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큿!”
저주의 반동은 컸다.
신의 힘을 쏟아붓자 저주의 힘이 반동으로 그를 삼킬 듯했다.
빠른 속도로 그의 모든 것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아찔함에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굽혔다.
“왕자님!”
알이 그의 어깨에 손을 대는 순간 그는 튕겨져 나갔다.
처음 신이 준 알약을 먹었을 때와 비슷한 경험.
그런 경험 덕분인지 태훈은 간신히 정신 줄을 붙잡을 수 있었다.
마치 불과 물처럼.
저주의 힘과 신의 힘은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것처럼 서로를 당겼다.
시간이 지날수록 식은땀이 났지만 점차 저주의 기세가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시대가 많이 지나서 그런가. 이 정도라면…….’
태훈은 다급히 알약을 하나 더 꺼내 물었다.
알약의 힘이 전신을 타고 흘러 루세프의 몸에 흘러들어 가는 순간 그의 몸이 거세게 떨렸다.
파짓- 파짓-
미세하지만 뭔가가 터지는 소리.
온몸에 있던 저주의 각인이 신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붕괴되는 소리였다.
핏-
마침내 마지막 각인이 부서지는 순간 태훈은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쉽게 쓰지 않는다고 했는데…….’
벌써 두 알이나 사용한 약.
하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루세프는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비늘은 다시 자라지 않았고 언뜻보면 그저 덩치 큰 평범한 남성이었다.
“잘된 겁니까?”
“일단은.”
알은 루세프를 흔들어 깨웠다.
하지만 루세프는 눈을 뜨지 않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뭔가 문제가 있었나?’
자신이 각인만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잘못 건드린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된 그는 붉은 마나를 이용해 그의 몸을 훑었다.
루세프의 몸은 건강하다 못해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몸 상태였다.
태훈은 다른 드래고니안을 불러 그를 보게 했다.
“깨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뭔가?”
“몸은 정상인데. 원인을 모르겠군요.”
“족장님이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죠.”
드래고니안 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태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태훈은 잠든 루세프를 놔두고 전체 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자리를 비워 미안했다는 말과 함께 전체 보고를 들었다.
“현재 적 전력 중 언데드들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혹 우회로를 찾은 것이 아닌가 하여 정찰대를 시켜 조사하고 있습니다.”
“적 언데드 병력은 다른 요새로 향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확인까지 했습니다.”
“그럼 큰일 아닙니까? 증원 병력을 더 파견해야…….”
“방어선이 물러나긴 했지만 돌파당한 것은 아닙니다. 증원 병력은 그쪽에서 알아서 처신하겠죠. 문제가 된다면 보고가 들어올 겁니다.”
대충 보고를 들은 태훈은 엘프를 불렀다.
“이쪽은 오는 길에 만난 엘프 측의 대리인이오. 조만간 엘프들도 이 전쟁에 합류할 예정입니다.”
“흠…….”
사람들은 탐탁지 않아 하는 표정이었다.
실제로 엘프들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자신들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전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위에서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것이 보이자 태훈이 말했다.
“이 전쟁은 인간만의 전쟁이 아닙니다. 중간계의 운명이 걸린 일. 종족을 가릴 처지가 아닙니다.”
한 귀족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엘프가 그냥 참전하는 것은 아닐텐고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
“엘프들의 자치령이오.”
“자치령?”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일부 귀족들은 말도 안 된다는 비웃음 섞인 실소를 터뜨렸다.
“하오나 총사령관. 그걸 총사령관 독단으로 결정하는 것은 월권 행위가 아닙니까? 연합군의 통제와 땅을 내어주는 것은 분명 다른 문제…….”
“내어줄 땅은 공국의 땅이니 그대들의 나라와는 별개의 문제요. 그리고 애초에 몇 왕국을 제외하곤 전부 이종족 노예는 금하고 있을터.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소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엘프들의 숫자가 얼마나 된다고 이 싸움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아직 비밀입니다.”
어디에서 무슨 소리가 새어나갈지 몰랐다.
그렇기에 땅굴은 당분간 비밀로 할 예정이었다.
“조만간 엘프들의 모든 권한을 가진 자가 찾아올 겁니다. 부하들에게 일러 엘프들을 목격하거든 적대시 하지 말라 전하시오.”
?
방으로 돌아오니 벌써 새벽이었다.
목욕을 하고 나온 태훈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납치당한 아내 생각에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5황녀의 각오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일반인이 감당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똑똑-
“접니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알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을 리가 있나.”
“상황이 어떤지 알려주십시오.”
태훈은 5황녀가 모든 걸 책임지고 레이첼을 수색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뮤즈를 두고 오시지 그러셨습니까.”
“그게…….”
신의 알약을 복용 후에 뮤즈는 응답이 없었다.
헤라와 홀든을 상대로 싸울 때도 뮤즈를 꺼내지 못한 것이 그 이유였다.
“대답이 없다니. 계약이 해제된 것은 아닐 텐데요.”
“모르겠어. 엘프들을 만났을 때 물의 지니를 불러서 물어봤는데 자기도 모르겠다는군. 정령계엔 없다고 했어.”
“정령이란 건 알다가도 모르겠군요.”
“뮤즈가 없는 건 뼈아픈 일이지. 루세프는?”
“신관 하나가 붙어서 상태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여전히 잠든 상태구요.”
“전투는 이기고 있는데 중요한 전력들이 하나씩 구멍이 생기는군.”
다시 한번 얼굴을 쓸어내린 태훈은 책상 위에 있던 종이를 알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뭔가요?”
“만일을 위해 써둔 거야.”
종이를 펼쳐 읽어 내리던 알의 표정이 굳어졌다.
“사령직에서 물러나실 생각인 겁니까?”
“그들이 왜 레이첼을 노렸겠어. 그 녀석들의 목표는 나야. 총사령관의 식솔을 잡아두는 이유가 있겠어?”
“연합군의 발을 묶겠다는 건가요? 하지만 그건 사령관을 교체하면 그만…….”
“사기의 문제지. 그리고 내가 교체된다고 했을 때 그 후임이 적의 끄나풀일 가능성이 있어.”
“그래서 후임자로 5황녀를 점찍어두신 겁니까?”
편지는 사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내용의 사직서였다.
동시에 후임으로는 5황녀를 선택하겠다는 소개장이 써 있었다.
“찬성하지 않을 자들도 제법 될 겁니다.”
“그녀라면 그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을 거야. 일단 시간이 급해.”
“시간이라면…….”
태훈은 땅굴 이야기를 알에게 알려주었다.
“적들이 레이첼을 불모로 협박하기 전에 땅굴을 통해 전쟁의 판세를 우리 쪽으로 끌고 와야 해. 물러나도 그다음에 물러나야겠지.”
“엘프들과의 약속을 지키려면 사령관직에 있는 것이 유리할 테니까요.”
“나를 따라온 엘프는?”
“방에서 쉬고 있습니다. 유리아가 경비를 맡고 있구요.”
“엘프 대표가 반격의 열쇠야. 어쩌면 적의 배후를 완전히 잡아챌 수도 있어.”
알이 나가고 난 뒤 태훈은 침대에 몸을 뉘였다.
잠이 오지 않는다 했지만 눈을 감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완전히 곯아떨어졌다.
* * *
“이걸 알려주면 강등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고민은 결정을 늦출 뿐이지. 눈뜨고 당하는 것보다는 알고 당하는 게 나아.”
“흠, 그정도 각오라면야.”
나이젤은 담뱃대에 불을 붙이며 깊게 빨아들였다.
“라그나로크의 목적은 차원의 중간계에서 저승으로 오는 문을 여는 게 목적이 아니야.”
“그러면?”
“가운데 문을 여는 것이지.”
가운데 문이라는 것은 천국으로 가는 문이었다.
“그게 가능해?”
“예전에 네가 지금 있는 차원에서 문을 열려고 했던 녀석의 이름은 마데우스라는 녀석이야. 뭐 하도 여러 인생을 살아서 그것 말고도 이름이 여럿 되겠지만.”
“마데우스…… 들어본 적이 없어.”
“당연하지. 그걸 아는 녀석은 극소수야. 지금 정보국장은 그것도 모를걸?”
“넌 그걸 아는 이유가 뭔데?”
“나야 그 당시에 마지막으로 라그나로크 사건을 조사했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조사를 중지하라고 하더군.”
“이유는?”
“몰라. 다짜고짜 1급신이 찾아오더니 손을 떼라고 하더군.”
이미르는 조금전 만나고 온 정보국장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다고 했었다.
“그렇다고 넌 조사를 그만뒀나?”
“내가 왜 좌천당했겠냐? 당연히 더 캐다가 이 꼬락서니가 된 거지.”
나이젤은 책상 위에 담배를 늘어놓았다.
담배는 총 11개.
신들 사이에서 11이라는 숫자는 익숙한 숫자였다.
“1급신들인가.”
“그렇지. 그런데 말이야 조사해 보니까…….”
나이젤은 담배 두 개피를 하나 더 책상 위에 올렸다.
“생전 처음 듣는 이름 두 개가 등장하더라고.”
“1급신이 13명?”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저승에서 1급신들을 마주할 기회는 없었다.
전원 천국의 문 안쪽에 존재했고 드나들 때도 하위 신들은 그들의 존재를 느끼기도 힘들었다.
이미르는 나중에 올린 담배 두 개피 중 하나를 집어 들며 말했다.
“이게 마데우스인가.”
“그렇다고 추정할 수 있지. 그럼 이 두 명은 왜 우리가 몰랐는가. 이게 궁금해서 조사를 했어. 그러니 창세기까지 올라가더라고.”
나이젤은 자신이 아는 것을 늘어놓았다.
일반 신들은 모르는 두 이름.
마데우스와 알포네.
그들은 창세기 때 창조된 13명의 신 중 일부였다.
그들은 창조주의 명령에 신이 사는 땅에서 나와 여러 차원들을 창조했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1급신에서 추방당했다고 한다.
“이유는?”
“그때 당시의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다만 큰 싸움이 일어난 뒤 추방당했다고 하더라고.”
“그럼 마데우스와 알포네라는 두 녀석이 그때의 앙갚음을 하려고 라그나로크를 일으키려는 건가? 천국으로 쳐들어가려고?”
“알포네는 아닐 거야. 지난번 라그나로크 때 잡혔어.”
“그게 정말이야?”
“정말이지. 내가 잡았는데.”
“지금 어딨어?”
“몰라.”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모른다는 말을 내뱉는 나이젤을 향해 이미르는 따귀를 날렸다.
짜악-
“아악! 이게 미쳤나. 왜 갑자기 손찌검이야!”
“네가 잡았다며! 그런 중죄인이 어딨는지 왜 몰라?”
“위에 놈들이 데려갔어. 어디로 데려가냐고 물어봤는데 알 거 없다고 하면서 무시했어.”
나이젤은 뺨을 어루만지면서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이미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자 나이젤은 단번에 침착하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흥분하지 말라고. 일단 나도 명색이 정보국장에 2급신인데 자존심이 상해서 알아봤지.”
“겉만 정보국장은 아니었군. 그래서?”
“못 알아냈어.”
휘익-
이미르가 다시 손을 쳐들자 나이젤은 방어 자세를 취하며 외쳤다.
“하지만 관련된 정보는 알아냈어! 그러니까 제발 손찌검 좀 그만해!”
“정보가 뭐야?”
“라그나로크 때 놓친 마데우스를 잡기 위해서 미끼로 쓴다고 하더군.”
“마데우스도 알포네가 잡힌 걸 알 텐데 뻔히 미끼에 낚이겠어?”
“둘 사이에 뭔가 있겠지. 1급신들이 그 정돈 알고 미끼로 쓰겠다고 데려간 거 아닐까?”
“그럼 지금 내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위에서 준비한 예정된 무대라는 거지.”
“…….”
이미르는 손톱을 깨물었다.
배알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명색이 차원을 관리하는 신을 무시하고 멋대로 일을 진행시키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런데 1급신이나 그 위의 존재가 어째서 라그나로크나 마데우스와 알포네의 행보를 몰랐을까?”
1급신은 전지전능했다.
그리고 그 위의 존재는 만물의 창조주.
그런 존재들이 추방당한 신의 위치나 행보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이미르의 질문에 나이젤은 담뱃불을 끄며 말했다.
“내가 아는 건 거기까지야. 그 뒤로 바로 여기로 좌천당했으니까.”
“그럼 한 가지 더. 내 차원에 있는 조력자 녀석은 놈들이 100억 포인트를 모으려고 사람들에게 강제로 계약을 맺게 한다고 하던데.”
“신기로 저승으로 가는 문을 열고 포인트로 천국의 문을 연다. 뭐 이런 스토리겠군.”
“신기는 조력자가 회수한 걸 내가 몇 개 갖고 있어. 그럼 녀석들은 라그나로크를 못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그건 지금 어딨는데?”
“정령왕들이 보관하고 있어.”
“놈들 입장에서 포인트는 2단계고 신기가 1단계야. 반드시 그걸 되찾으려고 할 거야.”
“머리가 복잡하군. 지상에선 라그나로크를 위해 마법진도 만들어졌다는데.”
“신기가 마법진을 작동시키는 열쇠야. 위에 놈들은 아마 그 타이밍에 놈을 잡을 생각인가 본데.”
“…….”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악당 잡는 일에 네 차원이 무대가 된 것뿐이니까. 괜히 나섰다가 나처럼 피 보지 말고 위에서 가만히 있으라니 가만히 있어. 그래야 나중에 변명이라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