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가면은 레이첼을 마차에서 꺼내 들쳐 업었다.
“불필요한 폭력은 안 썼으면 좋겠군.”
“뭐? 그럼 직접하던가.”
가면은 레이첼을 마차에서 꺼내 들쳐 업었다.
마차 주위에 살아 있는 것은 없었고 움직이는 것은 금발의 여자와 가면을 쓴 남자뿐.
삐이이이익-
멀리 있는 황궁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적의 증원군이 곧 올 거다. 자리를 뜨자.”
“아앙? 지금 나한테 명령이야?”
금발의 여자가 기분이 언짢다는 듯 대꾸하자 남자가 손을 들었다.
위잉-
“크윽!”
여자는 괴로운 듯 몸을 뒤틀었다.
온몸의 문양에서 빛이 새어져 나왔다.
“이 자식…….”
“네가 누구였던 간에 관심 없다. 내 말에 따르기로 했으면 따라.”
여자는 헤라였고 가면의 남자는 홀든이었다.
둘은 자리에서 벗어나 귀족가의 저택으로 보이는 곳에 들어갔다.
저택 안은 온통 피범벅이 되어 있었고 살아 있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요란하게 처리했군.”
홀든이 한숨을 쉬며 맥빠진 목소리로 이야기하자 헤라는 소파에 앉으며 거들먹거렸다.
“흥, 그래도 나름 괜찮은 집을 선택했다고 생각하는데?”
작전 시작 바로 직전에 마법으로 나타난 헤라.
주인이라는 자의 전언을 받은 홀든은 헤라 덕분에 편하게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위병으로 변장한 자들은 3황자의 반역에 가담했다가 도망친 자들.
홀든은 그 패잔병들을 모아다 이번 일을 꾸몄다.
따르지 않겠다는 인간들을 눈앞에서 언데드로 만들어 버리자 그들은 순순히 따랐다.
어차피 평생 숨어서 지낼 바에는 홀든이 약속한 자유를 믿어보기로 했던 것.
“여기로 온 이유는 뭔가?”
“그 여자를 들쳐 메고 움직일 생각은 아니겠지?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네가 왔을 때처럼 마법으로 가면 되지 않은가?”
“나야 그분이 보내준 거고. 텔레포트라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마법이 아니라고.”
“그럼 앞으로의 계획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애초에 이번 일을 계획한 건 너였고 난 도와주러 왔을 뿐인데.”
“내 계획은 조용히 빼돌려서 지하 수로를 이용해 조용히 나가는 것이었다. 누구 덕에 이 소란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거지?”
“젠장, 훼방꾼이 나타날 줄은 몰랐지. 그것도 내 탓이냐?”
헤라는 화를 냈다.
훼방꾼은 5황녀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실제로 홀든은 조용히 레이첼을 빼내갈 작정이었다.
그걸 위해 수많은 날들을 지하 수로에서 작업해 왔다.
다만 5황녀가 눈치챘다는 것과 헤라의 화려한 기술 때문에 모든 계획이 망가지고 말았다.
황녀가 탄 마차를 습격한 것도 모자라 공격까지 했으니 제국 수도가 시끄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별수 없군.”
홀든은 기절해 있는 레이첼을 내려두고 저택을 나섰다.
어디 가냐는 헤라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저택을 나선 그는 근처 허름한 수로 입구를 찾았다.
도시 곳곳에는 지하 수로로 내려가는 출입구가 있었다.
평소에는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 있었지만 홀든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려가는 계단의 벽에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지난 몇 일간 홀든이 수로 입구마다 그려놓은 것들이었다.
주머니에서 마나석을 꺼내 벽에 그려진 마법진 한가운데에 꽂아 넣었다.
그러자 위잉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나석과 마법진이 희미하게 빛났다.
그리고 미련없이 뒤로 돌아 저택으로 돌아왔다.
“어딜 갔다 오는 거야?”
홀든은 아무 말 없이 소파에 앉았다.
?
홀든이 다녀간 지하 수로로 들어가는 입구.
희미하게 빛나는 마법진은 점차 옅은 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빛을 다 잃었다고 생각되는 순간.
다시 한번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빛은 벽을 따라 지하 수로 안쪽으로 내려갔다.
그러곤 다시 벽을 따라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갔다.
잠시 후.
지축을 울리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쿠구구구구-
사람들은 땅이 흔들리자 당황했다.
한 번도 지진이란 것을 겪어보지 못했기에 그런 것이었다.
쿠르르릉-
콰지직-
건물 곳곳에 금이 가고 길이 갈라졌다.
도심 곳곳에 싱크홀이 생겨나며 건물이 붕괴되었다.
세레니스의 수도도 그렇지만 인구가 밀집된 큰 도시에는 대마법 방어가 설계되어 있었다.
다만 그것은 지상에서의 상황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
지하 수로는 그 영향에 받지 않는 다는 것을 안 홀든의 짓이었다.
본래 지하 수로로 탈출할 때 추적자가 있을 경우를 대비한 장치.
하지만 지금은 자신들에게 쏠린 관심을 돌리기 위함이었다.
사방에서 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5황녀는 마차에서 탈출하던 찰나 진동을 느꼈다.
황궁에서 달려나온 병력들이 쓰러진 마차들에서 황녀와 보스완 백작 부부를 끌어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황녀가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다.
지진을 겪어보지도 않았고 하물며 마법을 쓰지 못하도록 설계된 도시안에서 누군가 마법을 쓰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진동은 약 1분간 지속됐다.
홀든이 마법석을 장착한 지역의 지하 수로로부터 시작된 붕괴.
그 지점 외에도 주요 지역들이 붕괴를 일으켰고 삽시간에 도시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도와줘! 사람이 깔렸다!”
“위병! 위병을 불러!”
재난을 피한 사람들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간신히 두 발로 일어선 황녀는 먼지가 피어오르는 시내 쪽을 보며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누군지 모를 적들이 위병으로 변장했다는 사실에 반역의 연장인가로 생각했다.
당시 몇몇 주력자들은 지하 수로로 도망간 뒤 잡히지 않았었다.
그 잔당들이 일을 꾸미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자신을 놔두고 레이첼을 데려가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직감했다.
‘적군이 숨어든 건가.’
달리 떠오르는 적이 없자 현재 전쟁 중인 오그리아와 그들과 연합한 정체불명의 조직이 떠올랐다.
‘젠장, 레이첼을 뺏겨선 안 되는 거였어!’
황궁을 나설 때 첫 전투가 있을 것 같다는 보고도 들은 바 있었다.
양동 작전에 당했다는 것에 황녀는 주먹을 떨었다.
“당장 수도를 봉쇄해라! 개미 한 마리 도시에서 나가지 못하게 봉쇄해!”
아직 레이첼이 수도 안에 있을 것이라 생각한 황녀는 급히 봉쇄 명령을 내렸다.
방위군과 위병들이 구조와 봉쇄에 매달렸다.
되레 경비가 강화된 것을 본 헤라는 혀를 차며 홀든을 조롱했다.
“뭐야, 더 움직이기 힘들어졌잖아.”
“겉으로는 그렇겠지. 하지만 거리에 한시적일 뿐이야.”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도시 곳곳에 횃불이 밝혀졌다.
아직도 구조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주요 시설에 대한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다.
홀든은 저택 입구 앞에 화환을 하나 걸어두었다.
그리고 이내 달이 뜨자 창밖을 응시했다.
“올 때가 됐군.”
“누가 오는데?”
홀든은 말없이 창 밖을 응시했다.
잠시 후.
저택 앞을 기웃거리는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저택 안으로 들어온 자들은 위병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홀든은 그들에게 레이첼을 넘겼다.
“중요한 인질이다. 절대 다치지 않게 하도록.”
“걱정 마십쇼.”
그들은 3황자의 반란 세력에 가담했던 자들.
척 보기에도 껄렁해 보이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떤 홀든은 돌아서는 그들의 어깨를 낚아챘다.
“분명히 말했다. 내 경고를 무시하면 어떻게 될지 잘 생각하고 행동해라.”
무시무시한 살기.
덩치들은 가면 너머의 얼굴이 상상됐는지 움찔거렸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그제야 홀든은 어깨를 놔주었다.
세 명의 덩치들은 재빨리 저택을 빠져나갔다.
“뭐야, 우리가 데려가는 거 아니었어?”
헤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알기로 여자는 자신과 맞서 싸운 자의 가족.
인질로 잡는다는 홀든의 설명을 들었었다.
“인질을 데리고 있는 상황에서 그 남자와 싸우는 것은 불리해.”
“그 녀석은 지금 다른 곳에 있잖아. 그리고 이쪽은 둘인데 뭘 걱정하는거야?”
“넌 이미 그 남자한테 한번 패하지 않았나.”
“뭐라고? 이 자식이…….”
헤라는 발끈하며 홀든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이내 멈칫하며 이를 악물었다.
“흥, 그 녀석이 아니라 신한테 진 거라고.”
“어쨌거나 넌 그 남자를 끝내지 못했어. 그 시점에서 넌 패배다.”
“이게 말끝마다…….”
그 순간 홀든은 서쪽 하늘을 쳐다보았다.
거기엔 보름달이 훤히 빛나고 있었다.
잠시 하늘을 응시하던 홀든이 조용히 나직였다.
“그는 반드시 온다.”
“너 그놈하고 같이 있었다고 했지? 뭐 하는 놈이야?”
“내 후손이지.”
“뭐? 그럼 너도 같은 출신이냐?”
헤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제는 자신이 신으로 있던 세계의 인간의 부하가 되었다는 생각에 부들거렸다.
하지만 홀든은 개의치 않는 듯 중얼거렸다.
“어쩌면 오는 중일 수도 있겠군.”
?
태훈도 보름달 아래 있었다.
요새를 벗어나 인근 산봉우리에 신과 함께 대면하고 있었다.
“그게 가능합니까?”
“예전에 그렇게 신탁이 내려진 적이 있다고 하던데. 그런데 문제점도 있지.”
“문제점?”
“사소한…… 부작용이랄까?”
시선을 회피하는 신에게 태훈은 대답을 요구했다.
“인간의 몸과 영혼이 신의 힘을 받아들이는데 과부하가 걸리겠지. 뭐 반쯤 정신이 나갈 수도 있고 영혼 자체가 붕괴될 수도 있지.”
“……과거에도 그런 부작용이 있었습니까?”
“전임자가 했던 방법이라고 듣기만했지 결과는 어땠는지 몰라. 그런 방법으로 신탁을 전했다고 했거든. 부작용이 발견됐으니까 신탁 방법을 다른 식으로 바꾼거 아닐까?”
“그렇다면 이 방법은 무의미하군요.”
신은 태훈에게 자신의 힘을 일부 사용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한시적이고 극히 일부이긴 했지만 낮에 보았던 능력만큼을 보일 수 있다고 했다.
직접 나서라고 했지만 신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신은 지상에 현신하면 많은 제약이 걸린다고 했다.
태고적부터 있었던 제약이며 본래의 힘을 발현한다 하더라도 그 부작용으로 육신이 버티지 못한다고 했다.
태훈이 체념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들었어. 넌 저승에서 거래를 했잖아. 기본적으로 영혼이 개조가 됐을 텐데?”
“그래봤자 베이스는 인간의 영혼이죠.”
“그럼 이대로 그거랑 싸워서 이길 수 있겠어?”
그거라 함은 헤라를 말하는 것이었다.
태훈은 입을 다물었다.
이미 힘의 격차는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거기에 헤라의 윗선에 있는 자는 분명 헤라보다 강할 게 분명했다.
그가 망설이는 듯하자 신은 쐐기를 박았다.
“네가 잘못되어도 그 뒷정리는 내가 책임지고 처리해 줄게.”
“뒷정리?”
“네 여자를 구해주면 되는 거지? 아이랑 같이.”
그 말에 태훈이 흔들렸다.
이 상황에 신이라는 존재가 거짓말을 할 것 같지 않았다.
망설이고 있는 그에게 신은 유리병 하나를 던졌다.
태훈이 받아보니 새하얀 빛을 머금은 구슬들이 들어 있었다.
“이건……?”
“내 파편. 그걸 복용하면 일시적으로 내 힘을 낼 수 있어. 뭐 완벽한 힘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년 정도는 공깃돌 다루듯 할 수 있을 거야.”
그는 유리병을 들고 고민했다.
반면 그 시간마저도 아깝다고 생각했다.
수도와 연락이 끊긴 지 반나절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내 결심한 듯 그는 유리병을 열었다.
“어어어!? 야! 그거 한 번에 하나씩이야!”
태훈이 털어 넣는 것을 본 신은 다급히 그를 말리려 했다.
하지만 이미 유리병은 비워진 상태였다.
“이런 무식한 놈. 괜히 여러 알로 나눠놨겠냐!”
“큽.”
그 순간 태훈은 강하게 머리를 얻은 것마냥 머리가 새하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