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여긴 당신의 세상 아닙니까?”
태훈의 고함에도 여자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냉정하고 평화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할 뿐.
“애착이나 관심조차 없는 거냐고 말하고 싶은 건가?”
“방금 전에도 그 많은 언데드들을 보지 않았습니까? 그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이, 애송이.”
여자의 표정이 급격히 나빠졌다.
그러곤 조용히 다리를 꼬며 말했다.
“각자 자기 나름의 일이라는 게 있다. 내가 이 세상을 위해 얼마나 분투하고 있는 줄 알아?”
신은 이골이 나 있었다.
그러곤 자신이 하는 일을 불만 섞인 말투로 늘어놓았다.
시시각각 저승에선 평가가 진행된다고 했다.
“세계를 구성하는 영혼들의 수와 무게. 그리고 그 영혼들이 가지는 평균적인 깨끗함의 순도. 그런 것들이 평가에 반영되지.”
“그게 신과 무슨 상관이 있죠? 듣자하니 당신은 오랫동안 신탁도 없이 조용했다고 하던데요.”
“열심히 아부를 떨고 있었다고! 젠장!”
여자가 처음으로 화를 냈다.
평가가 이루어진 뒤 기준 미달이 되면 그 세계는 폐기 처분된다.
그 책임을 물어 관장하던 신은 파면당하거나 직급이 강등된다고 한다.
신은 이곳의 담당이 되었을 때부터 자신의 세상이 폐기 1순위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태훈은 저승에 있었을 때 한가했던 카운터를 떠올렸다.
대기 순번도 없이 바로 환생할 수 있었던 세상이 지금 자신이 있는 세상이었다.
“전임자로부터 이곳을 꼭 지켜내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 당시 신참이었던 나는 그 사람으로부터 문이 열렸던 날의 내용을 들었다.”
“그럼 당신은 최초로 문이 열렸던 때 이후의 신이군요.”
“난 그 당시 저승에서 일하는 4급 신이었어. 아무튼 전임자는 그 사건이 그 일 직후 소멸당했다.”
“소멸?”
“그 문은 저승으로 향한다. 그 소란이 일어났는데 당연하지.”
“그럼 보고를 듣자마자 개입을 했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전임자가 떠나면서 했던 말이 있었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확실한 안전장치를 해놨다고. 다시는 이곳에서 문이 열릴 일은 없을 거라고. 그 말을 맹신했지.”
“그 안전장치라는 게 뭡니까?”
“몰라. 나한테도 그건 이야기 안 해줬으니까.”
“그럼 적들은 그 안전장치를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까?”
“뭐 그렇겠지. 아무튼 난 전임자의 말을 믿었기에 보고를 받아도 별문제가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거 말고도 저승에서 할 일은 산더미야.”
태훈은 복잡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신의 무성의에 화가 났지만 거기엔 나름 이유가 있었다.
거기에 전임자가 마련해 놨던 확실한 안전장치가 있다는 말에 안심이 되기도 했다.
‘만약 그렇다면 이건 단순한 국가간 분쟁으로 마무리 될 수 있다. 최악의 상황은 면한 건가.’
그제야 머릿속에 여유가 생긴 태훈은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흥분을…….”
“뭐 됐어. 그리고 이제 나도 개입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어. 신기를 만드는 데 인간이 사용됐고 언데드화 된 많은 인간들의 영혼이 탁해졌다는 건 곧 있을 평가에서 빼도 박도 못해.”
“폐기 대상이란 말입니까?”
“이 정도면 아부를 떨든 뇌물을 주든 간단히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여신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태훈과 눈이 마주쳤다.
태훈이 눈을 피하자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이 떠오른 듯 반대편 다리를 꼬았다.
“그러고 보니 나도 너한테 할 이야기가 아주 많아.”
“아, 네. 뭐.”
“넌 헤라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어.”
“아, 그건 적들이 그렇게 부르더라구요.”
태훈은 임기응변으로 대처했다.
“그래? 그럼 넌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제가 당신을요? 전 오늘 처음 보는데요. 신을 마주할 기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니야, 넌 나를 처음 보는 순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아는 사람 대하듯 했어.”
태훈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자칫하다간 자신의 환생 비밀을 알게 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불이익을 당할 것이 뻔했다.
최악의 경우 소멸이 되거나 전생의 기억이 삭제당할 수도 있었다.
태훈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그녀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그의 등에서 다시 한번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어. 4급으로 있었을 때 일부 영혼이 천국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
덜컥-
그 순간 방문이 열렸다.
뒤로 돌아보니 알과 유리아가 서 있었다.
“담화 중에 죄송합니다! 급히 전할 말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응, 아니야. 괜찮아.”
태훈은 알과 유리아가 대견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정말 타이밍을 잘 맞춘 흐름 끊기였다.
하지만 알과 유리아의 얼굴이 사색이 된 것을 보고 이내 얼굴이 굳었다.
“무슨 일이야?”
“조금 전 제국의 수도가 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뭐? 놈들이 얀 제국을 친 거야?”
국경 방어선을 경유하지 않고 얀 제국에 가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였다.
터널을 파거나 산맥을 넘어야 했다.
하지만 산이 워낙 험중하고 길기 때문에 터널을 파는 것은 불가능한 일.
그렇다고 산맥을 타고 가자니 이 겨울에는 날아가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다.
그러자 유리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공격받은 곳은 얀 제국이 아니라…….”
윺리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겠는지 말끝을 흘렸다.
그것을 알이 이어받았다.
“……세레니스 제국의 수도가 공격받았습니다. 현재 제국 수도와 모든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
지형상 유리한 수성 입장에 있었던 공국 요새는 피해가 미미했다.
최일선에 있던 병사들의 사상자를 합쳐도 100명이 되지 않았다.
반면 적 언데드 군단의 시체는 합이 1만이 넘었고 마장기도 3대나 격파했기에 대승이었다.
하지만 다른 지역은 아니었다.
나머지 요새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중 한 곳은 차후 수성이 불가능할 것 같아 병력 증원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보내왔다.
나머지 두 곳 역시 사상자가 많아 침울한 분위기였다고 했다.
그 소식에 요새는 일순간 승리의 기쁨이 깨져 버렸다.
거기에 또 한 가지 소식이 요새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진정하십시오! 정찰병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 이곳에서 병력을 빼면 저들이 노리는 데로 움직이는 겁니다!”
사람들은 불같이 날뛰는 태훈을 막아서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세레니스 제국의 수도에서 공격을 받고 있다는 연락이 단거리 마법으로 전해져 온 후 소식이 두절된 것이다.
“이거 놔! 나 혼자라도 가겠어!”
신은 그런 태훈을 넌지시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저 자에 대해서 아는 걸 말해봐.’
물의 정령왕은 자신이 아는 것을 모두 설명했다.
다 듣고 난 그녀는 물의 정령왕과 이어진 정신을 끊었다.
‘저승에 있었을 당시 들은 게 있지. 불법적으로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로 환생해서 그 지식을 이용해 포인트를 모은다는 것. 정말이었나.’
모든 정황으로 보아 그녀는 이미 태훈을 그러한 사례로 결론짓고 있었다.
사실 그것만으로 보자면 그녀 입장에서 그의 존재가 나쁠 것은 없었다.
세계를 이롭게 하고 인명을 구하면 얻을 수 있는 포인트.
그것은 자신의 세계 평가를 올리는 일이었다.
다만 그것이 발각될 경우 단순한 처벌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
일례로 불법 환생에 가담했던 자들이나 그렇게 환생했던 자들은 정기적으로 찾아내고 있었다.
일전에 태훈이 환생을 기다리다 보았던 문신을 한 자들이 그러한 예였다.
저승에 있었을 당시 그녀의 동료 신이 그러한 단속반의 일원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태훈에게 다가갔다.
“어이.”
“뭡니까. 당장…….”
“움직이지 마라.”
스윽-
여신은 손바닥을 내보이며 태훈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마치 공항의 보안 검색을 하듯 한번 훑은 그녀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아악!”
고통에 찬 비명 소리.
“허억!”
“무슨 짓을!”
그 순간 사방에서 기겁하며 한 발 물러섰다.
알과 유리아.
그리고 검을 가진 자는 급히 검을 뽑아 들며 그녀에게 겨누었다.
“무슨 짓인가!”
“네년! 적과 한패인가!”
살기등등한 검끝에도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 안에 든 것을 바라보았다.
태훈은 쓰러져 있다가 그녀에게 달려들 것 같은 부하들을 제지했다.
“너, 이거 어디서 났냐.”
“그……. 그것은.”
그녀는 쭈그려 앉았다.
쓰러져 얼굴 한쪽을 부여잡고 있는 태훈에게 손안에 든 것을 내밀었다.
“솔직히 말해. 나도 거기 있었으니까. 이거 여기 물건 아니지?”
“…….”
이미 뽑혀 버린 태훈의 한쪽 눈.
저승에서 막대한 거금을 들여 얻은 마족의 눈이었다.
그것이 뽑혀 그녀의 손에 놓여 있었고 뽑힌 자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끄덕끄덕-
태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 순간 그녀의 손안에 있던 눈알이 불타올랐다.
“안 돼!”
태훈이 급히 그녀의 손에 있던 것을 빼앗으려 했지만 이미 눈알은 재가 되어 사라진 뒤였다.
“이놈! 무슨 짓이냐!”
“저자를 당장 끌어내! 적의 첩자다!”
태훈은 다시 한번 그들을 말렸다.
그러곤 다른 사람들을 방에서 내보낸 뒤 문을 걸어 잠갔다.
“무슨 짓입니까?! 그것은…….”
“됐고. 그 눈에 대해서 말해봐. 한 치라도 네 녀석 말에 거짓이 섞인다면 난 바로 알 수 있으니까 거짓말은 안 하는 게 좋아. 만약 제대로 말하지 않는다면 널 이 자리에서 바로 소멸시키겠다.”
그는 난감해졌다.
진실을 말하자니 후환이 두려웠고 거짓을 말하자니 그것도 뒷감당이 힘들었다.
결국 그는 진실을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듣고 난 그녀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것에 그런 능력이 있었다고?”
“마족의 눈을 얻는 순간 확실히 능력을 더 담을 수 있었습니다.”
“풋, 그 눈은 마족의 눈 따위가 아니다.”
“그럼 무슨…….”
“누군가 만든 인공적인 물건이지. 그리고 네 말을 들어보니 네 녀석에게 저것을 심어준 녀석도 그놈들과 한패인 것 같군.”
“뭐라고요?”
순간 태훈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다.
그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자 그녀가 말했다.
“피나 지혈하며 들어. 그건 마족의 눈 따위가 아니야. 아무런 능력도 없는 단순한 도구다. 네놈에게 물건을 주었다는 놈과 불법 환생을 주선했다는 놈은 아마 저승에서 쫓고 있는 놈들일 거다.”
“그러면 늘어난 능력은 어떻게 설명이 됩니까?”
“길거리 마술에 특별한 것이 있나? 그저 눈속임이지. 말해봐라. 지금 네 능력 중 사라진 것이 있는가?”
태훈은 그녀의 말대로 급히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안구가 뽑힌 자리에 신력을 사용해 치료를 하고 마법과 오리진의 사용도 가능했다.
그녀의 오라도 보였고 다른 능력들도 멀쩡하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놈들은 모든 차원에 손을 뻗고 있다고 들었지. 저승에서도 상당히 골치고. 그런 놈들이니 저승사자 녀석들과 거래를 튼 놈들도 있을 거다.”
“이럴 수가…….”
“아마 네가 많은 포인트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그런 물건을 말도 안 되는 가격에 판 거겠지.”
“이 안구의 포인트는 그럼…….”
“네가 지금 상대하고 있는 놈들 중 왕좌에 앉아 있는 놈에게 갔을 거다.”
태훈은 처음 가면을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제가 불법 환생을 했다는 걸 알고 찾아왔던 거군요.”
“뭐 그런 거지. 넌 스스로 자신의 지갑을 남들에게 자랑한 꼴이었을 게다.”
“하…….”
태훈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낙심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그는 이내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를 수도로 보내주십시오. 신이니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왜?”
“거기엔 제 아내가 있습니다. 임신도 한 상태구요. 당장 가야 합니다.”
“불가능해. 난 지금 신의 능력을 쓸 수 없어.”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상에 현신할 때 인간의 형상을 하게 되면 그녀에게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고 했다.
힘도 일정 부분만 가져올 수 있고 그것을 모두 소진하면 당분간 회복 기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은 아무런 쓸모도 없다는 겁니까?”
“말조심해라. 아무리 힘이 없다 한들 너 하나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놈들 전부는 모두 소멸시킬 수 있어. 뭐 당분간 꼼짝도 못하겠지만.”
“그럼 됐습니다. 도움은 필요 없으니.”
태훈은 천을 찾아 안대를 만들었다.
뽑힌 안구를 가린 그는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어이, 잠깐만. 내 이야기 아직 안 끝났어.”
그녀는 태훈을 다시 불러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