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네 녀석이 왜 여기에…….”
들쳐 업혀진 헤라도 당황한 듯한 느낌이었다.
까만 깃털 옷을 입은 자의 입에서 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선을 넘는 바람에 이곳의 신이 낌새를 눈치챘다. 그분께선 노하셨고.”
“젠장, 그럼 그냥 놔둬. 저년만큼은…….”
“너 때문에 그분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텐데. 그 책임을 내가 질 순 없지.”
퍽-
“큭…….”
까만 옷의 가면은 헤라의 뒷덜미를 내려쳤다.
헤라의 몸이 축 늘어지자 자세를 고쳐잡았다.
“오늘은 여기서 물러가지.”
가면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신의 모습이 사라졌다.
“누구 맘대로?”
가면의 뒤에 나타난 신은 주먹을 내리꽂았다.
콰앙-!
산산히 부서지는 지면.
다시 한번 충격파가 일대를 덮쳤다.
파편을 밟고 공중에 서 있는 가면이 말했다.
“이곳의 신이여. 조만간 그분께서 직접 찾아갈 것이다.”
그 말을 남기고 가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쳇.”
신은 혀를 찼다.
어느새 신의 모습은 바뀌어져 있었다.
희미하게 빛나던 금발은 평범한 갈색 머리로 바뀌어 있었다.
느껴지던 신비감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가면이 사라진 하늘 쪽을 한번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자 태훈과 눈이 마주쳤다.
“어이, 거기 네 녀석.”
“저 말입니까?”
“여기 너 말고 누가 더 있어?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줘야겠다.”
그녀는 태훈에게로 다가왔다.
그때 주위에 있던 언데드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사라지자 마장기 때문에 물러나 있던 언데드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
“이 잡것들이. 아무리 약해졌다고 해도 고작 언데드 따위가.”
그녀는 짜증 나는 목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얘들아, 나 피곤하다. 처리해.”
그러자 순식간에 거대한 골렘이 나타났다.
온몸이 흙빛으로 빛나는 골렘은 마장기만큼이나 컸다.
- 명을 받들겠습니다.
골렘에게서 흘러나오는 굵직한 목소리.
골렘이 땅을 내려치자 땅에서 토창들이 솟아났다.
토창들은 정확하게 언데드들의 머리를 관통.
적의 마장기에도 거대한 토창이 뻗어져 나갔다.
콰앙-
마장기의 방어 마법진이 한순간 소멸하며 토창이 마장기의 가슴을 관통했다.
주륵-
신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듯 피를 닦았다.
태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아군은 물러간 뒤.
주위에서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골렘이 땅을 친 것 한 번으로 일대의 모든 적군이 궤멸한 것이다.
“이 정도면 됐어. 돌아가.”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주인이시여.”
골렘의 몸이 부서지며 흙으로 돌아갔다.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한 여자가 태훈에게 다가왔다.
“방해꾼도 없으니 이야기 좀 들어볼까?”
여자가 다가오자 뮤즈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표정은 없었지만 여자와 태훈의 사이를 가로막아 섰다.
뮤즈를 바라보던 여자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아하, 네가 그 혼종이구나. 보고는 받았지. 그렇다면 네가 이 녀석의 주인이로군? 꽤나 재밌는 이야기가 되겠어?”
여자는 뮤즈를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다.
뮤즈가 검을 소환해 여자에게 겨누려는 순간 여자의 입에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꿇어.”
쿵-
뮤즈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마치 무언가가 짓누르는 듯한 모양새였다.
‘언령…….’
주륵-
다시 한번 여자의 입가에서 피가 흘렀다.
“아이 씨, 피곤해 죽겠는데.”
“크윽.”
뮤즈는 일어서려 했지만 팔조차 펴기 힘든 듯했다.
“뮤즈. 됐어. 돌아가 있어.”
스윽-
뮤즈의 모습이 사라졌다.
“자, 방해꾼도 모두 사라졌다. 오붓하게 대화해 볼까?”
“죄송하지만 지금은 전투 중입니다. 아직 싸움이 끝나지…….”
“쟤들은 살길 찾아가는 것 같은데?”
그녀의 말대로 적은 물러가고 있었다.
한순간에 언데드의 태반과 출격했던 마장기들이 모두 당해 버리자 겁을 먹은 것 같았다.
거기에 자신들의 지휘관들이 사라졌으니 혼선이 있는 듯했다.
“그럼 요새로 가시죠. 모시겠습니다.”
여자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쳐들었다.
앞장서라는 뜻이었다.
* * *
까만 깃털의 가면과 헤라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건물의 내부였다.
알렉 일행들이 발견하여 침투했던 그 탑이었다.
마법진이 그려진 방에 나타난 둘.
가면은 헤라를 바닥에 짐짝 버리듯 내려놓았다.
그러곤 한 층 아래로 내려가며 따라오라 지시했다.
헤라가 절뚝거리며 따라 내려가니 그곳엔 또 다른 마법진이 있었다.
“올라가라.”
“이대로 가면 난 죽은 목숨이야. 갈 수 없어.”
그러자 가면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꺾었다.
“그러기 위해 널 데려온 것이다. 네 죄를 내가 뒤집어쓸 순 없지 않나.”
“기다려. 적어도 만회할 만한 기회는 달라고.”
“이미 그분도 신의 개입을 눈치채셨다. 기회를 달라 하려거든 그분한테 직접 부탁드려라.”
가면이 헤라의 멱살을 끌고 마법진에 올라서자 마법진이 빛났다.
그리고 둘이 나타난 곳은 정원.
가면은 헤라를 끌고 가 거대한 나무 기둥 앞에 내동댕이쳤다.
그러곤 나무 기둥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앉았다.
“주인이시여. 헤라를 끌고 왔나이다.”
“으흠, 그래. 수고했어.”
나무 뒤에서 들려오는 앳된 목소리.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저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헤라의 독단이었습니다.”
“알고 있어. 일을 맡긴 것도 나니까. 넌 돌아가.”
“감사합니다.”
가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뒤에 있던 동굴로 들어갔다.
헤라는 넘어진 상태로 고개도 못 들고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작게 떨리고 있었다.
“흥분했던 모양이네?”
“죄, 죄송합니다.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한 번만 주십시오!”
헤라는 엎드려 빌었다.
한때 추앙받던 신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
“나를 만나고 나서 뭔가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인가?”
“주인님을 만나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또 올림푸스의 어리석은 녀석들과는 다른 삶에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지금 네 모습을 봐봐. 당장 눈앞의 상황만을 인지하고 나대는 것이 꼭 어린아이 같잖아.”
“그, 그것은…….”
헤라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그녀의 높은 자존심은 예나 지금이나 같았고 그것이 이번 일을 그르치게 했다.
“만회할 기회를 주신다면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네 영혼을 태워서라도?”
“주인님의 도구로 쓰일 수 있다면야 기꺼이…….”
“크크크, 또 마음에도 없는 소리한다. 내가 널 모를까 봐?”
“…….”
“넌 너만의 목적이 있잖아. 그렇지? 그러니 내 밑에 있는 거고.”
“……네, 그렇습니다.”
“뭐 좋아. 이번엔 눈감아줄게. 어차피 한 번은 부딪혀야 했으니까. 대신 벌은 받아야겠지?”
부스럭.
자리에서 일어나는 듯한 풀 소리.
기둥 뒤에서 나타난 아이는 헤라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손에서 희미한 빛이 나자 그녀의 온몸에 문신이 생겨났다.
“예속의 주문……. 구태여 왜 이런 것을.”
“종속 상대는 내가 아니야. 세레니스 제국으로 가도록 해.”
“그곳에는 그놈의 부하였던……. 설마 그 녀석의 종이 된 건가요?”
“그 정도 벌은 받아야지? 그 녀석을 도와 임무를 완수해. 그럼 풀어줄 테니까.”
“큭……. 알겠습니다.”
헤라가 대답을 하고 난 뒤 고개를 들었을 때 정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 * *
요새로 돌아오는 길.
사방에 언데드의 시체가 있었다.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
두두두두-
요새 쪽에서 먼지가 일었다.
잠잠해진 분위기를 감지한 마법사들의 의견으로 정찰조가 태훈을 찾기 위해 나온 것.
선두에는 알이 있었다.
“무사하셨군요!”
“어, 그래…….”
“어떻게 된 겁니까? 사태는 마무리된 건가요?”
“어, 적의 지휘관이 도망갔어. 나머지도 철수한 모양이고.”
“역시 왕자님이 해결하신 거군요. 모두 걱정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계신 분은……?”
그녀에게선 더 이상 신비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평범한 인간과 별다를 것이 없는 상황.
그리고 그녀는 어느새 쥐색의 로브를 입고 있었다.
“이쪽은…….”
꼬집-
등에서 아픔이 전해져 오자 태훈은 말을 돌렸다.
“나를 도와준 마법사. 일전에 알고 지냈는데 이번에 도와주러 왔다고 하더라고.”
“반가워…… 요. 린다예요.”
그녀의 어색한 미소에 알은 속아 넘어가는 듯했다.
“그렇군요. 각하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당한 실력자이신 듯하시군요.”
알은 데리고 온 말을 내어주었다.
말은 한 필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태훈과 그녀가 같은 말을 타야 했다.
알과 병사들이 호위하며 요새로 돌아갈 때 그녀가 말했다.
“물의 아이로부터 소식은 들었다만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해 봐.”
“문을 열려는 자들이 제국 하나를 앞세워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내려주신 신탁 덕분에 연합군이 결성되어 그들을 막아내기로 했고 오늘이 첫 전투였습니다.”
“언데드들은?”
“일전에 그 조직에 소속된 흑마법사와 대면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자들이 인간을 희생시켜 만든 것 같습니다.”
덧붙여 태훈은 그자들이 사람들을 인신매매하던 정황도 말해주었다.
“예전에는 언데드화 시키려고 그런 게 아닌가 싶었는데 저렇게 대량으로 인간을 희생시킬 수 있었다면 그럴 목적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혹시 짚이시는 게 있습니까?”
“신기.”
“네?”
“신기를 만드는 데에는 특정 인간들이 제물로 필요해.”
“…….”
신기가 인간들을 재료로 한다는 말에 태훈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둘의 대화는 말발굽 소리에 가려져 주위에서 호위하는 자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요새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든 사령관.
최전방에서 막강한 적과 싸우고 승리하자 적군은 퇴각.
그들에게 태훈은 첫 전투의 승리를 주도한 영웅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각하.”
“각하가 실력자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태훈이 테라스에서 뛰어내려 박차고 날아오르는 것을 본 각국의 지휘관들은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리고 알처럼 같이 온 여성에 대해 질문했다.
태훈은 그녀가 은둔 마법사라 둘러대고 그녀를 데리고 집무실로 들어왔다.
“피곤해서 좀 쉬고 싶어. 당분간 아무도 들이지 마.”
“그럼 정리는 제가 할까요?”
“어, 그래 맡길게.”
태훈이 방문을 닫자 알은 잠시 문 앞에 서 있었다.
왜 같이 온 여성은 방에서 내보내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던 찰나.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그는 방이 있는 통로 쪽 입구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유리아에게 절대 방에 들어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
방 안에서는 브리핑이 이어졌다.
“이야기는 그게 다인가?”
“네, 그렇습니다.”
“뭐 누군가 문을 열려고 한다라는 사실에서 바뀐 건 없군.”
“제가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뭔가?”
“왜 이제야 개입을 하신 겁니까? 좀 더 일찍 나서실 수도 있었을 텐데요.”
태훈은 그녀가 살짝 원망스러웠다.
누군가 문을 다시 열려고 한다라는 보고는 진즉에 들어갔을 터.
좀 더 일찍이 직접 나섰다면 구태여 전쟁까지 벌어지지도 않았을 일이었다.
그런데 신의 대답은 의외였다.
“귀찮잖아.”
“네? 지금 뭐라고……?”
“귀찮다고. 내가 그렇게 할 일이 없어 보이나?”
그 말에 태훈은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