잡을게.”
“알겠습니다.”
혼자 남은 태훈은 의자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커다란 목표가 없어졌다.
마치 끝없이 펼쳐진 바다 위에서 방향을 잃은 배에 올라탄 기분이었다.
끼이익-
“100억 포인트가…… 의미 없었다니.”
알포네는 문 너머에 천국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확하게는 만들어지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포인트는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며 그가 생각했던 천국은 없었다.
“하아, 난 뭘 위해 그동안 개고생을 한 거지?”
막강한 힘.
막대한 재력.
모두 포인트를 벌기 위해 기를 쓰고 이룩한 것들이었지만 천국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자 덧없게 느껴졌다.
잠시 멍하니 있던 그는 책상 위에 놓인 손수건을 보았다.
그러곤 그것을 집어 들어 손으로 촉감을 느꼈다.
‘그래, 그렇다면 눈앞의 목표를 우선시하자. 지금 나에겐 지켜야 할 것들이 있어.’
골인 지점은 없어졌지만 달려온 길과 앞으로 놓인 길이 있었다.
레이첼과 아이.
그리고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의 지금 인생과 미래를 지키기 위해선 마데우스를 막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 녀석도 나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했지. 나도 내 인생을 살아야겠어.’
태훈은 다시 지도를 펼쳤다.
* * *
“흠, 실패했다고?”
마데우스는 의자에 앉아 무릎을 꿇고 있는 홀든과 헤라를 쳐다보았다.
헤라는 온몸을 떨고 홀든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너희 정말 쓸모가 없구나?”
“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헤라는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간곡한 말투로 말했다.
“됐어. 너희들은 전선으로 복귀해. 녀석을 데리고 오는 건 다른 애들한테 맡겨야겠어.”
그러자 홀든이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계약은…….”
“뭐 계약은 유효해. 하지만 네가 그 계약을 이행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지. 안 그래?”
“시간은 있으니 내 방식대로 해도 되겠습니까?”
“뭐 좋을 대로 해.”
홀든은 인사를 하고는 방을 나섰따.
헤라는 여전히 머리를 박고 있었다.
“너는 안 나가?”
“요…….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네 무능함에는 질렸지만 그래도 전력은 되니까. 당장 꺼져.”
“가……. 감사합니다.”
헤라까지 방을 나서자 방에는 마데우스만이 남았다.
“흐음, 쉽게 쉽게 가려 했는데 안 되겠네.”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쉰 마데우스는 어디론가 향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밀실.
불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공간으로 들어가자 바닥에서 희미한 마법진이 생겨났다.
대륙 곳곳에 새겨진 마법진의 축소판이었다.
벽에 박힌 수정들을 매만지자 마법진이 3D화 되면서 허공에 펼쳐졌다.
“그 녀석, 알포네를 만났나.”
마데우스는 전황의 보고를 모두 듣고 있었다.
그리고 격전지 한 곳에서 막대한 신의 에너지를 그도 느꼈다.
보고를 들으니 필시 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신과 동등한 힘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 신에게 힘을 나눠받은 모양인데 그렇다면 알포네를 만날 수 있었겠네.”
마데우스는 태훈과 알포네의 만남을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세계의 진실을 아는 자가 한 명 더 늘어났다고 볼 수 있었다.
“되레 잘된 일인건가? 한번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 보는 것도 좋겠어.”
그는 웃었다.
* * *
“총공세에 나선다.”
태훈은 지도를 펼치며 설명했다.
땅굴을 통해 전력의 30퍼센트를 적의 후방으로 이동.
이동이 완료되면 남은 전력과 기구를 사용하여 하늘과 땅에서 진격을 시작하는 총공세 작전이었다.
“언데드들은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언데드들을 한 곳으로 모아야 한다.”
태훈은 언데드 병력을 한곳으로 모을 작전을 설명했다.
현재 평야 지대의 전선을 제외하곤 모두 현 위치를 지키는 상황.
지금 상황에 밀리고 있는 쪽의 병력을 퇴각시키면 적들은 반드시 따라올 것이라 판단했다.
“지금 언데드 병력은 그쪽에 다 모여 있는 것 같으니 일시에 격퇴할 수 있겠지.”
“무슨 방법으로 그 많은 언데드들을 격퇴한다는 겁니까?”
“그건 내가 한다.”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무슨 근자감이냐고 되묻겠지만 모여 있는 자들은 수긍했다.
이미 두 차례나 그의 능력을 보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직후 회복하는데에는 한참이 걸리기 때문에 자신은 전력에서 빠져야 했다.
“그럼 평야 지대의 적들을 포위 섬멸하는 작전입니까?”
“그렇다. 놈들이 깊숙이 들어왔을 때 모든 전선에서 치고 나간다. 손발이 잘 맞아야 하니 연락책들을 제대로 점검하도록.”
태훈은 먼거리에서 신호를 확인할 수 있도록 봉화를 설치하도록 지시했다.
“단 시간 내에 끝내는 게 목표니 각 군영에 작전을 잘 설명하도록.”
태훈의 무거운 말투에 귀족들은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