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로텐바르의 말인즉슨.
레드크로스라는 상회는 자신의 동생이 만든 주식회사라는 개념의 상회라는 것.
그런 동생이 사망했으니 지분은 당연히 카나리스의 왕가로 귀속되어야 했다.
하지만 동생의 사망 직후 편지 한 통으로 크로이츠라는 자에게 지분이 이양되었으니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이었다.
사방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로텐바르의 말에는 타당성이 있었었다.
‘이 자리에서 어떻게든 각국의 확답을 받아내야 해.’
잠시 머뭇거리던 알이 입을 열었다.
“저는 로텐바르 님의 동생이자 전 카나리스 3왕자이셨던 메드니안 님의 수호 기사였습니다. 그 점은 로텐바르 님이 증명해 주실 겁니다.”
로텐바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드니안 님이 만든 레드크로스 상단의 설립 취지는 한 국가에 귀속되지 않기 위함입니다. 설립 당시 크로이츠님과 함께 구상을 하셨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유지를 받들 사람은 크로이츠 님이라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증명할 방법이 있소?”
‘이상하군. 로텐바르 님은 왕자님의 위장 죽음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을 텐데.’ 알은 태훈과 피나 왕비의 거래 내용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로텐바르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위장 죽음 직후 모든 것을 이어받은 태훈이 곧 크로이츠라는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중요한 자리에서 딴지를 걸고 넘어지자 당혹스러웠다.
“편지와 제가 보증인이라는 것이 증명하는 모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레드크로스 상회의 임시 주주회의를 요청하는 바요. 그것이 무엇인지는 당신도 잘 아리라 생각하오만. 총지배인 대리.”
탕탕-
대신관이 탁자를 내리치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로텐바르 폐하. 지금 이 자리는 신탁을 향한 총의를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사사로운 이익을 따지자고 모인 자리가 아닙니다.”
“실례했군, 대신관. 하지만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여기 모인 사람들의 선택도 미루어질 수밖에 없을 듯하오만.”
로텐바르의 말처럼 사람들은 찝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상회의 권리는 탐이 나지만 권리의 진짜 주인이 누구냐는 표정이었다.
“크흠, 잠시 쉬는 게 좋겠습니다. 먼 길을 오시느라 피곤들 하실 터이니 마련된 숙소에서 쉬시고 저녁에 다시 모이도록 하죠.”
대신관의 휴식 제의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착 직후 시작된 자리여서 그런지 모두가 휴식에 찬성했다.
알도 한숨을 내쉬고는 맨 마지막으로 방을 나섰다.
“알.”
“로텐바르 폐하.”
복도에서 알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로텐바르였다.
벽을 기대고 서 있던 로텐바르는 턱짓으로 따라오라는 듯한 제스처를 보였다.
둘은 사람이 없는 복도 끝에 도착했다.
“오랜만이군.”
“그렇네요. 왕위에 오르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고맙구. 바로 본론을 말하지. 크로이츠는 메드니안인가?”
그 말에 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메드니안이 정체를 감추고 있는 이유가 어머님과의 약조뿐만이 아니라는 것은 알아.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겠지.”
“……알고 있으시면서 그런 훼방을 놓으신 겁니까?”
그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거칠어져 있었다.
“훼방이라니. 듣기 거북하군.”
“그걸 달리 뭐라고 표현해야 하는 거죠? 대체 왜 이런 짓을…….”
“난 국익을 생각할 뿐이다.”
“여전히 냉철한 성격이시군요. 하지만 이미 지분의 상당량을 가지고 있으시면서 왜 그러시는 겁니까?”
“우리 쪽의 소식은 전혀 듣지 않고 있는 것 같군. 가뭄 소식을 듣지 못했나?”
“지금 저는 상회 사람입니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대륙의 모든 국가는 올해 흉작을 예상했다.
특별한 기후 변화나 해충의 습격이 없었는데도 모든 국가에서의 곡물 교역량이 역대 최저치를 맴돌고 있었다.
태훈이 왕자로 있을 당시 기구라는 물건으로 제노비아와의 협상을 끌어낸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대금의 일부를 식량과 맞바꾼 적이 있을 만큼 카나리스는 식량 생산지로는 최악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가뭄 때문에 지분이 필요해.”
“제노비아에서 식량 원조가 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년 상회 분배금으로도 충분히 식량을 마련할 수 있었을 텐데요.”
“예상외로 식량난이 심각한 수준이다. 거기다 믿고 있던 구황작물도 가망이 없어. 그건 제노비아도 마찬가지다.”
“돈이 있다 한들 곡창지대인 제노비아도 힘들면 식량을 매입할 곳이 없을 텐데요.”
“한 곳에서 제의가 들어왔지. 이번 겨울을 나기 충분한 양으로.”
“그래서 왕자님이 가지고 있는 지분을 원하는 겁니까? 돈이라면 저희 상회에서 빌려 드리죠.”
“그쪽에서 원하는 게 레드크로스 상회의 지분이었다. 그것도 우리가 가진 지분 이상이었어.”
그 말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제의를 해온 곳이 어딥니까?”
“얀 제국이다.”
알은 생각에 잠겼다.
얀 제국은 평야 지대가 많았다.
그렇기에 기마병도 우수했고 농작물의 수확량도 많았다.
‘식량난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식량을 빌미로 지분을 원하고 있는 건가.’
알이 생각에 잠긴 사이 로텐바르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그쪽은 돈과 마나석도 거절했다. 오로지 레드크로스의 상회 지분을 요구하더군.”
“카나리스가 가진 지분이 부족하니 지금 왕자님의 지분을 가져가겠다는 거군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사과는 하지 않겠다. 난 국왕이기에 국익에 도움이 되는 최선의 일을 생각할 뿐이니.”
“그 최선이란 게 왕자님의 처지를 이용해 겁박하려는 겁니까?”
“내가 할 이야기는 여기까지.”
로텐바르는 알을 지나쳐 통로를 걸어갔다.
혼자 남은 알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비단 얀뿐만이 아니라 모든 나라가 상회의 지분을 탐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야. 하지만 얀은 왜 마나석을 요구하지 않은 거지?’
제국 중 한 곳이니 부국이었다.
비단 돈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나석 같은 경우 교역량을 제한하고 있어 돈만 있다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장기와 마나회로의 원동력인 만큼 국력과 직결되는 마나석.
그런 마나석보다 상회 지분을 요구한 것은 의심해 볼 만한 일이었다.
‘혼자선 답이 나오지 않아. 장본인을 만나 봐야겠어.’
알은 그래돌 얀 제국의 대표단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얀 제국은 다른 두 제국과 다른 왕국과 달리 모든 것이 독특했다.
복식이나 음식.
심지어 건축 양식도 독특했고 땅 덩어리는 가장 컸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가죽 갑옷과 관을 쓴 검은 머리의 남자가 문을 열었다.
“크로이츠 공국의 알이라고 합니다.”
“들어오시오.”
문을 연 자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왔다.
알이 들어가자 탁자에 앉은 어린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 자가 얀 제국의 막내 황자인가.’
나이는 고작해야 10세 전후로 어려 보였다.
“알이라고 합니다.”
“어서 오시오, 얀 제국의 11황자인 헤이링이라고 합니다.”
헤이링 황자는 비단으로 된 소매가 긴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알에게 자리를 권했다.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카나리스의 국왕을 만나고 오는 길이겠죠?”
“그렇습니다. 다 아시는 것 같으니 여쭙겠습니다. 왜 마나석보다 상회 지분을 원하는 겁니까?”
“마나석은 우리에게 의미가 없소.”
“의미가 없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알 공은 마나석이 왜 귀하다고 생각하시오?”
“마나석은 병기나 마나 회로에 들어가는 하나뿐인 원료입니다. 마나석의 소유량에 따라 국력이 갈리지요.”
“그렇소. 그게 일반적인 자들의 생각이지.”
‘일반적?’ 알은 의도를 모르겠다는 뜻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헤이링 황자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소매에 가려 보이지 않는 손을 활짝 펼쳤다.
“세상은 돈과 마나석으로 움직인다. 이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죠. 하지만 우리 얀 제국은 다릅니다.”
“다르다니요? 뭐가 다르다는 겁니까?”
“우리는 연금술이 하향 학문으로 취급받을 때부터 계속 투자를 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결실을 보기 시작했죠. 더 이상 마나석은 금보다 귀한 광물이 아닙니다.”
“연금술로 마나석을 대체할 수 있는 자원을 만들 수 있다는 겁니까?”
알은 화들짝 놀랐다.
저 말대로라면 얀 제국은 희대의 발견을 한 것이었다.
헤이링 황자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말장난은 싫어합니다. 그럴 시국도 아니고요. 서로 시간을 아꼈으면 좋겠군요.”
“직접 눈으로 보시는 게 좋겠죠.”
헤이링이 손짓하자 시종인 하나가 큰 상자를 가져왔다.
그것의 안에는 기괴한 모양의 금속 물체가 들어 있었다.
황자는 주전자에 있던 물을 통 모양의 금속 물체에 따랐다.
그리고 부싯돌로 심지 부분에 불을 붙였다.
“이 심지 아래에는 저희가 발견한 검은 물이 들어 있습니다. 이 검은 물은 불이 잘 붙죠.”
“물에 불이 붙는다고요?”
헤이링 황자는 계속 지켜보라는 듯 금속 물체를 가리켰다.
잠시 후 물이 끓어오르는지 물이 담긴 통이 들썩였다.
하지만 통을 덮은 무거운 덮개 때문인지 끓는 소리가 날 뿐 들썩이진 않았다.
잠시 후 뚜껑에 달린 막대기가 움직이면서 막대기 끝에 달린 쇳덩이가 위 아래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 쇳덩이는 다른 쪽 끝에 달린 원형 금속을 움직였는데 마치 마차의 바퀴가 굴러가는 듯했다.
그것을 본 알은 속으로 놀라워했다.
‘마나석은 아니야. 마나석이었다면 어딘가 마나회로가 있어야 하지만 그런 건 없었어.’
“이게 다 뭡니까?”
“음, 알 공은 잘 모르지만 이건 바람으로 움직이는 겁니다.”
“한낱 바람이 어떻게 무거운 쇳덩이를 움직인다는 겁니까?”
“한낱 마나석이 어찌 그 무거운 마장기를 움직일까요? 헌데 획기적인 물건들을 내놓는 레드크로스 상회의 지배인께서 이런 물건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신다는 것이 좀 신기하군요.”
헤이링 황자는 실망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우리 상회의 지분을 원하는 것과 무슨 상관인지?”
“마나석은 미래가 없는 광물입니다. 실제로 카나리스의 마나석 채굴량도 줄어들고 있고요. 앞으로의 시대는 검은 물과 그것으로 일으키는 바람의 것입니다. 한물간 자원은 필요가 없고 우리는 레드크로스 상회의 성장력에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상회를 높게 평가해 주는 것은 감사하지만 지금은 신탁을 우선시해야 할 때입니다.”
“다른 국가들에게는 상회 지분대신 얀 제국에게서 자금을 지불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신탁도 실천하고 저희는 상회 지분을 얻고. 모두가 즐거운 일 아닙니까?”
“으음…….”
“크로이츠 공왕은 자신의 지분을 희생하여 대륙을 위험에서 구하려 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소진될 지분이니 마음에 두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상회의 특성상 공왕님의 지분을 모두 가져가게 되면 실질적인 상회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한곳이 독점하는 것은 그분의 의도에 반하게 됩니다.”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돌아가셔서 공왕님과 상의를 해보시던가 하십시오.”
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잠시 후 열린 회의에서도 이렇다 할 결론을 내지 못했다.
대신관은 며칠의 기한을 두고 천천히 협상을 하자며 제의했다.
당일 회의가 끝나자 알은 대신관과 공작을 찾아갔다.
“자치령에 잠시 다녀와야겠습니다. 공왕님과 상의할 일이 있습니다.”
“얀 제국인가?”
바스테리온 공작이 묻자 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얀 제국 황자의 방으로 가는 것을 보았네. 무슨 이야기를 나눴나?”
“그들은 공왕님의 지분을 모두 원하고 있습니다. 카나리스가 걸고넘어진 것도 얀 제국이 배후에 있었습니다.”
“그렇군. 그런데 지분을 가져가게 되면 상회의 실질적 주인이 되는 것 아닌가?”
“그렇습니다. 다른 나라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금액을 지불하겠다더군요.”
“공왕의 생각을 물으러 가는 거군.”
“그렇습니다.”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관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언제까지고 저들을 이곳에 붙들어둘 수는 없네. 공왕의 대답을 빨리 들어야 하네.”
“최대한 빠르게 다녀오겠습니다.”
알은 해가 졌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말에 올랐다.
그것을 창문 너머로 보고 있던 헤이링 왕자는 웃음을 지으며 커튼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