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휘청-
기수의 몸이 뒤쪽으로 반쯤 꺾였다.
다시 상체를 일으키자 금이 간 면갑이 눈에 들어왔다.
후두둑-
면갑이 부서지면서 땅으로 흘러내렸다.
부서진 면갑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한눈에 봐도 송장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부서진 틈 사이로 데스나이트의 서슬 퍼런 눈빛이 보였다.
“표정 펴라. 겨우 한 방 먹은 걸로 그런 표정을 지으면 쓰나.”
루세프가 다시 한번 쇄도해 들어가자 적도 돌진해 왔다.
허공에서 금속끼리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형세는 루세프가 완전히 압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텅-
망치가 데스나이트의 왼쪽 측면에 장렬하자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흐아압!”
마치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듯 루세프가 힘을 주자 데스나이트의 몸이 총알처럼 튕겨져나갔다.
쾅-
벽과 부딪히며 먼지가 일었다.
동시에 먼지 구름을 뚫고 적 기사가 나타났다.
힘껏 휘두른 뒤라 루세프는 망치를 손에서 놓고 몸을 피했다.
‘이놈은 데미지라는 게 없는 건가.’
무기를 손에서 놓자 데스나이트의 파상공세가 시작되었다.
핏-핏-
그의 몸에 군데군데 선혈이 그어졌다.
상처 부위는 까맣게 변하며 그의 말초신경을 압박했다.
캉-
루세프가 팔뚝으로 내려치는 검을 막자 금속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기이하다는 듯 데스나이트의 고개가 반쯤 꺾였다.
검은 팔뚝의 금속 부분에 닿아 있었다.
‘비늘로 막아도 저릿저릿하군.’
퍽-
발로 가슴을 차며 거리를 벌린 루세프.
그 순간 다른 두 드래고니안들이 뒤에서 나타났다.
촤르륵!
쇠사슬이 데스나이트의 몸을 휘감았다.
다른 드래고니안의 검이 적의 목으로 향해 날아들었다.
“잡았…….”
슈아악!
몇 개의 푸른 빛줄기가 날아들자 공중에 있던 두 드래고니안이 무기를 거두며 몸을 피했다.
빛이 날아온 쪽을 보니 데스나이트 중 하나가 자신들 쪽을 향해 손바닥을 펴고 있었다.
“마법사인가.”
루세프는 재빨리 망치를 회수하며 거리를 두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2인 1조로 한 명의 적을 상대하고 있었다.
루세프는 압도적인 힘을 내세우며 쉴 새 없이 상대를 몰아붙였다.
몇 번이나 망치가 적을 날려 버렸지만 상대는 타격이 없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역시 언데드는 신력이나 미스릴이 아니면 안 되는 건가.’
유감스럽게도 드래고니안들의 무기는 평범한 강철이었다.
그러나 성기사들은 전의 전투로 많이들 지치거나 부상을 입고 치료 중이었다.
거기에 언제 언데드의 대군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 언데드 전용 전력을 소모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퉁퉁퉁-
뒤쪽에서 소리가 들리자 루세프가 뒤를 돌아보았다.
하늘에 나무통이 보였다.
“이 자식들. 우리는 신경 쓰지 않는 건가.”
드래고니안 하나가 입술을 깨물며 험한 말을 내뱉었다.
펑- 펑-
나무통이 폭발하며 검은 물체들이 쏟아지자 드래고니안들은 자신도 모르게 팔을 들어 급소를 막았다.
하지만 쏟아져 나온 것들은 쇳조각들이 아니었다.
푹- 푹-
땡그랑-
땅에 박히거나 나뒹구는 것들은 무기였다.
한눈에 봐도 일반 검과는 다른 것들.
전부 성기사들이 갖고 있던 무기였다.
루세프가 유리한 듯했지만 이렇다 할 타격을 주지 못하는 것 같자 성기사 단장이 고안해 낸 방법이었다.
루세프는 요새 쪽을 향해 주먹을 높게 들어 보이고는 땅에 꽂혀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미스릴로 만들어진 검신에서 푸른빛이 아른거렸다.
그것을 허리춤에 찔러 넣은 뒤 말했다.
“이제 제대로 싸워보자고.”
루세프는 망치를 포기하지 않았다.
망치를 휘두르다가 적이 주춤거리면 무기를 바꿔 몰아쳤다.
다른 드래고니안들도 자신의 무기와 함께 성기사들의 무기를 함께 사용했다.
손에 익은 무기로 적을 몰아세우고 유효타를 줄 기회엔 검을 이용했다.
적들의 몸에 검이 닿을 때마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불에 데인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럼에도 데스나이트들은 두려움을 모르는 언데드답게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시작된 싸움이 어느덧 저녁 무렵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데스나이트들은 많은 상처로 인해 힘이 약해졌고 드래고니안들의 체력 또한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오그리아의 본영에서 북소리가 들렸다.
철수 신호였다.
“보내주지 않는다.”
적의 막강한 전력을 궁지로 몰아넣은 기회를 놓치기 싫은 루세프는 데스나이트들을 둘러싸는 진형을 택했다.
퇴로가 막힌 데스나이트들은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루세프와 격전을 벌이던 우두머리는 칼을 내리더니 이내 소름끼치는 짓을 벌이기 시작했다.
퍼석- 퍼석-
아군의 가슴팍에 손을 집어넣더니 시커먼 덩어리를 끄집어내었다.
그러곤 그것을 입안에 넣기 시작했다.
심장이 뚫린 데스나이트들의 몸은 무너져 내렸다.
검은 덩어리를 삼키기 시작한 데스나이트의 몸집이 커지기 시작했다.
투캉- 투캉-
견디지 못한 금속 갑옷이 터져 나가며 바닥에 떨어졌다.
드래고니안들은 걱정스러운 말투였다.
“이건 좀 곤란한 거 아닌가?”
“뭘 걱정해. 그냥 덩치 큰 사냥감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산에 검을 휘두르는 사냥감은 없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대장을 바라보았다.
루세프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거기다 오늘은 초승달이 뜨는 날이라 언데드에게 있어서 좋은 무대였다.
동료를 흡수한 데스나이트의 크기는 3미터가 넘었다.
거구를 가진 드래고니안들이 꼬마로 보일 정도.
둥둥둥-
그러자 이번에는 연합 진영에서 퇴각의 북이 울리기 시작했다.
루세프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적이 자신들을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되레 요새까지 쫓아와 성벽이나 성문을 부숴 버린다면 엄청난 골치였다.
좋든 싫든 이 자리에서 끝을 봐야만 했다.
드래고니안들은 원을 그리며 상대를 포위한 뒤 갈고리와 쇠사슬을 던져 몸에 걸었다.
그리고 한쪽 방향으로 돌며 움직임을 막으려 했지만 한번 몸을 뒤흔들자 나가떨어졌다.
쿵쿵쿵-
그러곤 빠른 속도로 달려와 루세프의 상체만 한 주먹을 휘둘렀다.
떠엉-
수 톤의 화물차가 달려와 부딪히는 듯한 충격이 루세프의 몸을 강타했다.
그의 몸은 방망이에 맞은 야구공처럼 휘어졌다.
콰앙-
그대로 날아가 벽에 부딪힌 루세프는 한 움큼 피를 뿜었다.
다른 드래고니안들도 차례대로 격파당하기 시작했다.
“크윽…… 갈비뼈가 나간 건가.”
늑골이 욱신거렸다.
루세프는 입가의 피를 닦으며 일어선 뒤 부하들을 쫓아다니는 데스나이트를 바라보았다.
그가 뭔가 결심한 듯한 표정이 보였다.
“드래곤 블러드.”
그의 혈관 속에서 흐르던 피가 일순간 멈추었다.
그러곤 빠르게 역류하기 시작했다.
루세프의 몸에서 김이 나기 시작하고 그의 눈썹과 머리카락이 빠르게 굳어져 갔다.
뒤쪽에서 느껴지는 급격한 마나의 파동에 데스나이트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데스나이트의 시선이 닿은 곳에 루세프는 없었다.
쎄엑-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데스나이트의 오른쪽 쇄골에 발꿈치가 닿았다.
빠각-
뼈가 부러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데스나이트의 한쪽 무릎이 땅에 닿았다.
그러곤 데스나이트의 목으로 날카로운 것이 날아들었다.
루세프의 손등에 있던 비늘이 길게 자라나 흡사 검처럼 변해 있었다.
데스나이트는 그것을 입에 물고는 고개를 흔들어 루세프를 던져 버렸다.
휘릭-
공중에서 제비를 돈 루세프는 땅에 착지하였다.
루세프의 눈은 금안으로 바뀌어져 있었는데 흡사 파충류의 눈같았다.
온몸의 비늘이 자라나 있어 비늘이 대부분의 몸을 뒤덮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부하들은 나지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루세프 족장…….”
“브레디. 뒤를 맡기마.”
루세프의 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밟은 곳은 움푹 파이며 김이 피어올랐다.
루세프의 몸은 하얀 김이 피어오를 정도로 뜨거워져 있었다.
두 덩치의 난타전이 시작되었다.
루세프의 주먹과 발길질이 작렬할 때마다 데스나이트의 몸에서 뼈와 살덩이가 터져 나갔지만 이내 다시 흡수되었다.
데스나이트의 주먹질에 맞을 때마다 루세프의 몸이 휘청였지만 데미지는 없어 보였다.
두 괴물의 싸움을 보던 양촉 진영에서는 난감해했다.
병력을 투입하자니 상대도 병력을 내보내 전면전을 벌이게 될 것 같았다.
지금 같이 어두운 상황에 야간 전투는 아군이 아군을 공격할 가능성이 높았다.
거기다 두 괴물 사이에서 나오는 아군의 부수적인 피해도 무시할 수 없었다.
퍼억-
적의 품으로 파고든 루세프의 주먹이 데스나이트의 복부를 강타했다.
그의 덩치보다도 큰 데스나이트의 덩치가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든 그의 입에 눈으로 보일 정도의 마나 입자가 모여들었다.
“브레스.”
순간 주위의 소리가 모두 삼켜지는 듯했고 이내 거대한 빛줄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키에에에엑-
기괴한 비명 소리가 빛에 삼켜졌다.
철퍽-
땅에 떨어진 데스나이트의 몸은 대부분이 녹아내려 있었다.
“허억, 허억…….”
가쁜 숨을 몰아쉬는 루세프의 등이 들썩거렸다.
데스나이트가 움찔거리며 쉽사리 일어나지 못하자 루세프는 근처에 있던 망치를 집어 들었다.
쾅쾅쾅-
수차례의 망치질.
못질을 하듯 데스나이트의 몸이 땅속을 파고들었다.
이내 망치를 집어 던진 루세프는 땅에 떨어진 성기사의 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치이이익-
성기사의 검이 닿자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리며 살이 타는 냄새가 났다.
각성한 드래곤의 피가 성기사의 검에 반응했다.
1미터쯤 파고들어 간 데스나이트를 내려다보던 루세프는 검을 치켜들었다.
“죽어라.”
루세프의 검이 꽂혔다.
하지만 꽂힌 것은 데스나이트의 몸이 아니라 땅이었다.
순식간에 검은 연기로 변한 데스나이트는 루세프의 뒤에 서 있었다.
푸욱-
데스나이트의 손이 비늘이 덮이지 않은 부분을 관통하며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이 자식이…….”
콰앙-
이를 악물고 몸을 돌리려던 그의 몸이 날아 벽에 부딪혔다.
벽에 부딪히고 땅으로 떨어진 루세프를 보며 데스나이트의 하관이 열렸다.
“크크크크……. 기억났다.”
“기억?”
“내가 이 모습이 된 이유.”
“……그런가? 넌 나의 선조에 의해 죽은 녀석이군.”
“지금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어째서 드래곤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건가.”
데스나이트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루세프가 몰아붙였던 충격이 데스나이트의 기억을 깨운 듯했다.
“저주받기 전의 시간을 묻는다면 벌써 수천 년이 흘렀다.”
“저주? 드래곤이 저주를 받았는가? 누구에게?”
“신이지.”
“신? 푸하하하하. 그 기고만장하던 녀석들이 나와 같이 저주받은 몸이 된 건가.”
데스나이트는 단편적인 자신의 기억을 떠올렸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칭호를 얻기 위해 도전했던 자신의 모습.
그러나 드래곤에게 패해 저주받은 몸이 되어버린 기억.
데스나이트는 쓰러져 있는 루세프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루세프의 머리를 잡아 들어 올렸다.
그의 발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제야 내 숙원을 이루는군. 난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는 것이다.”
“큭…….”
턱-
루세프는 자신의 머리를 쥔 데스나이트의 손을 잡았다.
힘을 주어 부러뜨리려 했지만 관통당한 탓에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피이잉-
그 순간 가느다란 빛이 데스나이트의 팔을 관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