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태훈은 요새로 향하는 길에 한 무리를 발견했다.
다섯 명이 저마다 간단한 병장기를 휴대하고 있었다.
‘용병인가?’
갈 길이 급한 태훈은 그들을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용병들이 길이 없는 숲으로 향하자 자기도 모르게 고삐를 잡았다.
‘설마 오그리아의 첩자?’
용병의 특성상 국경 출입이 자유로웠다.
다만 국가 간의 전쟁 중일 때는 검문 과정이 까다로웠다.
태훈은 말을 돌려 그들에게 다가가 숲으로 들어가기 전에 멈추어 세웠다.
“기다려. 너희들은 용병인가?”
멈추어 선 자들은 태훈을 살폈다.
군마로 보이는 말을 타고 있었고 행색은 꼬질꼬질했지만 귀족처럼 보였다.
“그렇습니다.”
“용병이라면 여기서 반나절 거리에 전쟁 중이라는 걸 모르진 않을 텐데. 어디로 가는 건가.”
“…….”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처다볼 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태훈은 적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들을 세밀히 살펴보았다.
두 명은 판금 갑옷으로 완전 무장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 세 명은 가죽 튜닉과 단검을 가지고 있었다.
“말해라. 어디로 가는 거지? 이곳은 군사 작전 지역임을 모르진 않을 텐데.”
“저희는 몬스터 토벌을 하러 가는 길입니다.”
전쟁 발발 구역에서 몬스터 토벌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자칫 적군에 동조한 용병들로 오해를 받을 수 있었고 적군이라는 가정하에 경고 없이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의뢰서는 가지고 있겠지? 보여봐라.”
그 순간 태훈은 그들이 눈빛을 주고받는 것을 보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한 녀석이 품에 손을 집어넣는 척 그의 시선을 끌었다.
슉-
가벼운 차림을 한 녀석이 슬쩍 움직이며 단검을 날렸다.
태훈은 가볍게 몸을 틀어 단검을 피하고 말에서 뛰어내리며 그대로 단검을 던진 녀석의 어깨를 무릎으로 찍었다.
우드득-
“커허억!”
어깨뼈와 쇄골이 같이 부러지며 남자의 눈이 뒤집혔다.
태훈이 땅에 내려왔을 땐 이미 다른 네 명이 무기를 꺼낸 뒤였다.
‘오그리아 쪽 녀석들인가. 잘도 그쪽에 붙는 녀석들이 있군.’
이번 전쟁에 많은 용병들은 연합군 쪽에 붙었다.
연합군의 전력이 유리하니 당연시하기도 했지만 신탁의 내용 때문이었다.
오그리아 쪽으로 붙는다면 멸망을 바라는 쓰레기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런 반면 오그리아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두 제국의 침탈로 맞서고 있어 명분에서도 약했다.
태훈은 검을 꺼내지 않았다.
사로잡아 정보를 캐낼 생각이었다.
투캉-
퍽-
오리진이 실린 주먹과 발차기에 용병들은 한 대씩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투 불능이 되었다.
판금 갑옷을 입은 녀석만이 남았다.
“하아, 계속할 테냐?”
“이야압!”
남자는 그렇다는 입장을 보이며 검을 내려쳤다.
태훈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갑옷의 목 부분을 잡고는 그대로 던져 버렸다.
쾅-
엄청난 소리를 내며 등부터 떨어진 남자는 굼벵이처럼 꿈틀대며 신음을 흘렸다.
“끄으으으.”
신음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남자를 두고 태훈은 다른 기절한 자들의 품을 뒤졌다.
용병들에게는 수첩이 있다.
용병의 등급, 최초 등록을 한 장소 등 몇 가지 정보가 기입되는 신분증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여권의 스탬프처럼 마지막으로 들른 국가의 스탬프와 날짜가 적혀 있었다.
모든 신분증에는 일주일 전 오그리아 제국령의 스탬프가 찍혀 있었다.
세레니스 제국의 스탬프가 없다는 것은 그들이 적에게 가담했다는 증거였다.
“마지막이 오그리아 제국령이군. 너희들을 첩자 혐의로 체포한다.”
“자……. 잠깐만! 잠깐만요!”
어느새 그의 말투는 존대가 섞여 있었다.
가까스로 몸을 추스린 남자는 무릎을 꿇고 말했다.
“우린 첩자가 아닙니다. 밀수를 하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밀수? 무슨 밀수.”
“……내용물은 모릅니다.”
“밀수품은 어디있나?”
“안쪽에…….”
태훈은 기절한 네 명을 나무에 묶어놓고 남자를 앞세웠다.
숲으로 조금 들어가자 짐마차 한 대가 있었고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상자의 자물쇠를 부수고 열어보니 온갖 귀중품들이 들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초호화 물품들이었고 그중엔 레드크로스 상회에서 만들어 유통했던 도자기도 있었다.
“어디서 어디로 가져가는 것인가.”
“오그리아 제국령에서 세레니스 제국령을 거쳐 아무드령으로 갑니다.”
그는 오그리아에서 넘어와 숲에 짐을 숨기고 동향을 살피러 숲에서 나왔다가 들어오는 길이라고 했다.
“꽤나 먼 길이군. 그런데 어떻게 오그리아에서 이곳으로 넘어왔지?”
오그리아와 통하는 모든 길목에는 요새가 만들어지고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땅굴입니다.”
“땅굴? 이 정도의 마차가 지나갈 수 있는 땅굴이 있다고?”
“…….”
남자가 입을 열지 않자 태훈은 주먹을 썼다.
이빨 몇 개를 내어주고 나서야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종족들이 파놓은 땅굴이 있습니다. 돈을 주면 땅굴을 열어주고 짐마차도 끌어줍니다.”
그러고 보니 마차는 있었지만 말이 없었다.
“어떤 이종족이냐?”
“섞여 있습니다. 드워프도 있고 수인족도 있고 엘프도 있죠.”
엘프는 아주 희귀한 종족이었다.
태훈도 아직까지 엘프를 본 적이 없었다.
‘확실히 국경은 닫혀 있어. 이 짐들은 해외자산을 모으는 건가.’
귀족 같은 부유층은 자국 내에만 재산을 모아두지 않았다.
세금 문제도 있거니와 대부부의 귀족들이 상단 혹은 상단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경우 국외 자산이 있을 수 있는데 연합군이 전력적으로 우세하니 오그리아 쪽에 있는 자산을 몰래 들여오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을 수 있었다.
세금도 피하고 패전국가의 재산이 상당 부분 몰수당하는 부분이 있으니 몰래 들여오는 것 정도는 유추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땅굴이 오그리아에서 세레니스 제국 내로 몰래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태훈이 땅굴로 안내하라 하자 그는 그것만큼은 할 수 없다며 버텼다.
몇 번의 다독임(?) 이후 태훈은 땅굴의 정체를 볼 수 있었다.
암벽 밑에 있는 덩굴을 치우자 동굴이 나타났다.
짐이 실려 있던 마차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넓이.
조금 안으로 들어가자 나무로 된 창살이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열쇠는?”
“저희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 땅굴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지?”
“오그리아 제국령에 있는 안투니아 지역입니다.”
남자가 말하는 지역은 동굴로부터 5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에 있었다.
“그 정도로 땅굴이 길다고?”
“놈들 중에는 드워프도 있습니다.”
“이 땅굴은 안투니아로만 향하게 되어 있나?”
“그건 모릅니다. 땅굴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습니다. 이건 놈들의 장사 수단이라고요.”
태훈은 창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손바닥으로 강하게 치자 두툼했던 나무가 순식간에 부서졌다.
안쪽은 어두웠기에 라이트 마법을 쓴 뒤 남자를 앞세웠다.
조금 지나가자 아래로 내리막길이 나왔고 아래쪽은 어두웠다.
‘아래에 뭐가 있을지 몰라. 지금은 시간을 많이 할애할 수 없어.’
돌아가면 병력을 보내 땅굴을 조사하고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돌아나온 태훈은 기절해 있는 자들을 깨운 뒤 마차가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짐을 내려놓고 짐 마차에 용병들을 실어 옮길 요량이었다.
부스럭-
주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 말을 마차에 연결했다.
자신이 무방비 상태에 놓여지는 순간은 말에 올라타려는 순간.
그 틈을 노릴 것이라 생각하고 태훈은 조심스레 중력 마법을 시전했다.
이미 마력은 회복되어 있었다.
“그래비티.”
쿵-
주위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큭!”
“흡!”
용병들은 마차 바닥에 엎어지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고 숲속에서도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쿵- 쿵-
뒤를 돌아보니 몇몇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마법을 유지한 채 다가가니 그들은 사람이 아닌 엘프였다.
뾰족한 귀.
경보병 장비를 가진 그들은 세 명이었다.
‘이게 엘프인가? 용병들이 말하던 밀수를 도와주는 녀석들이겠군.’
“주…… 중력마법.”
태훈은 그들의 무기를 빼앗아 멀리 던져 버렸다.
용병들처럼 손을 뒤로 묶은 다음서야 마법을 풀었다.
“네놈들이 밀수를 도와준다는 이종족들인가.”
“…….”
“밀수는 중죄다. 하물며 전쟁 중인 국가 간의 땅굴을 연결하다니. 압송해서 조사하지.”
“그냥 죽여.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그건 네 생각이고. 이단심문관 앞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하네.”
태훈은 엘프들까지 짐마차에 실었다.
총 8명이나 되었지만 말은 황궁에서 제일 크고 좋은 말이었다.
길을 걷고 있을 때 뒤에서 용병들이 말을 걸었다.
“이보시오, 귀족 양반.”
“벌써 불 게 생겼나?”
“그러지 말고 우리는 풀어주시오. 그래주면 짐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겠소.”
그들은 태훈이 지방의 가난한 귀족이라고 생각했다.
헤라와 홀든과의 전투로 옷은 헤져 있었고 3일째 전투를 하고 있는 그는 씻지도 못한 상태였다.
짐은 상당한 귀중품이니 가난한 귀족에게 비밀을 약속하고 풀려나는 거래를 할 생각이었다.
“엘프까지 셋이 있잖습니까. 이 녀석들도 돈이 됩니다.”
“세레니스 제국에서 이종족의 노예는 불법이다.”
“그래도 귀족들은 다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풀어주신다면 영원히 입 닫고 있겠습니다.”
아마 엘프들은 동굴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비들일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땅굴 이용을 위해 거래를 했던 자들을 팔아넘긴다는 말에 태훈은 코웃음을 쳤다.
“뇌물 공여죄와 불법 노예거래까지 죄목에 포함이군.”
“거참 답답한 분이시네. 입을 닫겠다니까.”
태훈은 말을 멈추었다.
그러곤 말에서 내려 짐마차 쪽으로 다가갔다.
“역시 말이 통하시는…….”
퍼억-
고꾸라지는 용병을 보며 다른 용병들은 움찔했다.
“더 입 놀리고 싶은 사람?”
도리도리-
용병들은 고개를 저었다.
다시 마차에 오르며 이동을 시작했다.
엘프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조금 전의 상황에 흥미를 느낀 듯했다.
짐시 눈짓을 주고받은 뒤 한 엘프가 말했다.
“이봐, 인간. 대화를 하자.”
“들리니까 말해.”
“우릴 어쩔 작정이지?”
“밀수는 빼박이고 첩자 혐의를 물을 것이다.”
“빼박? 빼박이 뭐지?”
“빼도 박도 못 하게 확실하다고.”
“그건 부정하지 않지. 하지만 우린 첩자가 아니야.”
“그건 조사하면 알겠지.”
“우리와 거래를 하자.”
엘프들도 거래를 들먹거렸다.
태훈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것을 긍정으로 생각한 엘프가 말을 이었다.
“너는 세레니스 제국 쪽 인간이지? 지금 오그리아 놈들과 전쟁 중이라고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적의 정보를 주면 어떻겠나?”
“이단심문관이 있으니 정보를 빼내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아.”
“그렇다면 적의 후방으로 침투할 수 있다면?”
“땅굴의 위치를 확인했어. 그걸 이용하자는 거겠지. 우리가 알아서 이용해 주마.”
“땅굴은 미로야. 너희가 과연 그걸 이용할 수 있을까? 길이나 잃지 않으면 다행이지.”
잠시 말이 없던 태훈은 말을 세웠다.
“미로?”
“땅굴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안내자가 없으면 길을 잃고 빠져나오지 못해.”
태훈은 시선을 돌려 용병들 쪽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는 듯 용병들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