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태훈은 눈을 떴다.
새하얀 바닥이 눈에 들어오자 자신이 쓰러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몸을 일으킨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것도 없는 백의 공간.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가보니 10세 전후의 어린아이였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보랏빛 장발.
넝마를 걸치고 있는 모양새가 마치 노숙자 같았다.
그는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넌 누구니? 여기가 혹시 어딘지 알고 있니?”
“먼저 본인 소개부터 해야지.”
아이는 웃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태훈은 자신을 크로이츠라 소개했다.
“크로이츠라. 나는 알포네라고 해.”
“알포네. 여기가 어딘지 설명 좀 해줄 수 있어?”
“여긴 내 안이야.”
“그게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 내 안. 네가 가진 기억을 빌려 말하자면 내가 가진 심연의 세계라고 할까?”
아이가 하기엔 너무도 어려운 표현에 태훈은 잠시 머뭇거렸다.
“앉지 그래? 어차피 여기서 자력으로 나갈 방법은 없어.”
“나갈 수가 없다니?”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말 그대로 혼자선 탈출할 수 없어. 나도 여기서 오래 있었거든.”
“얼마나?”
“몰라. 밤낮이 없으니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
“난 나가야 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정말 방법이 없다고.”
아이는 해탈한 듯한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태훈은 걷기 시작했다.
문이 없다면 벽을 뚫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한참을 걸어도 문은커녕 벽도 보이지 않았다.
지평선조차 가늠되지 않게 온통 새하얀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무리하지 말라니까.”
“헛.”
순간 뒤에서 나타난 아이의 모습에 태훈은 비틀거리며 넘어졌다.
분명 한참 멀리 있던 아이가 어느새 자신의 뒤에 와 있었다.
“그 먼 거리를 어떻게…….”
“나의 세계니까. 내가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지. 탈출하는 것만 빼고.”
태훈은 곰곰이 생각했다.
신이 준 약을 먹은 것까진 기억이 났다.
그렇다는 건 눈앞의 아이가 신의 분신일 수도 있었다.
“너는 신의 분신인가?”
“신? 뭐, 한때 그렇게 불린 적도 있긴 있어.”
“네 본체가 준 약을 먹고 이곳으로 왔어. 네가 신이라면 날 내보내 줬으면 좋겠는데.”
“내 본체는 오래전에 소멸해서 없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으니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겠어?”
태훈은 신과 만나 약을 전해 받았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아이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군. 일이 진행되는 모양이네.”
“일?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안다는 건가?”
그렇다면 적이거나 아군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태훈이 경계하자 아이는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곤 혼자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중얼거렸다.
“그렇군. 더미인가.”
“뭐야, 혼자만 알고 있지 말라고.”
“시스템과 이곳 신이 연결이 안 된 건가? 아니지, 이것조차 계산된 걸 수도.”
알 수 없는 혼잣말에 태훈은 열을 내다가 이내 아이의 정면에 앉았다.
“이봐, 너도 네가 알고 있는 걸 설명해!”
“아, 미안. 생각 좀 정리하느라. 무엇부터 듣고 싶어?”
“넌 누구야?”
신은 신이지만 본체는 소멸했다니 자신이 만난 스파르타 출신의 신과는 별개의 존재인 걸 알 수 있었다.
“난 알포네. 옛적부터 그 이름을 써왔고 한때 1급 신까지 갔던 존재지.”
1급 신이면 바깥에 있는 금발의 신보다도 상위의 존재였다.
‘1급 신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 거지?’
“너 저승에 있었던 기억이 있지?”
그 말에 태훈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러자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쫄지 말라고. 혼내는 거 아니니까. 그리고 네가 솔직해야 나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어. 그리고 어차피 우리 둘의 대화는 아무도 못 듣거든.”
잠시 고민하던 태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나갈 수만 있다면야 상관없었다.
“거기서 천국으로 가는 문을 봤지?”
“봤어.”
“난 그 안에서 일했어.”
천국에서 왔다는 말에 태훈의 눈이 커졌다.
‘1급 신에 천국에서 왔다면 대천사 정도 되는 건가? 아니면…….’
그런 태훈의 생각을 알아챈 듯 아이는 손을 내저었다.
“아, 난 그 정도 존재가 아니야. 오해하지 마.”
“흠, 하여튼 대단한 위치였다는 건 알겠어. 그런데 그만한 존재가 왜 여기에 갇혀 있는 거지?”
“음, 뭐 꿈을 좇다가? 아니다, 좀 거창한 표현인가?”
자문자답.
태훈은 질문을 이어갔다.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는 것 같은데.”
“응, 대충은. 내가 여기 있는 이유도 아마 그것 때문이니까.”
“이유가 뭔데?”
“바깥에서 누군가 저승으로 가는 문을 열려고 하는 거지?”
“맞아.”
“난 그 문을 열려는 자를 꾀어내기 위해 여기 있어.”
무슨 말인지 모를 답변에 그는 답답함을 토로했다.
“내가 알아듣게 설명해.”
“저승의 문을 열려고 하는 자의 이름은 마데우스. 난 그의 절친이자 조력자였어. 그가 처음 문을 열려고 할 때 신에 의해 소멸당했지.”
태훈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앞의 아이는 적의 최측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아이는 웃으며 앉으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여기선 너나 나나 아무런 힘을 못 써. 시스템이 만들어낸 공간이라. 그리고 너나 나나 같은 존재인데 싸워봤자 무의미하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시스템은 뭐고 너랑 내가 같은 존재라니?”
“충격받지 말고 들어. 나는 과거에 육체를 소멸당했어. 마데우스는 도망쳤지. 그리고 신이라는 것은 마데우스를 끌어내기 위해 내 영혼을 이용하기로 했지. 쉽게 말해 미끼야. 마데우스는 내 영혼에 집착하거든.”
“무슨 이유로? 네가 그 문을 여는 데 중요한가?”
“문을 여는 데 나는 필요 없어. 다만 마데우스가 나를 아낀다는 거?”
“널 구하기 위해 마데우스가 모습을 드러낼 거란 이야기냐?”
“실제로 그러고 있어. 직접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부하들을 시켜서 널 데려오려고 할 거야.”
“그렇다고 쳐. 그런데 네가 나랑 같은 존재라는 건?”
“말 그대로. 내 영혼을 미끼로 쓰고 싶지만 내가 뜻대로 움직일 리 만무하니까. 자신의 꼭두각시가 될 인격을 만들어냈지.”
“그게 나라고?”
“정답. 넌 내 영혼에 덧씌워진 새로운 인격.”
“그게 무슨 헛소리야. 그 말은 내가 가짜라는 거냐?”
“가짜라고까지는 하지 않았어. 다만 정상적인 영혼은 아니지. 뭐 쉽게 말해 이중인격 중 하나랄까?”
“풋.”
그는 어이가 없다 못해 헛웃음이 나왔다.
아이는 지금 자신더러 반쪽짜리 가짜라고 하고 있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나에게도 전생은 있어.”
“그때 이후로 시간은 많이 흘렀으니까 몇 번의 삶은 살았겠지. 내가 여기 있는 동안 말이야. 그런데 그것도 아마 천국이 만들어낸 계획의 일부일걸?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서 말이야.”
“그럼 시스템은 뭐냐?”
“음, 그건 좀 설명이 길어지는데. 뭐 시간도 많으니 상관없나? 키킥.”
아이는 웃으며 턱을 괴며 말했다.
“지금부터 말해줄게. 이 세계의 진실을 말이야.”
?
이야기가 끝난 후 태훈의 표정은 미묘했다.
허탈하면서도 불쾌한 듯한 기분.
“네 말을 어떻게 믿지? 그게 진실이라고 어떻게 알아?”
“믿든 믿지 않든 그건 네 몫이야. 난 강요할 생각 없어. 물어본 사람은 너고.”
“넌 그 마데우스라는 놈이랑 같은 편이잖아.”
“예전에는 그랬지. 그런데 여기 있으면서 생각이 좀 변했어.”
“변해? 감금당하면서 반성이라도 했다는 건가?”
“반성? 난 내가 한 일에 후회는 없어. 다만 덧없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뿐이야.”
아이는 다리를 피고 몸을 뒤로 뉘였다.
양팔로 몸을 지탱하며 즐거운 듯 다리를 흔들었다.
?
알포네가 한 말은 태훈에게 큰 충격이었다.
자신이 여태껏 살아왔던 모든 것이 부정당하거나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충격이 큰 모양이네. 나도 처음에 그랬어.”
“적어도 너는 100억을 모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잖아.”
“그건 그렇지. 어때? 마라톤의 결승점이 사라진 기분이.”
“네 이야기는 아직 믿을 수 없어.”
“이해해. 인간은 그런 존재니까. 나는 여기 있으면서 너의 삶을 간간이 엿볼 수는 있었어. 여흥으로는 나쁘지 않았으니 한 가지 더 알려줄게.”
아이는 태훈의 앞으로 다가와 쪼그려 앉았다.
“영혼은 하나지만 분명 너와 나는 다른 개체야. 그러니까 스스로를 비하할 필욘 없어.”
“누가 비하를 했다는 거야!”
태훈은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아이가 뒤로 넘어졌다.
“아이고, 귀 아파라.”
“말해, 여기서 나갈 방법을!”
“나갈 방법? 여기 들어온 이상 자력으로 나갈 방법은 없어.”
“들어올 수 있으면 나갈 방법도 있는 거다.”
“너 신의 파편을 먹었다며. 아마 그 신이 가진 힘에 이 공간이 반응해서 잠깐 열린 걸 거야. 다시 우연히 열릴…….”
그 순간 아이는 말을 끊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아이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흠, 용감한 녀석도 있네. 아마 널 여기로 오게 만든 녀석 같은데 책임감은 있는 녀석이군.”
그때 태훈의 귓가에 소리가 들렸다.
“……탱아!”
“무슨 소리지?”
“널 찾으러 온 모양이네. 하지만 저 녀석 혼자서는 여길 찾기 힘들 거야.”
그때 태훈의 귀에 똑똑히 소리가 들렸다.
“미련한 곰탱이 같은 녀석! 어디 있는 거냐!”
그녀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자 태훈도 소리를 쳤다.
“여깁니다! 목소리 들려요!”
사방으로 움직이며 목소리를 높이는 태훈을 보며 아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봐.”
“왜?”
“밖에서 널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
“적어도 너보다는 많을 것 같은데.”
“그렇지? 난 마데우스 말고는 찾는 사람이 없을 거야.”
“도와줄 거 아니면 말 걸지 말아주겠어? 어차피 아무것도 못 하겠지만.”
아이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곤 태훈을 향해 다가갔다.
“너의 삶을 엿볼 때 썼던 힘 정도면 틈을 만들 수 있어.”
“……넌 적이잖아. 나랑 좋은 관계도 아닌데 왜 도와주려는 거지?”
“난 아직 도와주겠다고 한 적 없는데?”
“그러려고 말을 꺼낸 거 아닌가?”
“풋.”
아이는 허공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그마한 소용돌이와 함께 공간이 일그러졌다.
동시에 그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찾았다! 거기 있나!?”
일그러진 공간에서 들려오는 선명한 목소리.
“손을 내밀어 멍청이! 나 혼자서는 널 끌어내지 못해!”
태훈이 일그러진 틈으로 손을 내밀려 하자 아이가 그의 손을 잡았다.
“여기서 있던 이야기는 하지 마. 여기서 너와 내가 만났다는 건 아마 시스템도 모를 거야. 여긴 감옥이기도 하지만 밖에서 간섭하기도 힘든 곳이거든.”
“……너도 가자. 네 말을 증명해 봐.”
아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나갈 수 없어. 말했지? 혼자서는 나갈 수 없다고. 저 녀석은 너 하나 겨우 끄집어낼 수 있을 거야. 나까지는 불가능해.”
일그러진 공간이 작아지려 하자 아이는 태훈의 팔을 놔주었다.
태훈이 공간으로 손을 내밀자 반대편에서 누군가 그의 손을 잡았다.
“잘 가. 그리고 절대로 마데우스와는 만나지 말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