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모두가 왔던 길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발자국이 나 있는 곳을 되밟으며 돌아가려는 찰나 매서운 강풍이 몰아쳤다.
휘청-
성기사의 몸이 기울어졌다.
눈 덮인 땅 위로 넘어지려 하자 성기사는 눈앞이 아찔했다.
순간 성기사의 몸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드래고니안 중 한 명이 성기사의 뒷덜미를 잡아챈 것.
성기사가 몸을 제대로 가누자 뒷덜미를 놔주었다.
“고, 고마워.”
“안심하긴 일러. 조심해서 나가자.”
처음 탑을 보았을 때의 위치로 돌아온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위 뒤로 몸을 숨긴 그들은 원을 그리고 앉았다.
“저 언데드들은 대체 뭐지?”
“우리도 아는 게 없어.”
“놈들의 군복을 봤어. 유바와 헬렌 놈들 군복이었던 것 같은데.”
“두 왕국이 오그리아와 맞붙은 건가?”
“그랬으면 싸움터는 이곳이 아니라 반대쪽이었을 거야. 그리고 시체들이 전부 언데드화라니. 이상하잖아.”
모두의 시선이 성기사에게 쏠렸다.
언데드와 연관이 있는 직업군은 그 뿐이었다.
“이럴 줄 알고 그쪽을 포함시킨 건가?”
“부정은 못하겠지만 나도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저 탑과 관련이 있는 건 분명해 보이는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들의 임무는 적군의 동향을 감시하는 것.
성기사의 임무는 마법진의 탐색이었지만 다른 이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며칠 버틸 식량은 충분해. 방한 장비도 가져왔고.”
“그러면 며칠 머물면서 지켜보도록 하지. 일단 우리 쪽 한 명과 그쪽 한 명은 오늘 본 것을 전달하고.”
이 날씨에 혼자서 이동하는 것은 다소 위험한 감이 있었다.
드래고니안 한 명과 공국군 병사 한 명이 본 것을 전하기로 했다.
남은 세 명은 눈보라를 피하기 위해 동굴을 찾았다.
드래고니안은 익숙하게 눈 덮인 산속에서 동굴을 찾았다.
익숙하게 모닥불을 피우자 성기사가 감탄해했다.
“익숙해 보이는군.”
“우리가 살던 곳이랑 환경이 비슷하니까.”
동굴이 넓진 않았기에 드레고니안의 비늘이 가까이에서 보였다.
모닥불에 반짝여 보석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성기사가 드래고니안을 유심히 살폈다.
시선을 느낀 드래고니안이 고개를 들자 서로가 눈이 마주쳤다.
“신기한가?”
“미안하군. 본의 아니게 그만.”
“뭐, 이젠 익숙해.”
“통성명도 하지 않았군. 알렝 드롱이라고 해.”
머쓱해진 성기사가 손을 내밀었다.
“호아킨이다.”
호아킨이 그 손을 맞잡으며 대답했다.
“알렉이라고 불러도 좋아.”
알렉이 공국군 병사에게도 손을 내밀자 공국군 병사도 손을 내밀며 자신을 홉스라고 소개했다.
“둘은 알고 지내던 사이인가?”
“안 지는 얼마 안 됐어. 우리도 공국에 정착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홉스는 호아킨과 요새에서 지내면서 일면식이 있었다.
“산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은데 눈보라가 언제쯤 그칠 것 같은가?”
“겨울이고 지대가 높아. 앞으로 이틀은 이 상태일 거다.”
“그러고 보니 둘은 사연이 있지 않나?”
홉스가 눈치 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드래고니안의 저주는 총국을 통해 내려진 신탁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정설이었다.
성기사가 눈치를 보며 마른입에 침을 묻혔다.
하지만 드래고니안은 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선조가 저지른 일이니까. 부정할 생각은 없어.”
“신탁이 내려온 이상 우리도 과거 일에는 연연해하지 않아.”
“그러지 말고 이야기 좀 해줘.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남자들끼리 오순도순 껴안고 있을 것도 아니고.”
“구태여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있나. 그리고 둘은 일면식이 있다면서 여태 몰랐던 건가?”
“공국에 와서 한가롭게 대화할 여유는 없었어. 오자마자 피똥 싸게 산을 파냈으니까.”
홉스는 지루한 듯 둘을 재촉했다.
알렉은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호아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선조들이 고대 마도 왕국과 함께 신의 권능에 도전했지. 천 년도 전에 말이야.”
“그 비늘…….”
“우리가 누구인지 잊지 않게 해주는 선조들의 증거지. 아름답지 않나?”
호아킨이 넌지시 웃었다.
홉스는 궁금한 것이 많은 듯했다.
“듣기로는 커다란 도마뱀 형상이었다고 하는데.”
“나도 우리의 참 모습을 몰라. 이번 신탁만 잘 이행하면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홉스의 시선이 알렉에게로 옮겨갔다.
네 차례라는 듯한 눈치였다.
부담스러워 그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홉스가 놓아줄 리 없었다.
“이야깃거리 좀 없어?”
“그럼 뭐, 신에 대한 믿음이란 주제로…….”
“먼 길을 와서 그런지 오늘은 너무 피곤하네. 누가 먼저 불침번 설래?”
홉스의 태도가 돌변했다.
알렉은 입술을 한번 먹었다가 이내 일어섰다.
“……내가 하지.”
“그럼 내가 두 번째로 하지.”
호아킨이 두 번째로 나서자 홉스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불침번은 첫 번째이거나 마지막이 좋았다.
알렉은 옷깃을 여미고 밖으로 나왔다.
세찬 눈보라 사이로 멀리 탑이 보였다.
‘저기에 있을 확률이 높은데.’
알렉의 머릿속에 원로의 말이 메아리쳤다.
어느새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굴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다시 굴로 돌아온 알렉은 입구 쪽에 앉아 불씨를 뒤적였다.
어느새 둘은 눈을 감고 암벽에 기대어 있었다.
그는 품에서 물건을 끄집어냈다.
손바닥 보다 조금 큰 책.
투박해 보이는 가죽 를 펼치자 색 바랜 종이가 나타났다.
종이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는 다시 품속에서 뭔가를 끄집어냈다.
부드러운 천에 꽁꽁 싸매진 것은 가공된 목탄이었다.
그가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건 뭔가?”
어느새 눈을 뜬 호아킨이 알렉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깨 있었어?”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리길래.”
“아, 내가 깨운 건가. 미안.”
알렉은 다시 목탄을 천으로 감싸려 했다.
그러자 호아킨은 그냥 하던 걸 계속하라며 말렸다.
“그래서 그건 뭔가?”
“음, 뭐 기록서 같은 건가.”
“임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내가 그냥 쓰는 거야.”
“뭐 하러 그런 걸 쓰는 건가?”
“음, 글쎄. 성기사 수업을 받을 때부터 썼는데 쓰기 시작한 이유는 까먹었어.”
“무슨 내용인가.”
“뭐 그냥 평범한 일상부터 맡았던 임무 등등…….”
“물려주기라도 할 건가?”
“성기사는 결혼을 할 수 없어. 그냥 자기만족 같은 거지.”
호아킨은 잠시 알렉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후 목탄이 다 닳은 듯 알렉은 아쉬운 듯 손을 털었다.
책에 줄을 두르고 품에 넣은 알렉이 모닥불을 뒤적였다.
다 탄 숯을 꺼내 식혀 목탄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었다.
“나가서 장작이 될 만한 걸 찾아볼게.”
그가 밖으로 나가자 호아킨은 숯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 * *
연합군이 창설된 직후 파케 영애는 헤이링 황자와 함께 얀 제국으로 향했다.
한파가 몰아칠 때 도착한 얀 제국은 설국이었다.
파케 영애는 얀 제국의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도시 전체가 증기로 뒤덮여 있던 것.
비단 다른 도시도 한겨울에는 땔감을 때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곳곳에 있는 금속 배관이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
“저것들은 대체 뭔가요?”
“저건 보일러라고 하는 것입니다. 추운 날에도 항상 집 안을 따듯하게 해주죠.”
“마법은……. 아니겠죠?”
“궁금한 것이 많으시군요. 곧 차차 알게 되실 겁니다.”
헤이링 황자는 웃으며 그녀를 학술 협회관으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헤이링 황자는 나이가 지긋한 노인을 소개했다.
“공학기술자인 얀드로 공이오.”
“얀드로? 얀드로 에스크?”
파케 영애는 노인의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다.
연금술 저서 중에 가장 최근 것이 있다면 거의 대부분 얀드로라는 저자를 가지고 있었다.
“허허, 숙녀분이 내 이름을 알고 있다니 부끄럽군.”
“얀드로 님은 연금사가 아니었나요? 공학기술자라는 게…….”
“음, 뭐 연금사나 공학사나 크게 다른 의미는 없네.”
“사망하셨다고 알고 있었는데요.”
“올해 90이 넘었지. 어쨌든 만나서 반갑군.”
“아, 파케라고 합니다.”
영애는 급히 노인이 내민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파케? 혹시 내가 알고 있는 파케인가?”
“네, 저희 증조부께선 연금사이셨습니다. 아시나요?”
“알다마다. 한때 라이벌이었던 사람을 기억 못 할 리 없지. 비운이 겹쳐 그렇게 갔지만 그의 실력은 출중했어.”
그 말에 파케 영애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헤이링 황자는 그녀에게 몇 가지 물건을 넘겨주었다.
“당분간 이곳에서 얀드로 공과 함께 공학 기술을 배우도록 해요. 얀드로 공. 이쪽은 이번에 우리와 같이 일하게 된 레드크로스 상단의 연금사입니다.”
“오, 그 소문의. 기대가 크구만.”
노인의 웃음에 영애는 난감해했다.
자신이 알기로 얀드로와 자신의 연금 지식은 하늘과 땅 차이.
얀드로는 최후의 연금사라 불릴 정도로 유명했던 인물이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파케 영애는 얀드로에게 많은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연금술은 물론 공학이라는 학문을 보고 들으며 배웠다.
며칠 되지 않아 연금술과 공학은 닭과 알 같은 관계라는 것을 알고 스스로 습득해 나갔다.
얀드로는 흡족해하며 본론을 꺼냈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은 철마네.”
“철마?”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마차지. 말로는 끌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거야.”
얀 제국의 증기기관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었다.
원료가 되는 검은 물을 얀 제국에서는 악마의 피라고 불렀다.
석유를 발견한 땅은 오염이 되어 아무것도 살게 되지 못했던 것.
그리고 원유로 낼 수 있는 화력은 오래갔지만 약했다.
“그럼 악마의 피를 연금술로 가공하는 건가요?”
“이해가 빠르군. 나는 그 악마의 피를 가장 기본적인 단위로 나눠보려고 하네.”
얀드로는 영애를 자신의 실험실로 안내했다.
거기엔 거대한 금속 물체가 있었다.
파케 영애는 그것이 보일러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이건 보일러와 비슷하네요.”
“맞아. 원래는 이게 보일러의 프로토 타입이지. 본래 연금술이라는 것이 부수고 가열하는 것이 기본이지 않나.”
얀드로는 원유를 가열하여 기본적인 단위로 바꾸어 보려고 했다.
“그래서 성공하셨나요?”
“물처럼 공기로 변하더군. 헌데 악마의 피를 가열해서 나오는 바람은 인간에게 해로워. 몇 번 희생자가 나와서 연구를 중단했네.”
이미 물을 가열했다가 식히면 다시 물로 돌아온다는 것은 연금술의 기본.
파케는 얀드로와 함께 기계를 다시 설계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에 파케는 의욕이 남달랐다.
우선 기계의 결함을 찾아야 했다.
유독한 증기가 새어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견고한 금속으로 기계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헤이링 황자는 노예 드워프들까지 동원시켜 둘의 연구를 지원했다.
설계를 돕던 파케가 얀드로에게 물었다.
“그런데 악마의 피는 어디서 나오는 거죠?”
“듣기로는 여기보다 더 북쪽이라던데.”
“여기보다 더 북쪽이면 얼음으로 뒤덮인 곳 아닌가요?”
“그 얼음 아래 악마가 봉인되었다는 소문이 있어. 우리는 그걸 뽑아 쓴다고 하더군.”
“악마…….”
파케는 태훈의 부탁을 떠올렸다.
악마의 피가 나오는 곳의 위치와 그것을 끌어 올리는 기계를 유심히 봐달라고 한 부탁이었다.
“언제 한번 구경해 볼 수 있을까요?”
“어렵지는 않을 거야. 한번 부탁해 보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