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둘은 왔던 쪽으로 몸을 돌렸다.
들어왔던 창문으로 다시 나가는 수밖에 없었기에 다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따각따각-
반대쪽에서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자 둘은 화들짝 놀라며 걸음을 멈추었다.
통로는 회전형으로 사방이 막혀 있는 구조였다.
마주치는 것을 피하려면 다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호아킨이 눈짓하자 알렉은 몸을 돌렸다.
다시 테라스가 있는 쪽으로 급히 움직였다.
쿵-
테라스가 있는 공간으로 나오던 찰나 알렉이 누군가와 부딪혔다.
상대는 귀품 있어 보이는 고급 옷을 입은 귀족으로 보였다.
“누……. 크헉!”
촤악-
알렉이 당황하는 사이 상대의 몸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어느새 온몸이 비늘로 뒤덮인 호아킨이 손을 썼던 것.
남자를 벤 것은 검이 아니라 길게 자라나 있는 손등의 비늘이었다.
호아킨은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는 반대쪽에서 올라오는 자를 기다렸다.
이내 병사 하나가 나타나자 그 역시 베어 넘긴 호아킨은 알렉을 재촉했다.
“서둘러. 최대한 빨리.”
알렉은 아무 말 없이 호아킨의 뒤를 따랐다.
들어왔던 창문에 다다르자 호아킨은 자신에게 업히라고 했다.
“업히라니? 네 등에?”
“서둘러!”
알렉은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호아킨의 등에 업혔다.
호아킨의 양어깨를 잡는 순간 큰 덩치는 망설임 없이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슈와아악!
매서운 바람이 귓가에서 들려왔다.
영락없이 추락사할 것 같았던 찰나에 호아킨의 등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촤악-
거대한 날개.
털이 없는 박쥐의 날개와 비슷한 것이 펼쳐지자 둘의 몸은 활강하기 시작했다.
“나…… 날개가 있었어? 그럼 왜 벽을 기어 올라간 거야.”
“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활강이 고작이야.”
새하얀 설원 위에 펼친 검은 날개는 모두의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지상의 누군가가 발견한 듯 발아래가 시끄러워졌다.
“충격에 대비해라.”
지상과 가까워지자 호아킨이 충고했다.
잠시 후 둘은 눈 위에 착지했지만 미끄러지면서 나동그라졌다.
눈에 파묻혔던 알렉을 도와 끌어 올려준 것은 역시나 호아킨이었다.
“주, 죽는 줄 알았네.”
“어서 움직여. 놈들이 눈치챘다.”
그들이 떨어진 곳은 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멀리서 적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오그리아 제국의 복장을 한 것으로 보아 언데드는 아니었다.
잠시 후 고함 소리와 함께 화살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둘은 필사적으로 눈을 헤치며 나아갔다.
바깥의 소란에 헤라는 탑의 테라스로 몸을 내밀었다.
“뭐야?”
“적의 정찰병으로 보입니다.”
“쥐새끼들이 여기까지 들어온 거야?”
“죄송합니다. 즉시 제거하겠습니다.”
가면을 쓴 자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
둘은 추적을 따돌리며 출발했던 장소로 향했다.
이내 도착한 곳에 홉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홉스는 먼저 간 건가.”
“소란이 일어난 걸 보고 그랬을 수도 있지.”
둘은 홉스를 원망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추격대는 포기한 건가?”
“눈이 그쳤기 때문에 우리 흔적이 그대로 남았다. 금방 쫓아올 게 분명해.”
“놈들이 움직이는군.”
어느새 모두 기상한 언데드 무리가 새까만 물결처럼 보였다.
그때 인기척을 느낀 둘이 양옆으로 몸을 날렸다.
푹- 푹-
둘이 서 있던 자리에 뭔가가 날아들었다.
뒤이어 날아드는 물체는 쳐냈다.
챙챙챙-
호아킨은 비늘이 뒤덮인 손으로 방어했고 알렉은 검을 뽑아 휘둘렀다.
알렉의 검은 날아드는 물체를 모두 막아내기가 벅찼는지 검을 중심으로 붉은 막이 펼쳐졌다.
붉은 마나로 된 막이 펼쳐지자 물체들은 허공에서 튕겨져 나갔다.
마치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듯 허공의 검은 그림자가 쏜살같이 알렉에게로 향했다.
알렉은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검끝에 무언가가 닿는 느낌은 없었다.
대신 그의 양어깨의 옷이 찢겨졌다.
촤악-
붉은 선혈이 눈 위로 뿌려지며 눈을 녹였다.
“크윽!”
알렉이 한쪽 무릎을 꿇자 그를 치고 지나갔던 검은 물체가 방향을 바꿔 그의 목덜미를 노렸다.
호아킨이 알렉을 막아서며 날아든 물체를 몸으로 막아섰다.
퍼억-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새?’
자신을 덮치려 했던 것을 본 알렉은 놀라워했다.
새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틀림없는 사람이었다.
“흐읍!”
호아킨이 힘을 주며 내동댕이치자 상대는 눈 위를 글렀다. 내동댕이치자 상대는 눈 위를 굴렀다.
눈 위를 구른 적을 보며 호기심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웃긴 녀석이군. 몬스터인가 사람인가.”
“그러는 네 녀석은 뭐 하는 놈이냐.”
서로가 처음 보는 생김새를 가지고 있으니 둘은 거리를 두었다.
“드래고니안이다.”
“드래고니안? 그런 종족이 있던가.”
가면을 쓴 새 인간이 다시 날아오르려 하자 알렉이 품에 있던 단검을 던졌다.
상대는 날아올라 뒤로 더 물러섰다.
“괜찮나?”
“이 정도쯤……. 크윽…….”
알렉은 밀려오는 현기증에 다시 무릎을 꿇었다.
살펴보니 알렉의 양어깨의 베인 상처가 거뭇거뭇했다.
“크흐흐흐, 내 발톱의 독은 10분을 넘기기 힘들다고.”
“혼자서 치료할 수 있겠나.”
알렉은 고개를 끄덕였다.
명색이 성기사였고 신력을 쓸 수 있는 만큼 독을 중화시킬 수 있었다.
알렉이 스스로에게 신력을 쓰자 상대는 혀를 찼다.
“쳇, 성기사였나.”
주위에는 새의 형상을 한 인간 말고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호아킨이 검지를 까딱거렸다.
“와라, 너라도 전리품으로 가져가야겠다.”
발끈한 상대는 다시 한번 날아올랐다.
날카로운 발톱을 앞세워 호아킨의 어깨를 노렸다.
발톱 몇 개가 비늘을 피해 어깨를 파고들었다.
푸욱-
“크흐흐흐, 내 독에 중독되어 죽어라.”
덥썩-
호아킨은 재빨리 상대의 발목을 붙잡았다.
얇은 새의 다리가 그의 손에 잡혔다.
“흐읍!”
두둑-
호아킨이 힘을 주자 상대의 얇은 발목에서 뼈가 비명을 질렀다.
엄청난 고통을 느낀 가면은 기를 쓰고 날아올랐다.
호아킨의 거대한 몸뚱이가 공중에 뜨기 시작했다.
가면의 발톱과 어깨의 뼈가 부딪히며 딱딱한 소리가 들렸다.
어깨를 후벼 파는 발톱에도 호아킨은 손등의 비늘로 사정없이 상대의 다리를 난도질했다.
“크으으윽! 이 자식이!”
참다못한 새 가면은 상대를 놓으려 했다.
하지만 호아킨의 손은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러곤 이내 다리를 붙잡고 타고 오르자 새 가면은 당황했다.
이리저리 몸을 흔들어 떨어뜨리려 했지만 호아킨의 악력이 더 강했다.
“이 찰거머리 같은 자식!”
당황한 새 가면은 그를 데리고 절벽으로 향했다.
절벽에 부딪히게 하려는 듯 보였다.
호아킨은 허리힘을 이용해 거꾸로 매달렸다.
그러곤 다리로 새 가면의 허리를 감싸듯 휘어잡았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통증에 새 가면이 휘청였다.
여세를 몰아 상체를 일으켜 두 팔로 새 가면의 얼굴을 잡았다.
“뭐……. 뭐 하는…….”
휘릭-
우두둑-
호아킨은 녀석의 머리를 돌려 버렸다.
동공이 풀린 새 가면의 날갯짓이 멈추자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호아킨은 재빨리 떨어져 자신의 날개를 펼쳤다.
적은 눈 위로 드러나 있던 바닥에 부딪히며 머리가 부서졌다.
다시 눈 위로 구르며 착지한 호아킨은 머리가 깨진 적을 한번 쳐다보고는 알렉에게 다가갔다.
알렉은 막 독을 정화한 참이었다.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알렉은 호아킨을 향해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어깨가 저려오는군.”
호아킨은 알렉의 옆에 주저앉았다.
살펴보니 어깨의 뼈가 드러날 정도였다.
알렉은 급히 신력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추격대가 오기 전에 서둘러 치료를 끝내야 했다.
“무지막지한 싸움법이군. 너희 종족 남자들은 전부 그렇게 싸우는 건가?”
서둘러 치료를 마친 뒤 둘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둘은 매우 지쳐 있었다.
탑을 기어오르고 전투를 벌인 뒤 치료까지 하느라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 뒤였다.
어느새 자신들이 숨어 지내던 동굴 근처까지 도달했다.
잠시 숨을 돌리고 있을 때 호아킨이 입을 열었다.
“먼저 가. 난 좀 더 쉬어야겠어.”
“혼자서 추격대를 상대하는 건 무리야.”
의중을 파악한 알렉은 단호히 거절했다.
호아킨은 말없이 상의의 가슴 부분을 열어젖혔다.
가슴에 발톱 자국이 찍힌 것이 보였다.
알렉은 다시 신력을 쓰려 다가갔지만 호아킨이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이미 심장으로 독이 스며들었어. 발끝에 감각이 없군.”
알렉의 신력으로는 독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우는 소리 그만해. 걸을 수 없다면 업고서라도 가겠어.”
“무슨 수로 나 같은 덩치를 업겠다는 거야?”
그 말에 한순간 알렉은 말문이 막혔다.
자신보다 큰 덩치를 가진 호아킨을 업고 설산을 걷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 썰매는 어때?”
머리 위에서 들리는 소리에 둘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위 위에서 홉스가 무릎을 굽히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다듬어진 나무가 있었다.
“먼저 가지 않은 건가?”
“섭섭하네. 혼자 가면 욕먹는다고. 우리는 그렇게 의리가 얄팍하지 않아.”
홉스는 바위에서 내려와 눈 위에 나무를 내려놓았다.
11 자 형태로 놓은 다음 끈을 이용해 두 나무를 이어 그물처럼 만들었다.
즉석 간이 들것이었다.
“여기 누우면 우리 둘이서 끌고 갈 수 있어. 눈 위고 두 사람이니 충분해.”
의기양양해 하는 모습을 보며 호아킨은 몸을 일으켜 들것에 누웠다.
각자 양끝의 나무를 잡은 두 사람은 걷기 시작했다.
“어째서 먼저 가지 않은 거지?”
“신호를 주기로 했는데 주지 않았잖아. 그리고 쫓기는 걸 보고 온전히 돌아오기는 글렀다 싶었지.”
“그래서 준비한 건가?”
“내가 살던 곳도 추운 곳이었거든. 겨울 산에서 부상자가 발생하면 종종 이렇게 대처해.”
홉스는 호아킨의 다리 쪽에 나뭇가지를 매달았다.
침엽수의 이파리가 자라있었기에 그들이 지나간 흔적을 지워 줄 수 있었다.
간이 들것은 눈 위를 미끄러지듯 이동했기에 두 사람으로도 충분히 호아킨을 옮길 수 있었다.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도 알렉은 호아킨의 상태를 살폈다.
독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지만 독이 퍼지는 것을 늦출 수는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목숨 걸고 살핀 보람은 있었나?”
“아아, 필요한 것은 전부 봤어. 이제 보고만 하면 돼.”
입에서 하얀 입김을 뿜으며 둘은 열심히 움직였다.
간혹 호아킨이 처리한 새 가면 말고 다른 개체가 하늘을 날며 주위를 살폈다.
그럴 때마다 세 명은 눈 속에 파묻혀 적의 시선을 피했다.
‘가볍게 봤는데 생가보다 의리가 있군.’
그런 생각으로 홉스를 보던 알렉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 방금 그 눈빛. 의리 없이 튈 줄 알았다고 생각했지?”
“……독심술이라도 배운 건가?”
“그런 건 배운 적 없어. 난 어릴 때부터 10남매 중 막내였지. 눈치로 먹고 살아남은 남자라고.”
그렇게 꼬박 이틀을 움직인 끝에 그들은 공국령의 경계에 다다를 수 있었다.
경계에서 순찰 중이던 병사들을 만난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군.”
“뭘, 나중에 술이나 한잔하자고.”
홉스는 등 뒤로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떴다.
알렉은 호아킨을 따라 신관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