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이럴 리가 없는데.’
그녀는 신이 된 이후 처음으로 당황했다.
태훈의 심연 세계가 남들과는 달랐다.
신의 파편을 복용할 경우 보통은 본인의 자아와 의식이 거대한 힘에 이기지 못했다.
영혼에 손상을 입거나 자아가 심연의 세계에 갇히는 경우가 많았다.
태훈의 심연은 생김새부터가 달랐다.
새하얀 정사각형의 큐브가 사방에 떠 있었다.
사람 하나가 딱 들어갈 만한 크기의 큐브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남았다.
남아 있는 마나를 짜내어 탐색을 해봤으나 모든 큐브를 살펴볼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하나하나 살펴보는 수밖에 없었다.
‘난감하군.’
주위에 거대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거대한 해협을 통과하며 휘몰아치는 듯한 거대한 기류에 그녀는 큐브 뒤에 몸을 숨겼다.
‘이 기류는 대체 뭐지? 그리고 이 새하얀 것들은 대체 뭐야?’
처음 보고 처음 겪는 일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마음이 급해졌다.
온전한 신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진즉에 끝내고 곰탱이 같은 인간을 발견해 끌고 나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그녀의 힘은 미약했다.
거센 기류에 몸이 뒤집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러다간 나까지 같이 갇혀 버리겠어.’
지금 그녀의 존재만으로는 태훈의 심연에 삼켜질 수도 있었다.
그만큼 그녀는 약해져 있었고 태훈의 내부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어이! 미련 곰탱이! 어디 있는 거냐!”
“소리라도 내보란 말이다!”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는 외침.
점점 기류에 저항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체 이놈 상태는 왜 이런 거야.’
상식 밖의 환경에 그녀는 고민했다.
이대로 돌아갈 것인가.
그럴 경우 태훈은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수 있었다.
혹여 사망할 수 있었다.
끝까지 찾아낼 것인가.
현재 그녀가 지상에서 조력자로 찾을 수 있는 것은 태훈이 최적화 되어 있었다.
신의 능력을 유지한 채 신계에서 적들을 찾아내기란 어렵다.
꼭꼭 숨어버릴 것이 분명했고 그들은 추적이 힘들었다.
하지만 더 있자니 스스로가 위험했다.
신이란 존재가 인간 영혼 안에서 갇혀 버리면 그 꼴이 우스웠다.
“이 멍청한 자식!”
그 순간 그녀의 귀에 들리는 목소리.
“여기예요!”
그녀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판가름하기 힘들었다.
상자는 많았고 기류에 목소리가 휩쓸렸다.
그녀는 목소리를 찾아 헤맸다.
그러면서 계속 태훈을 불러냈다.
‘여긴가.’
마침내 목표를 찾은 그녀는 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텅-
묵직한 느낌과 함께 그녀의 몸이 뒤로 떠밀려났다.
“뭐어…….”
당황한 그녀는 입 밖으로 소리를 내었다.
약하긴 하지만 그녀는 아직 신의 존재였다.
일개 인간의 내면에서 그녀를 거부할 만한 힘이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연이은 실패로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냐, 해보자.”
그녀는 모든 힘을 짜내어 상자 안으로 손을 들이밀었다.
쿠직- 쿠직-
손의 피부가 갈라졌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손바닥이 상자에 닿는 순간 공간이 일그러졌다.
“손을 내밀어 멍청이! 나 혼자서는 널 끌어내지 못해!”
외침을 들은 듯 잠시 후 손 하나가 뻗어져 나왔다.
그녀는 그 손을 잡고 힘껏 끌어당겼다.
그 후엔 바로 내면을 탈출해 현실로 돌아왔다.
바닥에 누워 있는 태훈을 보니 숨소리를 골랐고 피부색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그녀는 꿋꿋이 서 있었다.
그녀는 그를 걷어차며 깨웠다.
눈을 뜬 태훈은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몸 상태는 어때?”
“아, 뭔가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에요. 지금이라면…….”
태훈은 세 기운을 모두 응집시켰다.
뮤즈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 기운 모두 종전의 기량을 웃돌았다.
뮤즈를 무기화 했을 때보다도 커진 기운들.
그러다 이내 세 기운이 하나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
“놀랄 것 없어. 그게 신의 기운이다.”
하나로 합쳐진 하나의 기운은 새하얀 기운으로 변했다.
온몸을 가득 채우는 기운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힘과 우월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게 신의…….”
“그만해. 언제까지 유지할 수는 없을 거야. 약의 효과는 제한적이란 걸 잊었나?”
그 말대로 새하얀 기운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내 기운을 거두자 그녀는 다시 병 하나를 건네주었다.
“지금 가진 건 이게 전부야.”
“원래 그런 걸 가지고 다녔습니까?”
“만일을 위해서 가지고 다니는 거다. 인간에게 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대신 나와의 약속은 잊지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태훈은 약병을 받아들었다.
“난 잠시 돌아간다. 약속 잊지 마.”
“언제 돌아옵니까?”
“나도 몰라. 아무튼 그게 전부니까 알아서 써. 한 번에 털어 넣지 말고.”
그 말을 끝으로 그녀의 모습은 사라졌다.
태훈을 구하느라 더 이상 육체를 유지할 힘조차 없었기에 빠르게 신계로 돌아간 것이다.
태훈은 약병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수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이라면 한 걸음에 달려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뛰기 시작했다.
* * *
“왔군.”
“뭐? 또 누가 오는데.”
헤라는 홀든을 따라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달만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홀든은 달을 쳐다보았다.
헤라도 그 시선을 따라 달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어, 저거 설마…….”
작은 점은 점점 커졌다.
이내 그것이 사람의 형상이라는 걸 아는 데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끼릭-
홀든은 어느새 거대한 장궁에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투웅-
둔탁한 소리와 함께 화살이 쏘아졌다.
무형의 화살은 이내 푸른빛을 머금으며 다가오는 사람의 형상으로 곧장 날아갔다.
목표에 닿는 순간 화살은 궤적을 틀어 목표에서 벗어났다.
“흐음…….”
홀든의 주위로 수십 개의 화살이 생겨났다.
“폭풍의 화살.”
짧은 시동어와 함께 푸른빛을 머금은 화살들이 쏟아져 나갔다.
마치 기관총에서 야광탄을 쏟아내듯 푸른빛들이 쏟아져 나갔다.
그때마다 화살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는 것처럼 튕겨져 나갔다.
이내 모습을 드러낸 것은 태훈이었다.
마차로 이틀은 내리 달려야 하는 거리임에도 태훈은 단 몇 분 만에 이동했다.
홀든이 재빨리 자리에서 이탈하자 그가 있던 자리에서 굉음과 함께 자갈들이 튀었다.
그리고 어느새 홀든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장군님일 줄이야.”
상대가 홀든인 것을 파악한 태훈의 인상이 구겨졌다.
실망감이 가득 묻어져 나오는 얼굴이었다.
그 순간 태훈의 뒤에 헤라가 나타났다.
헤라의 얼굴에는 광기가 가득 차 있었다.
“제 발로 나타날 줄이야! 그년 대신 흠씬 두들겨…….”
태훈의 몸이 허공에서 한 바퀴 돌았다.
물리 법칙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세를 바꾼 그의 발이 헤라의 안면을 강타했다.
쾅-
수직낙하한 헤라는 그대로 지면에 꽂혔다.
그사이 거리를 벌린 홀든의 활에서 거대한 빛이 쏘아졌다.
연발로 쏴대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크기였다.
허공에 서 있던 태훈은 들고 있던 검으로 가볍게 처냈다.
키잉-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휘어진 빛은 그대로 지면으로 향했다.
“미친놈! 어디다 쏘는 거야!”
화살은 그대로 땅에 쓰러져 있던 헤라를 덮쳤다.
쿠궁-
태훈이 들고 있던 검은 뮤즈가 아니었다.
미스릴로 만든 일반 검이었지만 흰빛이 둘러져 있었다.
그것을 본 홀든은 활을 버리며 말했다.
“강해졌나.”
“제 아내는 어디 있습니까?”
“그건 알려줄 수 없네. 알려줄 거였으면 애초에 일을 벌이지도 않았겠지.”
“그렇다면 힘으로 묻겠습니다.”
홀든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뮤즈에게 치명상을 입혔던, 자유자재로 형태를 바꾸는 무기였다.
태훈의 검과 부딪힌 홀든은 엄청난 무게감을 느꼈다.
‘그대로 받아선 안 되겠군.’
홀든은 무기의 유연함을 살려 태훈의 공격을 흘렸다.
챙- 챙-
금속의 마찰음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홀든의 검이 태훈의 검을 흘려보냈다.
땅으로 향해 있던 검끝이 뱀처럼 휘어지며 태훈의 뒤를 잡았다.
그러곤 그대로 태훈의 목덜미를 향해 달려들었다.
캉-
허나 검끝은 힘없이 튕겨져 나갔다.
‘……실드? 아니, 배리어인가?’
낮은 클래스의 실드로는 신기를 막아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6클래스의 배리어라는 이야기.
홀든의 검끝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검신으로는 태훈의 공격을 흘리면서 검끝은 뱀처럼 사방에서 태훈을 노렸다.
그럴 때마다 공격은 튕겨져 나갔다.
‘배리어를 몸 전체로 두르고 있는 건가.’
고클래스 방어 마법을 펼쳐 전투 중에 전신을 두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동시에 보지 못했던 검기의 색을 보며 홀든은 태훈을 상대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지면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발밑에서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자 태훈은 발밑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물체가 자신에게 쇄도해 오자 피하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해 미처 피하지 못하고 충돌했다.
‘뭐야, 이건.’
상대는 흉측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헤라였다.
피부는 흙빛으로 변해 있었고 눈은 충혈되었으며 뼈와 근육들이 확장됐는지 덩치가 커져 있었다.
거기에 손톱은 시미터처럼 길게 자라나 있었다.
“크크크큭! 아주 힘이 넘치는구나.”
입에서 풍겨 나오는 비릿한 냄새.
태훈은 그 향을 맡아본 적이 있었다.
‘푸에르코……. 그 약인가.’
헤라는 정신없이 손톱을 휘날렸다.
눈으로 좇기 힘든 스피드.
태훈의 옷깃 여기저기가 베이면서 혈흔이 튀었다.
헤라를 상대하고 있을 때 이번엔 뒤에서 홀든이 달려들었다.
앞뒤로 날아드는 날붙이에 태훈의 손도 바빠졌다.
전력이 강해진 헤라보다는 홀든 쪽이 수월했기에 홀든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옷깃을 잡은 태훈은 그대로 헤라 쪽으로 집어 던졌다.
헤라가 팔을 들어 홀든을 막는 동안 태훈은 두 사람이 겹쳐진 상태로 발을 날렸다.
텅-
마치 축구공을 차듯 내지른 발길질에 두 사람은 포개지며 근처 집 벽에 부딪혔다.
쾅- 쾅-
그대로 벽을 뚫으며 집을 관통한 둘은 다음 집의 담벼락에서 멈추었다.
“칫, 귀찮게 하기는.”
헤라는 홀든을 집어 던지고 태훈에게 달려들었다.
“조금 강해졌다만 지금의 나를 당해낼 순 없지!”
타격이 전혀 없는 모습에 태훈은 혀를 찼다.
‘그 약은 상용자에 따라서 효능도 천차만별인 건가.’
비록 이곳까지 달려오느라 상당 부분 힘을 썼다지만 파편을 대량 복용한 자신과 호각인 헤라가 부담스러웠다.
홀든은 넘어졌던 몸을 일으키며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주륵-
가면 안쪽에서 흐르는 피를 닦은 홀든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광경.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부상을 입은 것도 보였다.
콰앙-
헤라가 낙하하며 집 한 채가 사라지고 먼지 구름이 일었다.
“흥, 이 정도는 간지럽지도 않다고! 날 좀 더 즐겁게 해주란 말이다!”
헤라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 달빛에 드러났다.
그것을 본 홀든은 품속에 손을 넣었다.
손에 쥔 물건은 검은 액체가 든 병.
잠시 병을 넌지시 바라보던 홀든은 이내 다시 품 안에 집어넣었다.
‘내가 하는 일에 광기는 필요 없다.’
입가에 피를 닦은 홀든은 다시 한번 공중으로 뛰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