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5황녀는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수도의 한적한 공터.
아무것도 없는 곳에 혼자 도착한 그녀는 말에서 내렸다.
횡량한 공터에 바람이 불자 먼지가 일었다.
잠깐 앞이 보이지 않는 광경이 연출됐고 먼지가 걷혔을 때 눈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준비는?”
“준비야 언제든. 하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남자의 물음에 5황녀는 잠깐 눈을 감았다.
“후회는 없으십니까?”
“없어. 본래 목적과는 다르지만 이게 더 큰일이야.”
“내부에서 말이 많습니다. 애당초 황녀님을 위해 모인 자들이라…….”
“세상이 망하면 나도 없어. 그 정도는 이해할 텐데?”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10년 전에 만난 그 노파. 기억해?”
“잊을 리가 있습니까. 지금의 저희를 있게 한 자인데요.”
“그 노파가 말했던 걸 우리가 여태 오해한 걸지도 몰라.”
“그럴걸요.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때로 되돌아가고 싶어지네요.”
“뭐야? 후회하는 거야?”
“후회는 아닙니다. 다만 그때 황녀님을 다른 곳으로 모셨다면 유적을 발견하지 않았을 테고, 그동안 황녀님은 마음 졸이며 살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러게, 괜히 걱정했어. 너희들도 이렇게 될 필요가 없었는데.”
“어쩔 수 없죠. 그때는 이게 최선이라고 다들 생각했으니까요. 후회는 없습니다.”
남자는 멋쩍게 웃었다.
황녀도 남자를 따라 웃었다.
“마지막으로 가족들을 보지 않아도 되겠어?”
“저희들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이제 와서 나타나면 원망밖에 더 듣겠어요?”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이제 와서 뭘요.”
“레이첼의 위치는?”
“척후조가 감시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녀석들 인간 아니죠?”
“응. 왜 겁나?”
“겁나긴요. 우릴 어찌 보시고.”
“명심해. 레이첼 구출이 우선이야.”
“최선을 다해보죠.”
휘잉-
다시 한번 바람이 불자 모래가 일었다.
다시 모래가 걷혔을 땐 남자의 뒤로 복면을 쓴 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다들 준비됐어?”
황녀는 그들을 다 아는 듯한 모습이었다.
복면을 쓴 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내 친구를 구해줘.”
?
“음?”
홀든은 걸음을 멈추었다.
홀든은 먼저 보냈던 하수인들에게서 레이첼을 넘겨받고 전선으로 향하는 길어었다.
그리고 조금만 더 가면 세레니스 제국령을 벗어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뭐야? 왜 멈춰?”
“적이다.”
“응? 어디?”
헤라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뭔가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뭐야, 아무것도 없는데.”
헤라의 짜증 섞인 말투에도 홀든은 귀를 기울였다.
‘처음 느껴보는 기척이군.’
사람의 기척 같았지만 그렇다기엔 무척이나 희미했다.
그 순간.
쉬이익-
홀든과 헤라를 향해 360도 전방위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투명한 무언가였지만 빛이 굴절되어 눈치챌 수 있었다.
홀든과 헤라는 재빨리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또 다른 무형의 물체가 날아와 그들의 팔다리를 옳아맸다.
탓-
순식간에 무언가가 다가와 홀든의 등에 묶여 메여 있던 지게를 낚아채 갔다.
지게에는 레이첼이 묶여 있었다.
헤라는 적이 보이지 않자 사방으로 힘을 난사했다.
쾅- 쾅-
사방이 폭발하며 먼지가 일었고 그 먼지 속에서 무언가가 일렁였다.
홀든이 재빨리 다가가 대거를 휘둘렀지만 허공을 벨 뿐이었다.
손에 닿는 감촉이 없자 홀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실체가 없다?’
홀든이 침묵하는 사이에 수십 번의 공격이 덮쳐왔다.
피핏-
그의 몸 곳곳에 상처가 생겨났다.
‘무슨 놈들이지?’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안 것은 헤라도 마찬가지였다.
“정령이냐?”
헤라는 신력을 방출했다.
그녀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가자 그제야 적들의 정체가 보였다.
복면을 쓴 자들.
그들의 몸은 반투명했다.
“뭐야, 네놈들은. 인간도 아니고 정령도 아니군.”
“…….”
“말은 하지 않겠다는 거지? 오냐. 덤벼.”
적의 정체를 파악한 헤라는 웃으며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녀도 허공을 벨 뿐이었다.
“쳇, 뭐 이런 자식들이 다있어.”
“진정해. 물리적으로 안 된다면 마법을 사용해.”
홀든이 대거에 기운을 불어넣자 채찍처럼 늘어났다.
채찍에는 붉은색 기운이 서렸고 헤라도 손에 하얀 구체를 만들었다.
레이첼의 기운이 멀어지는 것을 느낀 홀든이 먼저 움직였다.
채찍이 공중에서 살아 움직이며 그를 향해 달려드는 반투명한 적들을 공격했다.
복면을 쓴 자들은 그것을 맞받아 치며 홀든을 압박했다.
헤라는 중구난방으로 신력을 난사하며 사방을 박살 내고 있었다.
복면을 쓴 자들이 레이첼로 향하지 못하게 자신들을 막아서자 홀든은 그들이 레이첼 구출이 목적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채찍을 휘두르며 복면 하나를 낚아챈 홀든은 그대로 지면에 상대를 처박았다.
펑-
약한 폭발음과 함께 복면의 실루엣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이 자식들. 정령도 아닌데 대체 뭐야?”
헤라는 신력을 난사하며 귀찮은 듯 중얼거렸다.
물리력은 통하지 않으면서 다른 무형의 힘으로는 데미지를 줄 수 있는 것은 정령과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반투명한 실루엣을 가지고 있고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몇 명의 복면을 처리한 홀든은 한 발 물러섰다.
그러곤 자신을 둘러싼 자들을 보며 물었다.
“왕자가 보냈 놈들인가?”
“왕자? 우리 주인은 여성이다.”
한 복면이 말하자 홀든은 그쪽으로 시야를 돌렸다.
“기운이 특이한데 산 자인가 죽은 자인가.”
“그 중간쯤이다. 아, 그렇다고 언데드하고 착각하면 곤란해. 우린 숭고한 자들이거든.”
확실히 언데드는 아니었다.
무형의 몸체를 갖고 있으면서 물리력을 행사하는 존재는 없었다.
“애매한 존재로군.”
“덕분에 너희들이 상대하기도 애매하지. 근데 그런 너희들도 정상적인 인간은 아닌 모양이다만.”
“누구의 지시인가?”
“그건 알 것 없다.”
홀든은 다시 레이첼이 도주하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복면들이 그런 홀든을 가로막았다.
“보내주지 않는다.”
캉캉캉-
무형의 기운이 홀든의 채찍과 부딪힐 때마다 섬광이 튀었다.
헤라가 내뿜는 빛을 등질 때면 상대가 보이지 않아 그때마다 홀든의 몸에 상처가 늘어났다.
‘귀찮군.’
제대로 보이지 않는 적이란 것이 상당히 귀찮자 홀든은 헤라를 향해 말했다.
“이 녀석들은 네가 맡아라.”
“뭐?”
“난 제대로 볼 수 없으니 네가 맡아라.”
홀든은 헤라를 향해 질주했다.
그리고 그녀를 교차하는 순간 품속의 플라스크를 바닥에 던졌다.
펑-
홀든이 수도에서 도망쳤을 때 썼던 도구였다.
단순한 연막이 아니라 미세하게 마나의 기운이 섞여 있어 기척을 완전히 숨길 수 있었다.
“이 개자식!”
헤라는 욕을 내뱉으며 홀든을 쫓던 자들도 같이 상대하기 시작했다.
?
홀든은 레이첼의 기운만을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자신을 쫓아온 한 기운을 느끼고는 자리에서 멈췄다.
“넌 좀 다르군.”
“명색의 무리를 이끄는 자다. 그런 얄팍한 물건에 낚이면 꼴이 우습지.”
목소리는 자신과 대화했던 복면이었다.
문제는 헤라와 떨어졌으니 이제 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홀든은 한숨을 내쉬고는 품속에 다시 손을 가져갔다.
보라색 액체가 든 병을 들이마시자 그의 몸이 뒤틀렸다.
부풀어오르는 홀든을 보며 복면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이 괴물은.’
신기한 광경이었지만 점점 커지는 위압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약을 복용한 홀든의 눈은 초점이 없었다.
“이제 보이는군.”
흰자만 남아 있는 홀든의 눈에 상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너 괴물이구나?”
“피차 남 말 할 처지가 아닐 텐데.”
“본래 여자만 구출하려 했지만 너는 살려보내선 안 되겠다.”
복면이 검을 고쳐 쥐는 모습을 본 홀든은 그것이 정식 검술이라는 것을 알았다.
“기사였나.”
“기사였지.”
“와라.”
그렇게 시작된 싸움에서, 홀든과 복면은 3분여 동안 수십 번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홀든의 채찍이 스칠 때마다 복면의 신체는 신기루처럼 터져 나갔고 복면의 무형의 검이 스칠 때면 홀든의 몸에서 핏줄기가 빗발쳤다.
퍼어엉-
그 순간 헤라가 있던 쪽에서 굉음과 함께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둘은 잠시 그쪽을 바라보며 싸움을 멈추었다.
헤라 쪽에서 일어난 폭발로 다수의 기운이 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래도 너희가 진 것 같군.”
“뭐, 괴물들을 상대로 이긴다는 생각은 안 했어. 목적은 달성했다.”
복면의 말에 홀든은 이미 레이첼의 기운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남자가 보낸 건 아닌 것 같은데 누가 보낸 거지? 그리고 너희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홀든이 묻자 복면은 자세를 풀며 대답했다.
“우리는 잊혀진 자. 고대의 힘을 이용해 제국의 수호자로 남기로 한 고독한 존재.”
“어렵게 말하는군.”
“쉽게 말해 망령이다. 스스로 망령이 된 것을 택했지.”
“망령이라. 유령이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군.”
“우리도 너희 같은 괴물이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다. 우리 주인이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상대하고 있는 걸 알았으니 최선을 다해 막아주마.”
“이미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알텐데.”
복면의 몸 곳곳은 넝마더기처럼 너덜너덜했다.
그리고 처음 봤을 때보다 몸이 많이 투명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복면은 물러서지 않고 자신을 향해 검을 고쳐 쥐고 있었다.
“……뭐 그것이 너희 본분이라면 존중해 주마.”
복면이 달려들자 홀든도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
사라락-
남자의 몸이 먼지로 변해 사라졌다.
남자가 누워 있던 돌 제단만이 남았고 그 주위에는 수십 개의 돌제단이 있었다.
이미 주인은 없는 듯했다.
11년 전.
한 소녀가 있었다.
치열한 형제들 간의 싸움에서 밀려난 소녀는 아무것도 모를 나이였다.
어느 날 그녀가 사라지자 기사단은 그녀를 찾아 해맸다.
발자취를 따라 지하 수로를 샅샅이 뒤졌고 수로의 한쪽 벽이 무너진 것을 발견했다.
무너진 벽 안에는 오래된 듯한 공간이 있었고 소녀는 한 노파와 함께 마주 앉아 있었다.
누구냐고 묻는 말에 노파는 소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오래된 그림자가 산과 들을 삼키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삼킨다.”
“그 손 놓아라. 그분은 이 나라의 황녀시다.”
“황녀라고 해도 그 그림자는 절대 못 피해.”
기사들은 주위를 살폈다.
퀴퀴한 냄새.
수로와는 전혀 다른 구조물들.
수로는 제국의 역사보다 오래되어 몇 번이고 보수 공사를 해온 구조물들이었다.
그리고 무너진 담벼락.
적어도 수백 년은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없던 이 공간에 평범한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주위의 분위기에 젖어 노파의 말을 쉽게 흘려들을 수 없던 기사가 물었다.
“황녀님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죽음. 하지만 그 죽음은 무거워. 난 외로웠지.”
두서가 없는 이해하기 힘든 말.
흡사 정신이 나간 자 같았다.
“당신은 누구인가?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자신의 무력함에 떨면서 모두를 보냈어. 이제 나도 갈 차례.”
그 말과 함께 노파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기사가 소녀를 안았을 때 소녀는 잠들어 있었다.
기사들은 그 자리를 조사했다.
몇 개의 책을 발견했고 그것은 일기였다.
오래된 언어여서 해독하는 데 힘이 들었다.
자문을 구해 일기를 해독한 기사들은 근심과 걱정이 가득했다.
오래전 노파는 많은 자들의 희생으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노파는 그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과 단절하여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켰다.
기사들은 자신을 향해 웃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노파가 있던 자리에 5황녀가 앉아 있었다.
텅 빈 돌제단을 보며 5황녀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