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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퍽-

빛에 강타당한 데스나이트의 팔이 터져 나갔다.

루세프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데스나이트는 잘려 나간 팔을 쳐다보았다.

그러곤 복구되지 않는 자신의 팔을 기이하게 쳐다보았다.

루세프의 브레스로 녹아내린 부분은 이미 복구가 되어 있었지만 자신의 팔은 돌아오지 않았다.

“신성…….”

화악-

데스나이트의 말이 푸른빛의 파도에 삼켜져 버렸다.

빛이 사그라들자 바닥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반쪽밖에 남지 않은 데스나이트의 머리였다.

데스나이트는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다른 자의 기운을 느꼈다.

자신과 싸우던 드래고니안의 기운과는 전혀 다른 기운.

하지만 몸이 없고 한쪽만 남은 눈은 드래고니안을 향해 있었다.

이내 데스나이트의 시야에 한 사람의 발이 보였다.

눈을 굴려 얼굴을 보려 했지만 상대의 무릎까지만 보일 뿐이었다.

데스나이트는 멀어져 가는 의식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급격히 빠져나가는 힘에 입만 뻥긋거리다가 이내 초점이 사라졌다.

루세프는 산산이 부서져 흩날리는 데스나이트의 머리를 지켜보았다.

“괜찮나? 일어설 수 있겠어?”

“존엄을 건 결투에 끼어들다니.”

“존엄? 전장에서 그런 건 살아남은 자한테 알아서 딸려오는 거다.”

목소리의 주인은 태훈이었다.

성벽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그는 루세프가 위기에 몰리자 행동에 나섰다.

타 요새의 위기를 구하느라 힘을 소진했던 그는 약병에서 한 알을 꺼내 삼켰다.

그리곤 장거리에서 신력을 압축해 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그대로 오그리아의 진영까지 도달한 힘은 진형 일부를 붕괴시켰다.

그 힘에 놀란 오그리아 진영은 급히 전선을 뒤로 물렸다.

“일어서. 돌아간다.”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소.”

루세프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태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각성은 드래곤의 힘을 억지로 깨우는 것. 저주받은 피가 온몸을 잠식하면 돌이킬 수 없지.”

신에게 저주받아 봉인되었던 힘을 깨우는 것은 좋았으나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뜻이었다.

“어째서 그런 짓을.”

“그럴 수밖에 없던 상대였소. 하지만 이제 와선 허탈하군.”

자신이 고전했던 적을 일격에 증발시키자 허탈감이 몰려왔던 것이다.

태훈은 루세프의 몸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의 몸 안에서 일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기운이 격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이 준 알약을 삼켰을 때 느꼈던 힘과 동일했다.

루세프가 신의 저주라고 했던 힘은 신이 걸어놓은 일종의 락이었다.

그걸 억지로 열자 드래고니안의 피에 걸려 있던 그 락이 작동하며 그의 몸을 좀먹고 있던 것.

그는 그 힘을 그의 몸 안에서 한 곳에 모았다.

그러곤 그 힘을 다시 자신의 몸 안으로 빨아들였다.

태훈은 그 힘이 자신의 힘 안으로 빨려들어 올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힘은 빨려들어 오지 않고 루세프의 몸에 남아 있으려 했다.

‘흡수는 되지 않는 것인가. 이대로 두면 루세프의 몸이 버티질 못해.’

태훈은 그를 들쳐 업었다.

그러곤 그의 부하들과 함께 요새로 귀환했다.

방을 하나 비우게 한 그는 탁자 위에 루세프의 몸을 뉘였다.

그리고 부하 하나를 불러 물었다.

“신의 저주라는 게 정확히 뭐야?”

“선조 때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겁니다. 드래곤의 힘을 억지로 쓰려 하면 발동이 되어 육신이 붕괴합나다.”

“그건 보고 있으니 알아.”

루세프는 각성 후 온몸의 9할이 비늘에 덮여 있었다.

머리카락과 눈썹까지 비늘화되어 있던 것.

그런 비늘들이 부식되며 떨어지고 있었다.

“그 저주라는 건 어디에 걸려 있는 거지?”

“피에 있습니다.”

“피?”

태훈은 난처했다.

저주라는 건 각인이 존재했다.

흑마법에 기반한 것으로 저주에 걸린 대상에 새겨지며 대대로 세대를 이어간다는 내용을 책에서 보았다.

신이 흑마법을 쓴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그 정도 존재라면 계열을 가리지 않을 수 있었다.

문제는 지금들은 부하의 말이 맞다면 피에 각인이 새겨졌다는 뜻이었다.

혈액은 액체니 각인이 있을 리 만무했다.

‘설마 혈소판 정도의 작은 단위에 새겨진 건가?’

그렇다는 건 나노 단위나 가능할 법한 크기였다.

루세프의 손끝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내 부족을 잘……. 부탁합니다.”

“네 부족은 네가 돌봐라.”

태훈은 바로 루세프의 전신을 마나로 훑기 시작했다.

신의 힘이라면 자신도 느끼고 있었으니 그 원천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 원천이 저주를 발생시키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잠시 후 태훈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루세프의 몸 전체에서 신의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전신의 피에서 느껴져. 설마 혈액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성분에 각인이 새겨진 건가?’

그의 몸에서 이미 대부분의 비늘이 떨어졌다.

현대라면 기계를 이용해 기존의 피를 빼내고 수혈로 피를 바꾼다면 일말의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기계도 없고 수혈용으로 뽑아놓은 피도 없었다.

혈액형조차도 없는 곳이니 있다 해도 문제가 있었다.

‘저주의 각인을 부수는 방법은 그 각인을 해석해서 역술산하는 방식. 아니면 그 이상의 백마법을 통해 해제하는 방식이다.’

신이 내린 저주였다.

거기에 새대를 이어져 내려오는 방식의 저주라면 강력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지났어. 지금의 나라면…….’

태훈은 정신을 가다듬고 루세프의 심장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

***

?

또각 또각.

말끔한 정장 차림의 여성이 새하얀 복도를 걷고 있었다.

금발을 가진 여성은 저승으로 돌아온 신이었다.

새하얀 벽 앞에 다다른 그녀는 벽에 손을 대었다.

벽이 갈라지며 안쪽으로 열렸다.

그 안에는 새하얀 옷을 입은 자들이 소리 없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리셉션에 다다른 그녀를 향해 한 여자가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3급신 아미르. 관리자와의 만남을 청하고자 한다.”

“약속은 하셨습니까?”

“긴급을 요하는 일이다. 당장 뵈어야 한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여성은 잠시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관리자께서 보시겠답니다. 따라오시죠.”

여성은 아미르를 다른 곳에 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그 방에는 회색빛의 정장을 입은 백인 남성이 책상에 앉아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여성이 인사를 하고 나가자 이미르와 남성만이 방에 남았다.

“3급신 이미르입니다. 급히 보고를…….”

“쉿. 기다리게.”

남자는 이미르를 쳐다도 보지 않고 손을 들어 제지했다.

이미르를 입을 꾹 다물고 남자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의 가슴에는 2급신임을 알리는 문양이 박힌 배지가 달려 있었다.

잠시 뒤 서류를 정리한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인가? 약속도 없이.”

“제가 관리하고 있는 곳에서 ‘라그나로크’의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라그나로크라는 단어를 듣고도 남자의 안색은 바뀌지 않았다.

그저 그렇군이라는 뜻을 내포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응, 알고 있네.”

“뭐라고요?”

남자의 대답에 이미르는 놀랐다.

예전에 일어났던 대학살과 대혼란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알고 있으셨다니. 언제부터입니까?”

“자네가 오기 전에 상부에서 지침이 내려왔네. 1급신께서 직접 오셨지.”

“그럼 조치를 취해주십시오.”

“부끄러운 줄 알아!”

남자는 난데없이 화를 냈다.

깜짝 놀란 이미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차원의 관리자라는 존재가 그것 하나 처리를 못 하나?”

“그 부분은 죄송합니다. 하지만 처리하기 전에 보고가 우선이라 생각되어…….”

“보고는 무슨. 위에서 그 정도 파악을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나?”

이미르는 고개를 숙였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제가 돌아가서 조치를…….”

“아니, 그럴 필요 없네.”

이미르는 어이가 없다는 식의 표정을 지었다.

“네?”

“그냥 두라고.”

“그게 무슨……. 라그나로크를 보고만 있으라는 겁니까?”

“위에서 다 생각이 있다는군. 그보다 자네는 중대한 혐의가 있어.”

“혐의?”

“자네, 신의 힘을 자네 세상의 인간에게 주었다며?”

‘벌써 그것까지 아는 건가.’ 이미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승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찾아왔던 것인데 이미 상황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곧 진즉부터 보고 있었다는 뜻이 되었다.

“경솔했구만.”

“저 나름대로의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하지만 규율을 어겼지.”

이미르는 침을 삼켰다.

그녀가 취한 행동은 규율상 중대한 위반 행위였다.

“하지만 뭐 나쁘지 않은 조치였다. 이번엔 눈감아주지.”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위에서는 다 생각이 있다고 하시더군. 일단 그냥 지켜만 보게.”

“그냥 방치하란 말씀이십니까? 그러다 라그나로크가 터지기라도 한다면…….”

“그건 위에서 알아서 한다니까 신경 쓰지 마.”

“……알겠습니다.”

한 급수 차이라지만 상관이 하는 말은 절대적이었다.

그것도 두 등급 위에서 내려온 지침이라니 자신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볼일 없으면 나가봐. 난 바쁘다고.”

“실례했습니다.”

이미르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방을 나왔다.

자신이 왔던 길을 되짚어 나오던 그녀는 화를 이기지 못했는지 벽에 주먹을 내질렀다.

쾅-

“젠장.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정작 차원의 관리자인 자신도 모르는 일을 상부에서 알고 있었다.

거기다 참극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을 방치하라는 것은 짜증이 치미는 일이었다.

그녀는 발길을 돌렸다.

그녀가 향한 곳은 검은 옷의 사내들이 북적북적한 곳이었다.

저승사자들이 그녀를 보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미르는 그들 사이를 지나쳐 건물의 꼭대기로 향했다.

쾅-

꼭대기 층의 문을 발로 차 열자 안에 있던 검은 옷의 사내가 깜짝 놀라했다.

“아이 씨, 깜짝이야.”

“오랜만이다. 나이젤. 반갑군.”

“반갑다는 자식이 얼굴상이 그게 뭐야? 누가 보면 죽이러 온 줄 알겠어.”

남자는 나이가 지긋해 보였다.

덥수룩한 붉은 수염이 그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었다.

“정보가 필요하다.”

“정보가 필요하면 정보국으로 가.”

“방금 거기서 온 길이야.”

“얼굴상을 보니 죽 쑨 모양이구만?”

남자는 의자에 기대 허리를 눕혀 이미를 향해 히죽였다.

그러곤 방에 있는 소파에 앉으라는 듯 턱을 내밀었다.

이미르가 소파에 앉자 남자가 물었다.

“정보국에서도 못 얻은 정보를 왜 나한테 와서 찾아?”

“넌 거기 있었잖아. 아직 손길이 닿겠지.”

“2급에서 4급을 좌천된 놈이라고 놀릴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라그나로크에 대해서 뭘 알지?”

라그나로크라는 말에 붉은 수염은 잠시 멈칫거렸다.

“오랜만에 듣는군. 마지막으로 들은 지가 꽤 된 것 같은데.”

“네가 정보국에 있던 시절이었으니 모른다는 말은 집어치워.”

“갑자기 그건 왜 물어?”

“내가 있는 곳에서 라그나로크가 벌어지려 한다.”

붉은 수염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 고개를 숙였다.

이내 머리를 든 남자가 말했다.

“그렇지. 너 그 사건 이후로 거기 배치됐지?”

“지금 그 일이 다시 일어나려 해.”

“그거 확실해?”

“내가 직접 확인했고 정보국에 들렸어. 그런데 위에서는 이미 알고 있다면서 가만히 있으라는군.”

“누가 그래?”

“거기 국장이. 1급신이 직접 왔다 갔다던데.”

“흠……. 그래서?”

“라그나로크에 대해 아는 정보들 있지? 전부 불어.”

“야, 너랑 내가 아무리 교육동기생이지만 그건 너무 일방적…….”

“그때처럼 죽도록 맞아볼래?”

“……너 이거 손대면 강등으로 안 끝날걸?”

“상관없어. 날 제쳐두고 일이 진행되는 게 맘에 안 들 뿐이야.”

“성깔머리하곤. 그러다 제 명에 못 살지.”

남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이미르가 발로 차고 들어온 문으로 다가갔다.

밖의 동정을 살핀 그는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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