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거래라는 게 뭐야. 뭘 원하는 거지?”
“우리를 네 상관에게 데려다 다오. 거기서 거래 조건을 말하겠다.”
“너희가 거래 조건을 운운할 처지인가? 그냥 팔아버릴 수도 있어.”
“저 녀석들이 거래 운운할 때 너는 관심이 없었어. 고지식한 인간이지만 넌 정직한 인간이다.”
“고맙군. 일단 거래 내용을 들어보지.”
“결정 권한이 있는 자에게 데려다 줘. 그 사람에게만 말…….”
“나는 이번 연합군의 사령직을 맡은 자다. 할 말이 있다면 나에게 해.”
엘프들이 태훈의 정체를 이해하는 데에는 꽤나 오래 걸렸다.
볼품없이 혼자서 국경 지역을 돌아다니는 정신 나간 사령관은 없기 때문.
물의 지니를 불러 사실 확인을 시켜주자 엘프들의 태도가 바뀌었다.
기본적으로 엘프는 정령과는 친숙했고 물의 지니가 되는 존재를 마주할 수 있는 것은 하이엘프 정도는 되어야 가능했다.
거기에 그들도 신탁의 내용은 알고 있었기에 공손해진 것이다.
“실례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그래서, 거래라는 게 뭐야?”
“엘프들만의 땅이 필요합니다.”
이종족은 나라나 국가가 없었다.
특정 지역에 부족 단위로 존재했다.
그래도 종족들 사이에서 나른 지도자는 존재했다.
“너는 엘프의 지도자인가?”
“지도자는 아닙니다. 하이엘프도 아니죠.”
“그런데 무슨 자격으로 그런 거래를 제안하는 거지?”
“엘프의 왕이신 도르미안 님과 안면이 있습니다. 연락도 가능하고 무엇보다 왕이 아니더라도 모든 엘프들의 숙원입니다.”
“숙원?”
“인간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안전한 안식의 땅이요.”
“이 신탁은 비단 인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야. 드워프나 수인, 엘프들에게도 적용되는 신탁이다.”
“솔직히 저희에게 신탁은 반반입니다.”
엘프들은 이번 전쟁으로 인간이 쇠퇴하면 이종족에게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물론 신탁에서 말하는 적들이 승리하게 되면 미래는 없다.
하지만 2제국과 5왕국이 연합했다는 것을 알고는 승패는 연합군이 가져가게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고 했다.
다만 전쟁으로 인해 인간들의 힘이 약해지면 자신들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했다는 것.
“무르군. 이 전쟁은 숫자로 해결될 전쟁이 아니야.”
“어차피 지금의 세상은 이종족에게 죽지 못해 사는 세상입니다.”
“내 부하들 중에는 드워프도 있고 드래고니안도 있다. 자신들만의 이득을 위해 움직이는 종족도 있지.”
“그래서 제안하는 겁니다. 적의 후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드릴 테니 엘프들에게 자유를 약속해 주십시오.”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세레니스처럼 몇몇 국가는 이종족의 불법 노예거래를 금지하는 곳도 있었지만 합법으로 삼는 국가도 있었다.
연합군 사령관은 임시직.
전쟁이 끝나면 사라지는 직책이니 혼자서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나 혼자서 정할 문제가 아니야.”
“그렇다면 누굴 만나야 합니까? 자리를 알선해 주십시오.”
“그 누구도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
그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묘수가 떠올랐다.
태훈은 엘프들의 숫자를 물었다.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그는 30만이라는 숫자를 말했다.
‘30만. 제국 수도 인구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땅이 크지 않을 수 있다.”
“상관없습니다. 우리들은 나무 위에서도 잘 수 있고 흙바닥 위에서도 잘 수 있습니다.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땅이 필요할 뿐.”
“좋다. 크로이츠의 이름으로 약속하지. 전쟁에서 이긴다면 엘프들에게 정착할 수 있는 땅을 주겠다.”
“그게 정말입니까?”
엘프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는 권한이 없다고…….”
“나는 연합군 사령관이지만 공국을 가진 공왕이다. 내 땅을 주지.”
태훈은 공국의 땅을 내어줄 요량이었다.
지금 공국의 땅은 국가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오그리아 땅 일부를 얻어낼 수 있었다.
거기에 공국 땅까지 합한다면 30만 인구쯤은 품에 안을 수 있었다.
“하지만 너는 권한이 없다. 권한을 가진 자를 데려와라.”
“권한을 가진 자라면…… ”
“엘프왕 도르미안을 내 앞으로 데려와라. 엘프의 왕이라면 거래할 자격이 있지.”
“잠시만…….”
엘프들은 자기들끼리 뒤로 물러갔다.
거리를 적당히 두자 심각하게 의논하기 시작했다.
“도르미안 님을 불러들이려는 수작 아닌가? 도르미안 님이 붙잡히면…….”
“물의 지니가 인증한 자다. 믿을 만하지 않는가? 거기다 신탁을 이끄는 자야.”
엘프들은 자기들끼리 한참을 이야기하더니 의견을 정리한 듯 다가왔다.
“3일 안으로 결정 권한을 가진 자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
“난 지금 당장 전선으로 가야 해. 기다릴 시간이 없어.”
그렇다고 알아서 돌아오길 바라며 놓아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땅굴은 아군에게 분명 기회였지만 그건 적에게도 마찬가지.
동일한 계약 조건을 가지고 오그리아로 넘어갈 일이 없다고 할 수 없었다.
“제가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 엘프가 연합군에 참여한다면 땅을 가질 수 있는 명분도 생기겠죠.”
숫자가 얼마나 되었든 엘프가 연합에 기여를 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도 유리한 점이었다.
“좋다. 따라와.”
먼저 제안을 했던 엘프가 남고 나머지 둘은 요새로 권한을 가진 자를 데리고 오기로 했다.
“괜찮겠어?”
“혹여 내가 죽으면 엘프들의 발언에 더 힘이 실려.”
“그런 생각하지 말고 잘 있어. 금방 돌아오마.”
“헛되게 죽을 생각은 없으니 걱정 마.”
태훈은 짐마차를 바라보았다.
마차와 용병들을 끌고 가면 시간이 걸렸다.
그는 마차로 데려가 용병들을 묶은 줄을 풀어주며 그들의 용병 수첩을 자신이 챙겼다.
“너희가 누군지는 이미 다 알아. 앞으로 계속 용병 일을 하고 싶으면 생각 잘해야 할 거야.”
태훈은 짐마차에 실려 있던 짐을 그대로 둘 것과 오그리아 쪽으로 넘어갈 것을 금했다.
“걱정 마십시오. 안내자가 없으면 굴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국경을 통해 넘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그들은 행여 태훈이 마음이라도 바꿀까 왔던 길로 후다닥 사라졌다.
엘프와 둘만 남은 태훈은 말에 올랐다.
“타라. 걸어갈 시간 없어.”
엘프를 말에 태운 그는 다시 요새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공국령의 요새에서 드래고니안과 데스나이트들이 일전을 벌이는 사이 다른 요새에서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오그리아군은 첫 전투에서 적의 힘을 가늠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단, 가장 최악의 결전지로 지목된 크로이츠 공국으로는 정예 병력을 보냈었다.
최정예들도 뚫지 못했다는 사실에 전략을 바꾸었다.
크로이츠 공국을 제외한 다른 지역을 우선적으로 뚫겠다는 목표로 바꾼 것.
오그리아의 수뇌부는 상당한 숫자의 언데드를 다른 지역으로 보냈다.
그 결과 크로이츠 공국과 가장 가까운 지역의 요새에 언데드가 충원되었다.
첫 전투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요새가 함락 직전에 놓였다.
“증원군! 증원군은 아직인가?”
“증원군도 적과 교전 중입니다.”
요새 사령관 윌러스는 어금니가 부서질 정도로 이를 물었다.
첫 전투로도 많은 피해를 입은 상태에서 배가 넘는 언데드가 나타난 것이 원인이었다.
그렇다고 윌러스의 병사들이 허접했던 것은 아니었다.
사방이 탁 트인 초원 때문에 길게 늘어선 형태의 요새 때문이었다.
사실상 요새라기보단 장벽에 가까웠기에 병력이 얇게 퍼져 있던 것이 큰 요인이었다.
“윌러스 후작, 이곳은 틀렸소. 서둘러 퇴각해야 합니다.”
“으으음. 그럴 수는 없소.”
윌러스 후작은 아무드의 귀족이었다.
초원인 만큼 아무드의 자랑거리인 기병을 대거 이끌고 이곳으로 부임했다.
그는 남부 연합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직후 힘이 약해진 귀족 중 하나.
그는 이번 전쟁에 모든 것을 걸고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
윌러스는 병사들에게 반원형 진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등을 내어주지 않으면서 멀지 않은 곳까지 와 있는 증원군 쪽으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적군의 포위도 만만치 않았다.
아군과 증원군 사이에 강한 저지선이 생기며 많은 희생자가 속출하자 금세 진형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후작, 진형이 무너집니다.”
“크윽…….”
윌러스는 검을 고쳐 쥐었다.
최후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죽어서도 연합군의 첫 패배라는 타이틀을 짊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팠다.
번쩍-
그 순간 멀리 있는 산등성이에서 빛이 번쩍였다.
콰과과과가-
빛은 오그리아군의 강력한 저지선이 있는 곳을 긁었고 폭염과 흙먼지가 치솟았다.
압도적인 화력에 전장은 일순간 충격에 휩싸여 멈추었다.
“뭐, 뭐야, 적의 공성병기인가?”
“후작, 저지선이 무너졌소!”
훤히 뚫려 있는 퇴로를 보며 후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이다! 증원군과 합류한다!”
후작은 실소를 지었다.
적의 마법사가 실수한 것이라 생각했다.
한편 산등성이에 있던 태훈은 검을 집어넣었다.
‘확실히 약의 힘이 없어도 실력이 좀 늘은 것 같은데.’
자신의 손을 쥐었다 폈다 하던 태훈은 몸을 돌렸다.
거기엔 얼어붙은 엘프가 서 있었다.
이종족들은 정보망을 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땅굴을 판 이유는 불법 노예로 끌려갈 운명이었던 이종족들을 몰래 이동시키기 위한 통로였다.
그러던 그들에게도 돈이란 것이 필요했고 간혹 대금을 받고 땅굴을 이용하게 해주던 것.
그러다 보니 땅굴을 이용하는 이용객들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섣불리 아무나 손님으로 받을 수가 없던 것.
어느 정도 정보망을 구축해 있던 그들에게 크로이츠는 낯선 이름이 아니었다.
‘크로이츠라는 자는 상단을 이끌던 귀족이 아니었나?’
물의 지니와 서슴없이 대화하고 최소 7클래스는 될 법한 대규모 마법을 쓰는 모습은 자신들의 정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상대의 정체가 상상 이상의 존재라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만큼 그의 발언이 자신들을 위해 좋게 작용할 수도 있었다.
반면 이 정도의 존재가 상대하고 있는 자들의 정체 또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요새에는 저녁 무렵 도착할 수 있었다.
“돌아오셨군요.”
“말도 없이 자리를 비워서 미안합니다.”
“수도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태훈은 있는 그대로 말해주었다.
적이 숨어들어 수도에 큰 사건이 발생했으나 금방 수습이 되었다고 말해주었다.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후방에 있는 안전한 곳.
그것도 제국 수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수도는 5황녀의 지휘 아래 안정을 되찾고 있으니 걱정들 하지 마시오.”
“그건 다행입니다만…….”
세레니스의 귀족들은 불안한 표정을 애써 숨겼다.
걱정이 없으니 돌아온 것이 생각하며 위안을 삼는 듯했다.
그때 알이 조용히 다가오며 물었다.
“어떻게 되셨습니까?”
“레이첼이 납치되었어.”
“음……. 인질로 잡을 생각인가 보군요.”
알은 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생각이라면 조만간 접촉을 해오겠지. 5황녀가 모든 걸 걸고 레이첼을 찾아내겠다고 했으니 그걸 믿고 돌아왔다.”
“상대는 누구였습니까?”
태훈의 옷이 헤져 있는 것을 본 알이 물었다.
소란의 당사자와 싸운 듯한 행색이었기 때문이었다.
“홀든과 헤라.”
“그분은 왜 이렇게까지 나오는 겁니까?”
태훈이 홀든을 존경해 마지않았다는 것을 아는 알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는 그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자신도 몰랐기 때문.
하지만 그 정도의 심성을 가진 인물을 변절하게 만들 정도라면 가벼운 일은 아닌 거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그런데 저 엘프는 누굽니까?”
“아, 그것 때문에 할 말이 있으니 전체 회의를 소집해 줘.”
“지금 말입니까?”
“응, 지금 바로.”
“그게 좀…… ”
알이 뜸을 들이자 그는 이유를 물었다.
알은 요새 밖을 가리키며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고 했다.
“야간전투?”
“전투까지는 아니지만……. 루세프가 싸우고 있습니다.”
“무슨 소리야? 그 녀석 혼자?
“드래고니안 일부가 싸우고 있습니다. 적도 일부고 어느 한쪽이 대규모로 움직이면 맞대응 할 것 같아 일단 지켜보고 있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이 모르는 태훈은 급히 협곡이 보이는 성벽으로 걸어갔다.
협곡 주위에는 불화살로 쏘아 날린 기름 묻은 솜뭉치가 불타며 조명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조명 한가운데에는 루셰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