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신.
그것도 지구의 신이 나타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화악-
헤라의 머리 위에서 돌고 있던 먹구름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언제 흐렸냐는 듯 맑아진 하늘.
그리고 하늘엔 두 개의 태양이 있었다.
이글거리는 노란빛.
크기는 작았지만 분명한 태양이었다.
“농담이지……?”
태훈은 실소를 터뜨렸다.
아무리 신이라지만 태양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새하얀 눈밭이었던 일대가 일순간 녹아내린 눈으로 인해 질퍽이기 시작했다.
헤라는 한껏 들뜬 듯한 표정이었다.
“이 일대와 함께 날려주마.”
헤라가 손으로 지면을 가리키자 구체가 움직였다.
태훈은 구체와 정면상에 있었다.
구체가 태훈이나 지면에 닿으면 괴멸적인 위력을 낼 것이란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겨우 여기까진가.’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일대만 날아가든.
아니면 자칫 전 세계가 자멸할지는 모르는 일.
100억이라는 포인트를 모으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온 과거가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구체를 막아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몸 상태가 완벽했어도 막아낼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았다.
태훈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만나왔던 사람들의 얼굴이 지나갔다.
마지막에 떠오른 것은 자신의 아내 레이첼이었다.
‘이것이 주마등이란 건가.’
잠깐의 정적.
태훈은 기괴한 폭발음을 기대했다.
하지만 정적은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죽은 건가?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그는 감았던 눈을 떴다.
구체는 눈앞에 멈춰 있었다.
그리고 구체와 자신의 사이에 한 여인이 있었다.
“쓰읍, 누구야, 이런 걸 만들어낸 빌어먹을 녀석이.”
금발의 여성.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정장 차림.
태훈은 그녀의 등을 보고 있었다.
여자는 한 손으로 구체를 막아내고 있었다.
솨아악-
마치 청소기에 빨려들어 가듯 구체는 여인의 손으로 빨려들어 갔다.
구체는 사라지고 고요한 정적만이 남았다.
“누…… 누구냐!”
하늘에서 헤라가 악에 받친 목소리를 내었다.
하늘을 본 정장 차림의 여인이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이런 돼먹지도 않은 걸 만들어 낸 것이 너냐?”
“이년이! 넌 대체 누구…….”
슈욱-
그 순간 정장 차림의 여인의 모습이 사라졌다.
태훈의 앞에 있던 그녀가 다시 나타난 곳은 헤라의 등 뒤.
조금 더 높은 곳에 나타난 여자는 발을 높이 치켜 올렸다.
“아……?”
“돼먹지도 않은 놈.”
퍼억!
정장 여인의 발꿈치가 헤라의 정수리를 내려찍었다.
헤라의 몸뚱이는 순식간에 지면에 처박히며 사방으로 충격파가 퍼져 나갔다.
압도적인 피지컬.
헤라는 피를 토하며 바닥에 처박혔다.
정장의 여인은 다시 땅으로 내려왔다.
그러곤 땅에 처박혀 힘들게 숨을 쉬고 있는 헤라를 향해 걸어갔다.
“어디서 나타난 꼴통이냐. 난 내 세계에 다른 신을 만든 기억이 없는데.”
“네, 네놈은…… 이곳의 신인가.”
“그러는 너는 누구냐? 왜 남의 세상을 망쳐놓으려는 거야?”
두 여자의 대화를 듣고 있던 태훈은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언젠가 물의 정령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기도 신은 있네.’
그 신으로 추정되는 여인이 나타났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당신이 이곳의 신이오?”
“음?”
정장 차림의 여인이 태훈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제야 태훈은 여인의 앞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안경을 낀 금발의 서구 여인.
태훈은 그녀가 낯이 익었다.
‘뭐지? 어디서 봤던 적이 있는 건가?’
차림이 지구의 현대적인 복장이어서 그런 것일까 생각도 해보았다.
이내 그는 먼 옛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아아앗!”
태훈은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무례하군. 감히 손가락질을 하다니.”
“기억났어. 당신이 왜 여기에……?”
“나랑 구면인가?”
여인은 헤라를 무시한 채 태훈에게로 다가왔다.
그러곤 고개를 내밀며 안경을 고쳐 썼다.
태훈의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본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 기억에 없는 상판때기인데.”
“날 몰라?”
태훈은 순간 아차 싶었다.
그녀를 본 것은 지구에서 살던 때의 모습.
그리고 자신은 그녀 앞에선 범법자라는 것을 떠올렸다.
순간 입을 다물었지만 여인의 표정은 미묘했다.
“나를 아는가?”
“그……. 그럴 리가요. 처음 뵙습니다.”
“방금 전까지 나를 아는 눈치던데.”
“…….”
태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순간 뒤쪽에서 헤라가 반쯤 파묻혔던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을 본 정장의 여인은 다시 몸을 돌렸다.
“좀 있다가 다시 이야기하자.”
헤라를 향해 걸어간 그녀는 구둣발로 헤라의 가슴을 밟아 무너뜨렸다.
“감히 내 세계를 엉망으로 만들려고 해? 간덩이가 부었구나.”
“큭, 이곳의 신은 그분이 막아주신다고 했는데.”
그 말에 정장의 여인의 관자놀이가 꿈틀거렸다.
“무슨 소리야. 누가 날 막아? 네 주인이 뭔데 나를 막냐고?”
구둣발에 힘을 주자 헤라가 비명을 질렀다.
“넌 보아하니 4급신이구나. 어떻게 내 세계로 굴러들어 왔는지 설명해 보실까?”
정장의 여인은 섬뜩하게 웃었다.
* * *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을 때 이변을 가장 빨리 눈치챈 것은 상아탑의 마법사들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막대한 마나가 빨려들어 가는 것을 보며 그들은 금기의 마법이 실현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상아탑에서 전해지는 금기의 마법은 9클래스의 마법 두 개.
마법사들은 그 둘 중 하나가 발현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전투에 참가해 있던 알이 옆에 있던 마법사에게 방어가 가능하냐고 물었다.
마법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어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오. 이건 한번 발동하면 막을 수 없는 마법이오.”
저 멀리서 총국의 원로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음……. 금기의 마법이라는 것이 있소.”
상아탑 마법사의 설명을 들은 총국의 원로는 큰 충격에 빠졌다.
충격에 빠진 것은 곁에 있던 지휘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왕자님 혼자서 적을 상대하고 계신 건가?’
알은 다급해졌다.
그는 태훈이 명실상부한 지상 최강자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범위에 한해서였다.
“혹시 신께서 직접 나선 것은 아니겠소?”
지휘관 중 하나가 희망 섞인 말을 내놓았다.
신탁을 내린 것도 신이었으니 신이 직접 행차했을 경우도 있었다.
“설사 그렇다고 한들 저 마나의 양은……. 아무리 못해도 이 일대는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이오.”
“신이 나타났다면 필히 내가 알아챘을 텐데…….”
마법사와 원로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말하자 지휘관은 주저앉았다.
알은 태훈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그가 부재중인 지금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당장 도망친다면?”
“도망친다 하더라도 휘말릴 것이오.”
“그럼 모두 요새로 피하시오! 당장!”
요새에는 태훈이 설치한 대마법 방어 결계가 있었다.
당장 믿을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 순간 하늘의 먹구름이 사라지며 하나의 태양이 나타난 것을 보았다.
“오오오, 저것은 태양인가!”
“감탄할 때가 아닙니다! 당장 요새로 도망치시오!”
알의 부르짖음을 들은 연합군은 꽁지가 빠져라 요새로 향했다.
구체가 낙하하기 시작하는 것을 본 원로는 도망치다 말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신관들도 원로를 따라 걸음을 멈추고 기도를 시작했다.
그것을 보며 다른 사람들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구체가 시선에서 사라지자 사람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자 수근거렸다.
“뭡니까? 엄청난 파괴력이라 하지 않았소?”
“나도 당황스럽소.”
갑자기 사라진 구체와 마나의 파동에 마법사들은 당황했다.
그리고 바로 덮쳐오는 충격파.
신의 공격을 받고 땅에 처박힌 헤라에서 나오는 충격파였다.
충격파는 일반 병사들을 주저앉거나 날아가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게 시작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충격파 다음으로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설마 왕자님이 해내신 건가.’
알은 태훈에게 일말의 희망을 걸었다.
그라면 해결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연합군이나 오그리아 제국군이나 숨을 죽이고 있는 그 시각.
헤라는 연신 두들겨 맞는 중이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싸움이 아닌 그냥 일반인의 일방적인 구타를 보는 느낌이었다.
“말해. 누가 이곳으로 오는 길을 열어준 거야?”
“크윽, 말할 성싶으냐.”
헤라는 연신 양쪽으로 손바닥 세례를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버텼다.
뺨을 맞을 때마다 작은 충격파가 퍼질 정도였다.
그 모습에 자칭 신이라는 여인은 더욱 매섭게 뺨을 후려쳤다.
“오호, 그 배짱만은 인정해 주지. 4급이라지만 신다운 깡은 있구나.”
더욱 휘몰아치는 신의 손바닥.
태훈은 정말 헤라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가장 깊숙한 배후를 밝힐 수 있는 존재를 잃을 수는 없었다.
“헤라, 그만 당신의 배후를 밝혀.”
보다 못한 태훈이 헤라를 설득하려 했다.
그 순간 신의 손바닥이 멈추었다.
“헤라?”
신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그러곤 헤라를 유심히 쳐다보더니 이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지구의 신 중 하나인 헤라인가? 문이 열린 날에 파면당한?”
‘문이 열린 날?’ 태훈은 신의 말에서 한 문구에 신경이 쓰였다.
헤라는 그 말을 듣고 눈살이 찌푸려졌다.
“크윽, 설마 날 아는 건가.”
“알다마다. 나도 지구 출신인걸. 당신 지구 출신 신들 사이에서 꽤 유명하다고.”
그 순간 태훈은 안경잡이 여자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스 출신!’
구 신과 현 신이 애매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현 신이 과거 자신이 받들던 구 신을 마구잡이로 패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너……. 지구의 어디 출신이냐.”
“스파르타 출신이다.”
“이런 발칙한! 그럼 당장 머리를 조아리지 못할까!”
헤라는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고함을 질렀다.
자존심이 많이 상한 듯싶었다.
하지만 현 신은 그만두는 대신 다시 한번 뺨을 내려쳤다.
그러곤 헤라를 집어 던졌다.
절벽에 부딪히며 헤라의 몸이 땅으로 고꾸라졌다.
“옛날이나 나한테 신이었지. 지금 당신은 내 밑이야. 분수를 알아야지 어디서 큰 소리야.”
“큭!”
헤라는 비틀거리며 일어서더니 공중으로 도약했다.
신이 뒤따라오자 언령을 이용해 그녀를 속박하려 했다.
하지만 신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하도 맞아서 머리가 이상해졌나. 4급 따위의 언령이 나한테 통할 리 없잖아.”
다시 한번 발길질에 땅으로 처박히는 헤라.
땅에 처박힌 헤라는 하늘을 보며 허탈해했다.
그런 헤라의 시선에 다시 한번 신의 얼굴이 보였다.
“보아하니 네 녀석을 여기에 넣어준 게 그날 너희들이 지도자로 불렀던 녀석이냐. 그 녀석이 다시 나타난 게로군?”
“죽여.”
“그날 도망쳤던 녀석들에게는 수배령이 떨어졌지. 너를 넘기면 내 승진에 도움이 되겠어.”
헤라는 웃으며 헤라의 멱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헤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다.
그러곤 멀찍이 떨어진 곳에 나타났다.
신은 기분이 나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자꾸 한 마리씩 꾸역꾸역 기어 나오는 거야. 넌 또 누구냐?”
시선을 돌린 곳에는 헤라를 들쳐 메고 있는 가면의 인물이 있었다.
까만 깃털로 된 풍성한 옷을 입은 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