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총국은 신탁의 내용을 공표했다.
대륙의 모든 생명을 위협하는 자들이 나타났고 이것은 수천 년 전 마도 왕국을 멸망으로 이끌었던 사건의 재현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신탁의 증거로 루세프가 드래고니안의 존재를 증명했다.
드래고니안은 어른부터 아이까지 신에게 미움을 받은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존재까지 앞세워 적들을 막아내라는 신탁이 알려지자 모든 국가는 혼란에 빠졌다.
신탁에서 태훈의 존재는 언급되지 않았다.
세레니스 제국은 총국과 사이가 틀어져 있던 터라 처음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망설였다.
하지만 대신관이 직접 나서 황제와 면담을 하면서 상황은 쉽게 풀어졌다.
바스테리온 공작은 대신관이 전해준 태훈의 비밀 서신을 받았다.
그 후 내부의 첩자들을 색출해 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총국의 신탁을 거짓으로 치부하거나 손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자들의 뒷조사를 시작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 역할을 각 국가의 중앙 신전이 맡았다.
의심되는 정황이 포착되면 성기사와 이단 심문관들이 나섰다.
그로 인해 귀족들과 신전 간의 충돌이 생기며 혼란에 빠졌다.
백성들 사이에서도 혼란이 가중되자 태훈이 나섰다.
판매되고 있던 약을 무료로 배포하거나 의료원의 무료 진료를 진행.
그러면서 신전에 지지 의사를 밝혔다.
신탁과 민생의 지지도를 얻고 있던 레드크로스 상회의 콜라보는 쓸 만했다.
백성들 사이에서 신탁과 신전을 지지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기세를 몰아 총국은 공개적으로 오그리아 제국을 신탁의 대상으로 지목했다.
오그리아는 상관없다는 의사를 대외적으로 내비쳤다.
그러자 신전이 두 제국에게 한 선전포고를 거두고 신탁에 협조하라는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세레니스와 얀 제국은 공개적으로 오그리아를 비판했다.
총국에서도 신탁의 대상이 오그리아를 장악했다고 발표했다.
공공의 적이 정해지자 국가들 간의 단합도 가파르게 진행이 되었다.
총국에서는 오그리아를 제외한 모든 국가에 서신을 띄웠다.
정해진 날짜에 각국의 최고 권위자를 모아 회의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괜찮을까요?”
“뭐가 말인가?”
“아직 내부 정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소집은 너무 이른 게 아닌지.”
대신관을 보필하는 성기사 단장이 우려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단장의 말대로 총국을 비롯해 많은 국가와 단체에서 내부 색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어느 정도 고위층에 있다고 볼 수 있는 자들은 모두 이단심문관의 검증이 필요했다.
“더 늦출 수도 없는 문제네. 시간을 줄수록 상대에게 유리하겠지.”
“저들이 정말 정보력에 있어 탁월하다면 놓치지 않을 겁니다.”
국왕이나 국왕을 대리하는 자들의 모임.
그런 장소에서 만일 사건이 하나라도 터진다면 혼란은 물론 그 국가는 나서기가 곤란해질 것이 분명했다.
일종의 경고성 메시지로도 다가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막기 위해 특별 호위군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각 국가에서 대표 인물을 보내올 때 신경은 많이 쓰는 편이다.
하지만 이번에 세레니스 제국에서는 중앙군과 궁정 기사단에서 특별히 사람을 뽑아 호위를 맡게 되었다.
“정확한 시간과 날짜는 정하셨습니까?”
“그렇네.”
“언제입니까? 만반의 준비를 해놓겠습니다.”
“미안하지만 자네에게도 회담 날짜는 말할 수 없네. 수도 호위에만 신경 써주게.”
“……네, 알겠습니다.”
회담 날짜가 다가올수록 수도의 경비는 삼엄해졌다.
대표단이 도착하는 날짜도 극비로 다뤄지며 긴장감이 흘렀다.
대표단이 입국하는 날에는 마장기까지 동원되어 호위하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오그리아 제국을 제외한 2제국 7왕국이 모인 자리에 대신관이 나섰다.
“모두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더불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일단 신탁의 증거를 내 눈으로 봐야겠소.”
아무드 왕자의 말에 대신관은 루세프를 불렀다.
비늘에 덮인 거구를 본 사람들의 표정이 경악스러워졌다.
거기에 루세프의 등판을 본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고니안이 실존할 줄이야.”
“사안이 얼마나 중대하길래 저주받은 종족까지 나서야 한단 말인가.”
루세프의 눈썹이 꿈틀거렸으나 그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오그리아의 반응은 어떻소?”
“아직 반응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오그리아의 쿠데타 세력이 신탁에 나온 자들의 짓이 확실합니까?”
“의심할 여지가 없지.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고서야 어찌 두 제국에게 싸움을 건단 말인가.”
“신탁에도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럴 것이오.”
사람들은 여지없이 오그리아를 주적으로 삼았다.
“하지만 뭔가 이상합니다.”
“뭐가 말이오?”
“오그리아가 세레니스와 얀. 모두를 상대할 능력이 됩니까?”
오그리아는 제국들 중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그만큼 인구수도 많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두 제국과 총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만큼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여기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앞으로 나선 것은 알이었다.
그리고 알을 알아본 자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너는…….”
“로텐바르 폐하. 하실 말씀이라도?”
알은 모르는 척 처음 보는 듯한 태도로 그를 대했다.
그것을 본 로텐바르는 다시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아니오. 계속하시오.”
“감사합니다. 저는 얼마 전 독립한 크로이츠 공국의 공왕님을 모시는 알이라고 합니다. 지금 이 자리는 그분을 대표해서 나온 자리입니다.”
“음, 들었소. 세레니스 제국의 영토를 일부 부여받은 수완 좋은 귀족이라고 들었소만.”
“제 주인 되시는 공왕님께서는 신탁에 나오는 자들과 이미 여러 차례 조우한 적이 있습니다.”
알은 아무드의 전쟁부터 썰을 풀어나갔다.
아무드의 전쟁이 그들의 공작원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라 말하자 아무드가 손을 들었다.
“이의 있소.”
“말씀하시죠, 아무드의 히두르 왕자님.”
“우리가 했던 전쟁은 국익을 위해서였지 그 누구의 입김도 아니오. 어디서 그런 근거로 말하는 것이오?”
아무드 측에선 기분 나쁘다는 듯이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알의 말을 인정한다면 한 나라가 누군가의 꾐에 빠져 전쟁을 일으켰다는 뜻이 된다.
국가의 체면과 자존심에 금이 가는 일이었다.
“그들의 수법은 매우 교묘합니다. 정정하자면 그들은 아무드의 예민한 곳을 건드려 싸움을 부추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알을 능숙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상회를 맡아 키우면서 언변이 좋아진 덕이었다.
“흠흠…….”
“계속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저의 주인은 언젠가 그들이 큰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 판단. 앞날이 보장된 삶을 버리고 맞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것이 지금의 크로이츠 공국입니다.”
“그렇다는 건 세레니스 제국은 미리 이 사실을 알았단 말입니까?”
누군가 묻자 모두의 시선이 바스테리온 공작에게 쏠렸다.
“우리 역시 그들의 정체는 확실히 모르고 있었소. 크로이츠 남……. 아니, 크로이츠 공왕이 그들을 조사하고 있었고 그들을 추적하던 도중 신탁을 들었던 거요.”
공작의 발언이 끝나자 알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현재 각국에서 신전과의 협조를 통해 내부에 숨어 있는 그들을 색출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많은 불편 사항이 있겠지만 대륙의 앞날을 위함이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각국에서는 색출 작업으로 인해 불만이 많았다.
적들의 내부자라는 것이 대부분 요직에 있는 귀족이거나 관리들.
신전이 나서서 그들을 색출해 내니 그 모양새가 심히 정권을 흔들려는 모습으로 보였다.
하지만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시작하자 되레 국가 측면에서도 나서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모이게 한 이유가 뭡니까?”
얀 제국의 왕자가 묻자 대신관이 일어서며 말했다.
“현재 각국에 마도 왕국을 멸망으로 밀어 넣었던 마법진들이 설치되어 있을 것이라는 제보가 있습니다. 파견되어 있는 신전에서 조사를 하고 있으나 개인 사유지나 국가가 소유한 토지에 대해선 조사가 어렵습니다.”
“잠깐, 그 말은 귀족들의 영지와 사유지를 개방하라는 겁니까?”
“결론적으로 그렇습니다.”
그 말에 사람들은 모두가 신음을 흘렸다.
국왕 중심의 봉건국가 체제이지만 어디까지나 체제가 그렇다는 것이지 실상은 달랐다.
어느 국가에나 국왕파와 귀족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제국 정도나 황권이 강하게 존재했다.
그것은 카나리스 왕족 출신인 태훈이나 수호기사였던 알이 잘 알고 있었다.
“그게 가능하리라 봅니까?”
“지금은 비상시입니다. 그 점을 잘 설명하면 귀족들도 반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반발하는 귀족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고 정말 내부에 그들의 첩자가 있으면 불만 있는 귀족들을 부채질하여 오그리아 제국 꼴이 날 수도 있습니다.”
장내는 어수선했다.
주제와 목적은 분명했지만 자리에 모인 국가의 왕족들은 내란을 우려했다.
‘역시나 왕자님이 말하신 대로군.’
알은 태훈이 말한 것을 떠올렸다.
“아마 회의에 모인 왕족들은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할 거야.”
“신탁이 있는데도 반대할 거란 말입니까?”
“ 요즘 시대 사람들은 신의 권능을 보지도 못했으니 피부로 와닿지 않겠지. 하지만 귀족들의 등쌀이나 압력은 그들이 실감하고 있으니까.”
“그건 저도 옆에서 보았으니 잘 압니다.”
“거기다 지금 당장 각 국가들이 그들로 인해 피해 본 것은 없어. 카나리스나 제노비아는 조금 다르겠지만 상처가 곪고 터지기 전에는 뭐 어때라는 게 인간의 본성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그들의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까?”
“채찍만 휘두르지 말고 당근도 주어야겠지.”
어수선한 장내를 보며 알은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그것을 내려놓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
“이건 레드크로스 상회의 지분을 증명하는 서류입니다. 저의 주인이신 크로이츠님께서 저에게 맡겨주신 물건이죠.”
사람들의 시선이 종이에 쏠렸다.
레드크로스의 이름을 모르는 국가는 없었다.
특히 그 지분을 가지고 있는 제국과 공국.
제노비아, 카나리스는 그 값어치를 잘 알고 있었다.
“작년의 기준으로 말씀드리자면 레드크로스 상회의 순수 이익금은 대금화 80만 닢이 넘었습니다.”
“8…… 80만?!”
사람들은 헛기침을 하며 입맛을 다셨다.
알은 종이를 펼쳐보았다.
거기엔 긴 장문의 글과 함께 태훈의 사인이 들어 있었다.
“이번 신탁은 대륙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 제 주인이자 상회의 주인이신 공왕님이 자신의 지분을 이번 적의 토벌에 참여하신 국가에 나눠 드린다고 하셨습니다.”
알은 주식회사의 개념을 모르는 자들에게 간략하게 설명했다.
“공왕의 질분이 얼마나 되나?”
“절반입니다.”
“80만의 절반이면 40만. 그걸 나머지 국가들이 나눠가진다면 그렇게 큰 금액은…….”
“어디까지나 작년의 실적입니다. 현재는 도자기와 화장품이라는 사치품을 제국에서 선보였고 반응 또한 뜨겁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개발될 많은 약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덧붙이자면 우리 총국도 앞으로 크로이츠 공국과의 전면적으로 협력하여 약을 유통시키기로 했소.”
이것은 태훈과 대신관의 약속이었다.
본래의 가격에서 약간의 수수료만 덧붙이겠다는 약조를 통해 유통과 판권을 총국과 공유하기로 했던 것.
아직 제국을 비롯해 소수 국가에만 유통되고 있는 약.
아직 레드크로스 상회의 약을 접해 보지 못한 국가도 익히 그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총국과 상회가 손을 잡는다?’
‘그렇다면 80만이 8천만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데.’
각 국가의 왕족들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주판을 두드려도 적지 않은 금액이 왕실 금고로 들어오게 되었다.
“크흠, 신께서 부탁하신 일이니 발 벗고 나서야겠지.”
“신탁에 따르지 않다가 마도 왕국 꼴이 나는 것 아니겠소.”
계산을 마친 자들의 의견이 맞춰지는 듯했다.
대신관이나 알이 숨을 돌리려는 찰나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알의 관자놀이가 움찔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로텐바르 국왕님. 하실 말씀이라도.”
“신탁이 있으니 총국이 발 벗고 나서는 이유는 알겠소. 하지만 크로이츠 공왕은 뭐 하는 자이길래 자신의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나서는 것이오?”
“로텐바르 국왕님, 본래 대의라는 것 앞에서는 개인의 소유라는 것은 수단에 불과합니다.”
타 국가의 왕족들은 왜 괜스레 나서냐며 눈치를 주었다.
하지만 로텐바르는 개의치 않았다.
“본래 레드크로스 상회의 대주주는 내 동생이었소. 동생이 죽으면서 편지 한 장으로 소유권이 크로이츠 공왕에게 넘어갔는데 우리는 그 편지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생각지도 않은 말에 알은 당황했다.
잠시 주춤하는 알 대신 대신관이 물었다.
“그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공왕의 대리인이 내놓은 공왕의 지분. 그것은 본래 우리 왕국의 것이라는 소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