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태훈은 손에 든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체했던 것이 내려간 듯 속이 후련했다.
수도에서 보내온 5황녀의 편지는 그의 근심을 해소시키는 데 충분했다.
레이첼의 구조 소식.
그렇지만 아군의 피해가 전무하다는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다.
홀든과 헤라를 상대로 피해 없이 레이첼을 구조할 수 있을 리 없었다.
5황녀는 레이첼이 무사하다는 것과 그 증거로 레이첼이 납치 당시 입고 있었던 드레스로 만든 손수건을 동봉했다.
“부수적인 피해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홀든과 헤라가 만만치 않았을 텐데 부수적인 게 없진 않았을 거야.”
“어쨌거나 이제 이건 필요가 없겠군요.”
알은 태훈이 건네주었던 사임장을 눈앞에서 찢었다.
태훈은 요새 밖으로 나갔다.
날씨는 많이 풀려가고 있었다.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오는 중이었다.
몇 시간 전.
그는 다른 곳의 전황을 보고받았다.
엘프를 데리고 오던 중 보았던 평야 지대의 요새는 완전히 뒤로 물러나 최후의 방어선을 쳤다.
다른 곳의 전황은 팽팽했다.
쌍방 전력의 숫자는 비슷했지만 역시나 언데드가 문제였다.
똑똑-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태훈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며 한 장의 편지를 내밀었다.
편지는 세레니스 제국의 황제에게서 온 것이었다.
“뭐라고 써 있습니까?”
“황제가 화가 많이 난 것 같군.”
세레니스 제국의 황제는 자국 수도에서 일어난 이변에 화가 난 상태였다.
거기에 연합군의 병력이 우세한데 어찌 방어에만 급급해하냐는 질책이 담겨 있었다.
현장의 고충을 모르는 전형적인 탁상 귀족의 불평이었다.
“수일 내로 적의 영토로 진격하라는군.”
“그쪽에도 상황은 알고 있을 텐데 무리한 요구를 하는군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거지. 명색이 제국의 수도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생각 같아선 엘프 대표가 오기 전까지 현 상황을 고수하고 싶지만 황제의 의견을 묵살하기도 어려워.”
태훈은 오그리아군이 자리 잡은 협곡 끝을 바라보았다.
‘이곳의 지형으론 서로 전면전을 펼 수 없어. 진군을 한다면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데.’
하지만 다른 곳의 상황도 녹록치 않았다.
이미 한 곳은 전선을 뒤로 물렸고 다른 곳도 방어선을 사수하기도 바빴다.
거기에 자칫 병력을 움직였다가 어느 한 곳이 뚫리기라도 한다면 병력이 나뉘어져 고립이 되는 곳도 생겨날 수 있었다.
“기동성인가…….”
그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의 전략을 떠올렸다.
탱크를 앞세운 고기동 전략.
허점을 찌른 뒤 한 점을 파고들어 적의 후방까지 단번에 도달하는 방법.
태훈은 알을 시켜 아무드의 귀족을 데려오게 했다.
“마장기 말씀입니까?”
“남부 연합 때 사용했던 개조된 마장기. 남아 있나?”
궤도형 마장기.
빠르기도 말에 뒤처지지 않았고 장갑은 얼마든지 늘릴 수 있었다.
“본국에 남아 있긴 하지만 수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태훈은 자신이 박살 내버린 마장기를 떠올렸다.
“수리한다면 얼마나 걸리는가?”
“재원이 있다면 한 달 내로 가능은 할 겁니다.”
당장 움직일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결국 엘프 대표를 기다려야 하는 건가.’
자신이 전진은 불가하다고 버티면 황제는 쉽게 강요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문제도 있었다.
이곳의 사기는 괜찮았지만 다른 전선의 사기가 저하되고 있다는 불평들이 많았다.
‘사기를 위해서라도 한번 총공세를 펼치긴 해야 해.’
태훈은 모든 귀족을 불러 모았다.
“남부 연합에서 가져온 기구는 얼마나 되나?”
“이곳에 배치된 기구는 30기입니다.”
기구도 있었다.
다만 그간 강한 눈보라와 추위로 인해 기구를 띄울 수 없었다.
이제는 날이 풀리고 있었고 바람의 방향도 오그리아 쪽으로 바뀌고 있었다.
“기구에 무장한 병사를 몇 명이나 태울 수 있지?”
“중장갑 보병이라면 조종사를 제외하고 3명. 경장갑 보병이라면 5명까지 가능합니다.”
“최대 150명이군.”
태훈은 지도를 펼쳤다.
오그리아 진영 뒤로는 정찰대가 보고했던 탑이 위치해 있었다.
“적의 보급기지 위치는 확인했나?”
“정찰대가 보고해 왔던 탑이 보급 장소인 것 같습니다.”
“다른 장소는?”
“이곳과 이곳으로 확인됐습니다.”
알이 짚어주는 장소는 자신들이 있는 요새에서 꽤나 먼 거리였다.
다행인 것은 적의 군영도 보급 기지와는 제법 멀다는 것.
험난한 지형 덕이었다.
“기구로는 얼마나 걸릴 것 같아?”
“후방 교란입니까?”
“소수니까 큰 성과는 없을 거야. 하지만 사기 진작을 위해서라도 필요해.”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의 일본 본토 첫 폭격이 그러했다.
효과는 미비했지만 아군의 사기 진작과 황제 달래기용은 필요했다.
“경보병으로 적의 보급에 불을 지르면 된다.”
“기술자들과 함께 의논해 보겠습니다.”
알이 나가자 태훈은 루세프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다른 드래고니안이 그를 간호하고 있었다.
“아직 의식은 없는가?”
“네, 죽은 듯이 잠들어 있습니다.”
루세프는 평온한 얼굴로 자고 있었다.
“쭉 지켜봐.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고.”
“알겠습니다.”
다음으로 태훈이 찾은 곳은 엘프가 있는 방이었다.
유리아가 문을 열어주었다.
“지내기 편한가?”
“지붕이 있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자네들 대표는 언제 오는가?”
“이야기가 빠르게 끝났다면 2, 3일 내로 찾아올 겁니다.”
“땅굴로 적의 후방 어디까지 이동할 수 있지?”
“오그리아 제국의 루프첸코령까지 가능합니다.”
루프첸코령은 족히 100킬로미터는 떨어진 곳이었다.
“꽤나 길군. 그런 땅굴이 대륙 곳곳에 있는 건가? 엘프들이 그 정도로 실력이 좋은 줄은 몰랐는데.”
“우리는 엘프로만 이루어진 집단이 아닙니다. 주축은 우리 엘프지만 협력하는 다른 이종족도 많죠. 드워프도 있고 수인족도 있습니다.”
“그런 연합이 가능할 정도면 자력으로 영토 확보도 가능하지 않았나?”
“우리가 무력으로 땅을 얻으려하면 인간들은 지금처럼 연합으로 맞서겠죠. 그럴 바엔 지금 상황이 더 낫습니다.”
“너희 대표에 대해서 말해주겠나. 협상을 하려면 상대를 알아야지.”
“그걸 나에게서 듣겠다는 겁니까?”
“약점을 말하라고 한 게 아니잖아. 서로 결례 없이 대화를 하고 싶을 뿐이야. 이 전쟁은 나에게도 중요하거든.”
“대화를 위해서라면 알려 드릴 정보는 있죠.”
엘프는 자신들으 지도자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하지만 태훈이 써먹을 만한 이야기는 마땅치 않았다.
되레 인간을 향한 이종족들의 원망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았을 뿐.
험난한 대화가 에상되었다.
?
밤이 되자 기구에 병사들이 올랐다.
경보병들로 이루어진 특공대.
그들은 온몸에 기름주머니를 매달고 있었다.
“절대 상공에서 불빛을 보이면 안 돼. 바로 표적이 될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150명의 특공대는 총사령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날아올랐다.
30기의 기구는 떠오른 뒤 구름 뒤로 숨었다.
아직은 추운 계절이었고 고도가 높아지자 사람들의 사지와 얼굴이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한 시간 정도를 날았을 때 선두에 있던 기구에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기구들이 서서히 고도를 내렸다.
소음 없이 무사히 내려앉은 기구들에서 병사들이 내렸다.
그들이 눈썹과 수염에는 새하얀 얼음이 얼어 있었다.
병사들은 보급창에 기름병을 던졌다.
몇몇 병사들이 적의 보초와 마주치면서 소란이 일어나자 재빨리 불을 붙였다.
그러곤 다시 재빠르게 기구에 올랐다.
?
“손실은?”
“기구 3대와 병사 22명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태훈은 입가를 쓸어내렸다.
적의 보급 창고 절반 이상에 불을 놓았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들이 불을 놓은 곳은 아군이 밀리고 있던 평야 지대의 적에게 보급을 하는 전초기지였다.
아군이 전선을 뒤로 물린 만큼 적은 보급선이 길어졌기에 목로 선정한 것.
태훈은 간밤에 수고한 병사들을 직접 찾아가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하루 동안 푹 쉴 것을 지시했다.
그러곤 각 요새에 기구를 이용한 후방 교란을 지시했다.
이틀 정도 적들은 많은 물자를 잃으며 당황했다.
그렇지만 그것도 수비 병력이 늘어남에 따라 더 이상 시도가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그럴 즈음 요새에 한 무리가 당도했다.
새하얀 백마를 탄 일곱 명의 엘프.
그리고 그중 한 명은 뿔이 달린 말을 타고 있었다.
말을 탄 자는 여성이었다.
‘유니콘인가.’
말에서 내린 여성은 태훈의 앞에 섰다.
“그대가 인간의 대표인가?”
“그러는 그쪽은 엘프의 대표인가보군.”
잠시 서로를 마주보며 기 싸움을 하던 중 먼저 움직인 것은 태훈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지.”
여성은 별다른 의심 없이 성큼성큼 요새 안으로 발을 옮겼다.
“윽, 엘프인가.”
“아, 속이 울렁거려.”
엘프를 본 사람들은 마치 더러운 것을 봤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럼에도 엘프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태훈이 안내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테이블에 마련된 자리에는 태훈을 제외하고도 몇몇 귀족이 동석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군. 난 연합군 사령관을 맡고 있는 크로이츠라고 한다.”
“팔레트라고 한다.”
팔레트라고 하는 여성은 얼굴에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했다.
에메랄드빛 긴 머리에 눈동자도 에메랄드빛을 가진 팔레트는 녹빛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팔다리는 가녀렸고 피부는 눈처럼 하얬다.
“그대가 우리 쪽에 협상을 제의했다고 들었다.”
“조금 오해가 있는 것 같군. 협상을 제의한 쪽은 그쪽이야.”
태훈은 어느새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엘프를 향해 턱짓을 했다.
자신이 데리고 온 엘프였다.
“그런가? 그래서 그대는 우리에게 어떤 땅을 약속할 수 있다는 거지?”
“전쟁에서 이기면 이 요새를 기준으로 점령한 오그리아의 영토 일부.”
“정확하게 말을 해라. 인간들을 상대로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건조한 말투도 그랬지만 팔레트라는 엘프의 행동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함이 묻어 있었다.
“예체호른 숲을 아나?”
“알고 있다.”
“그 정도의 영토를 약속하지.”
예체호른은 대륙 중앙에 있는 숲이었다.
카나리스 왕국의 절반 정도 되는 면적을 가지고 있었고 호수와 산도 있었다.
“영토만으로는 안 된다. 인간들이 그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모든 국가의 약속이 필요하다.”
그 말에 옆에 있던 귀족들이 힐끔 태훈을 쳐다보았다.
이미 엘프와의 협상안은 각국의 귀족들을 통해 통보한 상태였다.
태훈과 함께 자리에 동석한 귀족들은 각국을 대표하고 있었다.
“흠, 그건 이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에 약조를 해주지.”
한 귀족이 끼어들자 팔레트의 시선이 그 귀족을 향했다.
“약조? 인간들의 구두 약속은 믿을게 못 돼.”
“애당초 남의 영토에 땅굴을 파서 국경을 넘나드는 것 자체가 불법이다. 그쪽이 먼저 요구할 입장은 아닐 텐데.”
“대자연에 주인은 없다. 인간들은 만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인가?”
“엄연히 땅에는 주인이란 것이 있어!”
“인간들이 멋대로 땅에 줄을 긋고 자기 땅이라 우기는 것뿐 아닌가.”
서로가 비아냥거리는 듯하자 회의장의 분위기는 금세 험악해졌다.
그러자 태훈이 나섰다.
“인간들의 줄긋기 놀이에 생각이 있으니까 여기 온 것 아닌가? 땅이 필요해 온 것 아니냐고.”
“…….”
“인간을 어찌 생각하든 지금 대륙의 대세는 인간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안전을 보장받고 싶다면 협력해.”
“우리가 오그리아 쪽에 붙을 수도 있다.”
“그쪽은 미래가 없어. 언데드를 이웃으로 두고 살 생각인가?”
“……구두 약속은 필요 없다. 그렇다면 지금 이곳에 있는 자들의 서명이 들어간 문서를 가계약으로 한 증서를 만들어라.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은 각 국가를 대표해서 있는 자들이겠지.”
“그 정도라면 문제없지.”
“자세한 협약 내용은 우리와 이야기 하면 될 듯하오.”
그녀의 옆에 있던 엘프들이 대신 나섰다.
엘프들의 실무자인 것 같은 자들은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며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