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헤라가 나간 뒤 공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치 자신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행동과 말투에 신뢰가 가질 않았다.
그녀가 나가자 같이 있던 귀족이 옆으로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저 여자는 제정신이 아닙니다. 이 추위에 저런 옷을 입고 있는 것도 그렇고 인간 같지가 않습니다.”
“언데드들을 통솔하는 자다. 제대로 된 인간일 리 없지.”
“제가 조용히 처리할까요?”
“그럼 그것들은 누가 통솔하고?”
공작도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데리고 있는 언데드 군단들이 적으로 돌아서면 그것도 큰일이었다.
“따라온 총국 놈들도 눈이 돌아갔어. 자네도 보지 않았나. 언데드들을 막아낼 방법이 없어.”
“…….”
“지금은 조용히 있게. 때가 올 거야.”
* * *
연합군 사령관으로 추대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태훈은 무덤덤했다.
귀찮은 일을 떠맡게 되었지만 나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55만의 병력과 부수적으로 따르는 막대한 전력을 이용할 수 있었다.
상대가 신기를 가지고 있는 자라면 뮤즈와 함께 나서면 그만.
병력의 열세만이 유일한 약점이었던 그에게 더는 약점이 없었다.
‘이제 이것만 개발하면 상대가 어떤 식으로 나와도 괜찮아.’
태훈은 마지막 도장 작업을 하고 있었다.
아무드와 남부연합의 전재에서 보았던 무한 궤도.
태훈은 마나석을 동력으로 하는 전차 형태의 무기를 만들고 있었다.
정확히는 자주포였다.
파케 영애는 오그리아 제국으로 떠나기 전 태훈이 주문한 것을 완성시켰다.
안정화 된 다이너마이트.
태훈이 개발한 자주포는 그것을 쏘아 날리는 것이었다.
무한 궤도는 마나석과 마나 회로를 이용해 움직이는 방식.
포신에도 마나회로가 그려지면서 3클래스 윈드 서클 마법이 발동하게 되어 있었다.
윈드 서클을 이용해 포신에서는 나무통을 쏘아 올린다.
전차 내부에서는 나무통을 쏘아 올리기 전 통 밖으로 꼭지처럼 나와 있는 다이너마이트의 심지에 불을 붙인다.
나무통에는 쇳조각과 다이너 마이트가 담겨 있었다.
태훈은 시제기로 이러한 자주포를 만들었다.
문제는 마나석과 마나회로 때문에 많은 자본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탑승자 4명 중 2명이 마법사여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알은 한 대의 건조 비용과 유지 비용을 듣고선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석유의 존재와 증기기관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앞으로는 비용과 시간을 줄이는 것이 가능했다.
콰드드드득-
요새 한 켠에 있던 석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어둠 속에서 드러난 전차.
크기는 짐마차 4대를 병렬로 붙여 놓은 것보다 컸다.
외관은 전체적으로 하얀색 도장을 한 뒤에 곳곳에 마법 회로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시험 발사 준비가 끝났네.”
구레드르는 태훈에게 열쇠를 넘겨주었다.
전차 내부로 들어간 태훈은 마나 회로에 손을 얹었다.
위이이잉-
몸체 곳곳에 그려진 마나회로에 희미한 빛이 돌기 시작했다.
이 구경을 하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 있던 사람들이 수근거렸다.
쿠르르르-
천천히 움직이는 전차.
아무드 왕국에서 만들었던 변종형 보다는 속도가 느렸다.
요새의 정문을 지나 밖으로 나간 전차가 멈추어섰다.
요새 앞으로는 내리막길이 있었고 내리막이 끝나는 곳에는 좁은 공터가 길게 나 있었다.
조종석에서 포실로 옮겨간 태훈은 구레드르가 준 열쇠로 잠겨 있던 약실의 문을 열었다.
약실은 하나가 아니라 리볼버 형태로 4개의 구멍이 있었다.
그곳에 나무통을 채워넣은 그는 심지에 불을 붙이고 약실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옆에 있던 마나회로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포신에 그려져 있던 마나 회로에 빛이 스며들었다.
퉁퉁퉁퉁-
둔탁한 압력음과 함께 4개의 나무통이 하늘로 쏘아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나무통은 5킬로미터 정도를 날아갔다.
쾅- 쾅-
쾅- 쾅-
나무통들은 땅에서 10여 미터 떨어진 허공에서 순차적으로 폭발했다.
사람들은 큰 폭발 소리에 감탄을 금치 않았다.
드래고니안 종족 몇 명이 언덕 아래로 다가갔다.
그러곤 세워져 있던 허수아비의 기둥을 뽑아 돌아왔다.
그들이 내려놓은 허수아비에는 갑옷이 입혀져 있었다.
사람들은 너덜너덜해진 갑옷들을 보며 놀라워했다.
풀메이트 갑옷은 관통하지 못했지만 다른 허수아비에는 쇳조각들이 박혀 있었다.
“오오, 갑옷을 뚫어버린 건가?”
“이 정도면 화살이 무의미하겠는데.”
폭발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는 짓이겨진 갑옷들을 본 태훈도 만족스러워했다.
살상 능력은 5, 6클래스 마법과 비슷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구테드르 씨.”
“다른 건 필요 없고 쉴 수 있는 시간과 술이면 충분해.”
“3일간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구레드르는 엄지를 한번 들어 보였다.
전차가 다시 격납고 안으로 들어갔다.
“폐하, 오늘 저녁에 1진이 도착합니다.”
“규모는?”
“세레니스의 5만 병력입니다.”
“하긴 이 겨울에 그 정도면 충분하지. 더 받아줄 공간도 없고.”
요새의 규모가 크지 않았다.
연합군 병력의 규모를 들은 직후 태훈의 고민은 그 병력을 어디에 수용하느냐였다.
땅이 얼어 진지 공사를 할 곳도 없었다.
그래서 내놓은 차선책은 분산 배치.
세레니스로 들어가는 길목은 공국령 말고도 세 곳이 더 있었다.
공국령 요새를 포함하면 네 곳.
그중 태훈이 있는 곳이 가장 험한 길목에 위치해 있었다.
태훈은 연합군 15만 병력을 받기로 했다.
그것도 요새의 최대 수용 한도가 넘어 10만 명은 야산 곳곳에 분산해서 배치해야 했다.
“5만 병력이면 이곳을 방어하긴 충분합니다. 100만 대군이 온다 한들 이곳은 버티겠죠.”
“날개가 달리지 않고서야 산을 넘어올 순 없겠지.”
그날 저녁.
세레니스 제국군 5만 명이 도착했다.
지형이 지형이니만큼 병과는 전부 경장갑 보병이었다.
“세레니스 제국 제3보병사단입니다.”
“제3보병사단이면 서부군 소속이었나?”
태훈은 얼마 전 있었던 쿠데타 사건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하필 서부군 소속 병단을 여기에 배치한 이유가 뭘까?”
“그들 대부분은 상관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움직였다고는 하나 반란군 오명을 피할 순 없었을 겁니다.”
“제일 험한 곳에 보내서 충성심을 증명하라 이건가.”
그의 머릿속으로 바스테리온 공작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5만의 병력과 그들이 사용할 물자가 도착하자 요새는 순식간에 가득 찼다.
그들 말고도 얀 제국과 다른 왕국들 병력을 포함한 10만의 병력은 요새 뒤로 있는 산속에 주둔지를 마련하기로 했다.
“보병사단장입니다.”
알이 데리고 온 지휘관은 젊은 인물이었다.
그는 기사 출신이었고 쿠데타가 있던 날까지 일개 장교였다.
그는 서부군 사령관의 눈밖에 난 자였기에 사전 모의에서 제외되었던 자.
덕분에 반군으로 처형당하는 일을 당하지 않고 바로 사단장까지 올라가는 행운을 누렸다.
“이름은?”
“그렉 놀스라고 합니다. 연합군 사령관이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축하만 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
뻘쭘해진 사단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군을 통솔하는 데 있어 문제가 될 만한 일은 있나?”
“없습니다. 제국과 연합군을 위해 언제라도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각오는 좋군. 이곳에 머무르면서 다툼은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시켜 주게.”
“알겠습니다.”
?
세레니스 군이 온 다음 날은 얀 제국의 병사들이 도착했다.
이들 병력 역시 5만.
고대 아시아 복식의 장비를 가진 그들도 전부 경보병이었고, 도 형태의 무기를 들고 있었다.
예정대로 그들은 요새의 후방에 위치한 산악 지형에 배치되었다.
세레니스와 얀의 마장기도 속속이 도착했다.
그리고 연합군 병력이 도착한 지 보름째 되던 날 마지막으로 상아탑의 마법사들이 도착하면서 병력 구성이 끝났다.
좁은 협곡길을 15만이 넘는 병력과 7기의 마장기가 지키고 있자니 난공불락의 모습이었다.
“봄이 되기 전에 한번 제국을 다녀오시는 건 어떠십니까?”
“얼마 전에 갔다 왔잖아. 황자 만나러.”
“바로 당일날 돌아오셨잖습니까. 바빠지기 전에 백작가에 들르심이.”
“이 시국에 사령관이 자리를 비우면 되겠어?”
“그것도 그렇군요.”
“됐고 총국에서 온 원로나 불러와.”
그의 부름에 총국에서 신관들을 데리고 온 원로가 그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대신관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며 직접 소개장까지 써준 인물이었다.
“이야기는 들으셨겠죠?”
“네, 최우선 과제를 부여받았습니다.”
그가 말하는 최우선 과제란 마법진의 발견과 발동을 막는 것이었다.
“마지막 마법진은 아마도 오그리아 제국령에 있을 겁니다. 정확한 위치 파악을 위해 정보원을 보낼 생각입니다만.”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다른 누군가를 보내기엔 위험합니다.”
“말씀은 고맙지만 이 겨울에 원로님께서는 건강을 살피시는 것이 최선입니다. 마땅한 인물을 추천해 주시죠.”
원로는 자신의 심복인 성기사 한 명을 소개시켰다.
그렇게 정찰을 위한 특공대가 조직되었다.
드래고니안 2명과 지금은 공국 병사가 된 오그리아의 탈주병 2명.
그리고 성기사 한 명으로 총 다섯 명이었다.
특공대는 적 병력의 동향과 진의 위치 추적이 임무였다.
요새를 떠난 특공대는 아무 말 없이 걸었다.
그러다 오그리아 제국의 국경에 도착하고 나서는 심상찮은 부위기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저건 뭐지?”
마법진에 대해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자들은 높게 솟아난 탑을 보고 의아해 했다.
“저게 대체 뭡니까?”
“나도 모릅니다. 우리가 떠나올 때 저런 건 보지 못했습니다.”
탈주병은 처음 보는 것이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성기사만이 그 모양새를 보고 추리할 뿐이었다.
하지만 성기사도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눈발이 날려 이상한 탑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어디선가 느껴져 오는 기분 나쁜 느낌.
하지만 흩날리는 눈발 때문에 확인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더 전진하나?”
드래고니안의 말에 탈주병은 고개를 저었다.
“놈들도 전쟁을 준비하는 놈들인데 국경 경비를 늘렸을 게 분명해. 섣불리 움직이면 들킬게 뻔해.”
“하지만 안쪽으로 들어가려면 이 날씨를 이용해야 해.”
성기사는 탑의 근처로 가고 싶어 했다.
다른 사람들을 꺼림칙해했으나 성기사가 강력히 요구하자 그러기로 했다.
그들은 산에서 내려와 오그리아 국경 쪽으로 조심히 다가갔다.
어렴풋이 멀리 있는 군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컹-
쌓인 눈을 밟았던 병사 하나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다른 자들도 뭔가를 밟았는지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얼어붙은 땅에 물컹거리는 느낌은 이질적이었다.
눈을 파헤치던 병사가 황급히 놀랐다.
“시…….시체!”
“쉿!”
드래고니안이 병사의 입을 틀어막았다.
눈 속에는 누군가의 손이 있었다.
드래고니안은 상체를 숙이더니 주위의 다른 눈을 치웠다.
그러자 드러나는 충격적인 모습에 사람들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게 다 뭐야? 왠 시체들이…….”
“이건 시체가 아니야. 언데드다.”
“언데드?”
사람들은 목소리를 죽여가며 소통했다.
눈 밑에는 언데드들이 가수면 상태로 누워 있던 것.
자신들이 언데드 군영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대로 돌아서 나가자고.”
끄덕끄덕-
사람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날씨가 추워 언데드들이 가수면에 있다고는 하지만 자신들을 눈치채면 삽시간에 포위당할 것이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