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신탁을 위해 모인 각국의 수장들은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대륙을 어둠으로 물들이려는 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신의 이름 아래 토벌군을 파견한다.”
대신관의 발표가 있은 뒤 모든 국가들은 상호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수도 백성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신이 아직 인간들을 살핀다는 확신.
그리고 모든 국가가 단합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서부 사령부와 연락이 두절되었고 수도 귀족 몇몇이 보이지 않습니다.”
탁-
부하의 보고를 듣던 피리아는 부채를 접으며 말했다.
“아버님은?”
“조금 전 별장으로 안전하게 모셨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레이첼은 신탁 회의가 열리는 순간에 맞추어 황제를 안전한 거처로 움직이게 했다.
그리고 대신관의 발표가 있자마자 부하가 보고를 해온 것.
“당연히 셋째 오라버니는 황궁에 없겠지?”
“네, 샅샅이 뒤져봤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재미없을 정도로 뻔하게 움직이는 오라버니로군. 준비는?”
“예, 모두 끝마쳤습니다.”
“외부에 알려져선 안 돼. 첫째 오라버니는?”
“황제 폐하와 같이 계십니다.”
“우리도 움직인다.”
피리아는 군 사령부 건물로 찾아갔다.
상황을 전하자 사령부는 쉽게 황녀의 말을 믿었다.
서부 사령부와 연락이 끊긴 것으로 그들도 당황하고 있던 터.
이에 수도를 지키고 있던 중앙군 3만 명은 조심스럽게 수도 외곽으로 향했다.
피리아가 이끄는 병력은 수도 어딘가에 숨어 있을 3황자를 찾아 나섰다.
미리 이야기가 된 바스테리온 공작가의 사병까지 합류했다.
수도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수색이 이루어졌다.
3황자의 편에 붙은 귀족들은 자신들의 계획이 탄로 났음을 눈치챘다.
“막아!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텨야 한다!”
그들은 저택 두 곳에서 자신의 기사들과 고용한 용병들로 방어했다.
외부에서 들어오기로 했던 서부군을 기다리는 듯했다.
숫자에서 압도당한 쿠데타 세력들의 저택 입구는 금세 뚫렸다.
그것을 지켜보던 3황자는 자신들의 심복을 데리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지하실로 내려가자 지하 수로가 나타났다.
“젠장, 어떻게 눈치챈 거지?”
“쳐들어 온 놈들중에 피리아 황녀님 소속인 녀석들이 있었습니다.”
“피리아? 그 녀석이 어떻게 알고 내 계획에 초를 치는 거야?”
3황자는 말을 하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서부군의 움직임도 들켰을 수 있습니다.”
“서부군은 수도 방어 병력의 5배야. 서부군이 들어올 때까지만 몸을 피해 있으면 돼.”
3황자는 잡히지 않고 시간을 벌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수로를 따라가면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준비한 은신처가 나오게 되어 있었다.
뚜벅-
반대편 쪽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누구냐!?”
수호 기사 중 하나가 사람들 앞을 가로막으며 검을 꺼내 들었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상대의 모습을 보자 3황자는 안도의 한숨을 쓸어내렸다.
“젠장, 간 떨어질 뻔햇잖아.”
“그쪽이 3황자요?”
상대는 3황자를 본 것이 처음인 것처럼 물었다.
“내가 3황자다. 너흰 뭘 하다가 이제 나타난거야?”
상대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익숙한 가면이었기에 3황자는 별 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황궁에서 눈치를 챘어. 너희가 좀 나서줘야겠다.”
“그런 지시는 받지 못했소만.”
“뭐?”
3황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애당초 날짜를 앞당겨서까지 거사를 진행시키려고 한 것은 3황자가 아니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쿠데타는 좀 더 먼 훗날에 이루어질 일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쿠데타를 지시했고 명령을 내린 것은 상대였다.
화가 난 3황자 대신 수호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네놈들이 서두르는 바람에 이 사달이 난 거 아닌가!?”
“본인들의 능력 부족을 남에게 돌리지 마시오.”
“너……. 너 이 새끼. 이름이 뭐야?”
수호 기사는 가면의 멱살을 잡았다.
“홀든.”
“네놈 상관이 누구야? 당장 안내해!”
“상관은 이곳에 없소. 대신 이걸 전해주라고 하더군.”
홀든은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수호 기사는 그것을 낚아채고는 3황자에게 전달했다.
3황자는 편지를 펼치더니 이내 손을 떨었다.
팍-
바닥에 구겨진 편지가 내팽개쳐졌다.
그러곤 바닥을 굴러 수로에 빠져 흘러갔다.
“이제 와서 계획을 변경한다니! 이 계획에 동원된 사람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기나 해!?”
수십 명의 귀족들.
서부군의 수많은 장교와 장군들.
모두 구워삶느라 들어간 돈도 상당했다.
“내 알 바 아니오.”
“조, 좋아. 그럼 다른 계획은 뭔데?”
“수도가 어수선한 틈을 타 특정 인물들을 납치할 예정이오.”
“납치? 그런 걸로 황제가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아?”
“황제? 우리의 적은 황제가 아니오만.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시는군.”
“무슨 소리야. 우리 거래를 잊은 건 아니겠지?”
3황자는 계약을 들먹였다.
자신의 황권 쟁탈을 위해 가면의 조직이 도와주기로 한 것.
그를 위해 가면의 조직이 원하는 것들을 들어줬고 알아보지도 못할 계약서에 사인까지 했었다.
“계약은 충실히 지킬 것이오.”
스릉-
홀든이 검을 빼자 수호 기사들과 귀족들의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수십 명의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자 홀든의 검에서 빛이 났다.
‘오러인가?’
빛이 나던 검신은 일순간 채찍처럼 늘어났다.
“뭣!?”
순식간에 빛의 채찍이 어두운 수로에 휘날렸다.
몇 명의 몸뚱어리가 땅으로 흘러내렸다.
토막이 난 시체를 본 귀족들과 3황자는 비명을 지르며 왔던 길로 다시 뛰기 시작했다.
“모두 한 번에 달려들어라!”
살아남은 기사들은 일순간 홀든에게 달려들었다.
채찍이란 무기는 본래 휘두를 공간이 없으면 무용지물이었다.
순식간에 리치를 좁혀 들어간 기사들은 그에게 겸을 겨누었다.
홀든의 검은 다시 원형으로 복귀했다.
‘변형이 가능한 검?!’
다시 검으로 변하는 것을 보며 기사들은 빠르게 손을 휘둘렀다.
챙- 챙-
뒤에서 들려오는 금속의 마찰음을 들으며 황자와 귀족들은 열심히 달렸다.
“황자님. 어……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아무튼 다른 길로 간다!”
자신들이 내려왔던 계단을 지나 걸어가던 정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막다른 곳이 나타났다.
뚜벅- 뚜벅-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떨었다.
그리고 이내 나타난 홀든의 모습에 사람들은 주저앉거나 비명을 질렀다.
“으헉!”
“큭!”
한 칼에 한 명씩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귀족들을 보며 3황자는 주저앉았다.
자신만 남자 3황자는 손을 들어 그가 다가오는 것을 막았다.
“자, 잠깐. 모, 목숨만은 살려줘.”
“누가 보면 죽이기라도 하는 줄 알겠소.”
“그…… 그럼 날 죽이지 않는 건가?”
3황자의 얼굴에 사색이 돌았다.
“우린 계약은 반드시 지키오.”
“그럼 내 부하들은 왜 죽인 거야?”
“어둠의 왕에게 어둠의 족속은 필요하니까.”
그가 검을 거두지 않고 다가오자 3황자의 얼굴이 공포에 물들었다.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잠시 후 짤막한 비명과 함께 수로는 조용해졌다.
?
“찾았나?”
“놓친 것 같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저택 습격 후 몇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지하 수로로 들어가는 입구를 발견하고 추격조가 그 뒤를 쫓았다.
하지만 발견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다량의 혈흔을 찾았습니다.”
“혈흔? 자기들끼리 싸운 건가?”
“그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찾아내! 3황자를 잡아야 일이 끝난다.”
서부군은 수도 외곽에서 수도 방어 병력과 대치 중이었다.
원래대로라면 3황자가 이끄는 귀족들이 그들에게 문을 열어줬어야 했다.
귀족들 대신 나타난 방어 병력을 보고 서부군은 일이 잘못되었음을 눈치챘다.
“어떻게 할까요? 병사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모든 서부군이 쿠데타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주요 직책의 장교와 장군들만이 가담했고 일반 병사들과 하급 장교들은 자신들이 쿠데타에 동참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수도를 방어하는 군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니 제압하러 간다는 대의하에 움직인 그들이었다.
그런데 성벽 위에 황제의 깃발과 군대가 나타났다.
“성벽 위에 5황녀가 나타났습니다.”
사령관이 나가니 5황녀가 성벽 위에 서 있었다.
“나는 제국의 제5황녀인 피리아 세레니스. 제국의 검이자 방패인 서부군은 들으라.”
마법으로 전파된 그녀의 목소리는 전군에 퍼졌다.
“반란을 주모한 3황자는 실패하여 도망쳤다. 황제 폐하와 황태자는 모두 안전한 곳에 계신다.”
잠시 뜸을 들인 뒤 황녀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각국의 국빈들을 볼모로 잡으려했던 반란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그대들은 황제의 권위에 무력으로 도전하고 있다.”
그 말에 서부군은 일순간 술렁였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반란군 세력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속지 마라! 5황녀가 반란을 주도했고 3황자님은 황제 폐하를 지키고 계신다. 우리가 가서 폐하를 구출해야 한다!”
뇌물을 받았던 지휘관들은 동요하는 부하들을 수습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부관이 사령관에게 다가갔다.
“안에서는 실패한 것 아닙니까?”
“3황자만 있다면 상관없어. 어떻게든 빨리 수도로 들어가야 해. 밀어붙여!”
병사들은 명령에 따라 공성전에 들어가려 했다.
서부군의 움직임을 본 황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결의문 발표는 끝이 났고 각국의 귀빈들이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난감하군. 그들이 이 모습을 보면 연합 결성은 파토야.”
이제 막 결의를 결성한 참에 연합의 주축 중 한 곳에서 반란군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은 타격이 컸다.
그리고 그것은 맞수인 얀 제국에게 빌미를 제공하게 될 수도 있었다.
“장군. 대책은?”
“수성을 하며 남부군을 기다려야 합니다.”
“걸리는 시간은?”
“최소 이틀입니다.”
다른 대안을 찾아보던 황녀는 3황자를 놓쳤다는 소식에 암울해졌다.
황녀는 황제에게 이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황제는 최근 들어 노쇠해져 있었다.
이미 두 번이나 심정지가 왔었고 신관들은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었다.
그런 황제가 이 같은 모습을 본다면 쓰러질 수도 있었다.
현 시국에 그것은 큰 문제였다.
하지만 지금 이 사태를 바로 잠재울 수 있는 것은 황제였다.
“어쩔 수 없군. 아버님을 모셔와야겠어.”
“괜찮을까요? 이야기를 들으시는 것만으로도 쓰러지실 수 있습니다.”
“아군끼리 피를 보는 것은 피해야 해. 저들은 자신의 처지를 이해 못 하는 자들이 태반일 것이다. 그리고 얀 제국에게 무능함을 보이는 꼴이 되고 말아.”
“적의 증원입니다!”
그 순간 경계병 중 하나가 큰 소리로 외쳤다.
서부군의 뒤로 먼지가 일고 있었다.
갑작스런 적의 증원에 황녀는 재빨리 황제에게 사람을 보내려 했다.
하지만 뒤에서 나타난 병력에 당황하기는 서부군도 마찬가지였다.
“잠시만요! 저들도 당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쪽 증원인가?”
한참을 지켜보던 경계병이 외쳤다.
“히스렐다 공국의 깃발을 확인!”
그 말에 황녀는 웃음을 지었다.
히스렐다 공국은 거리도 가깝고 본래 그 남자가 몸을 담고 있던 국가이기도 했다.
미리 언질을 줬을 가능성이 컸다.
서부군은 뒤에서 나타난 외국의 병력에 당혹스러웠다.
중간에 껴버린 형국의 서부군은 양쪽을 번갈아 보며 당황했다.
그때 후방의 병력 쪽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히스렐다에서 온 제국군이다. 서부군은 즉시 병력을 철수하라.”
본래 히스렐다 공국은 대규모의 병력이 없었다.
그랬기에 세레니스 제국의 파병 군대가 공국 방위를 맡고 있었다.
황녀의 짐작대로 태훈은 얀 제국의 황제를 만나러 수도에 도착한 즉시 히스렐다로 사람을 보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는 것.
그에 그웬 의원은 자신들과 가깝던 서부군의 진영을 살폈다.
그리고 서부군의 병력이 빠지는 것을 보자 바로 병력을 보낸 것이다.
“히스렐다에 가 있던 병력인 모양입니다. 숫자가 얼마 되지 않으니 저것들을 먼저 제거하시죠.”
“맞습니다. 저 녀석들을 다 합쳐봐야 병력은 5만도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서부군 병사들의 동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