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2만 포인트로 환생하기-88화 (88/150)

88화

따각따각-

부츠의 굽이 바닥과 부딪히며 고막을 간지럽혔다.

칙칙한 분위기의 통로를 걸어 남자가 도착한 곳에는 왕좌가 놓여 있었다.

천장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줄기에 비춰진 왕좌는 오래되어 보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남자는 아무도 보이지 않자 방을 나왔다.

다시 한참을 걸었다.

잠시 후 저편에서 빛이 보였다.

끝에 다다르자 녹빛이 가득한 숲이 나타났다.

남자가 나타난 통로의 입구는 덤불에 가려 유적 같은 느낌이 나고 있었다.

남자가 익숙하게 걸어간 곳은 커다란 나무 앞이었다.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응, 뭔데?”

나무의 위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무성하게 자란 가지와 잎 때문에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한 곳을 제외한 나머지 진의 준비가 모두 끝났다고 합니다.”

“나머지 한 곳은 지난번의 그곳인가?”

“네, 그렇습니다. 세레니스 외곽에 준비했던 진입니다.”

부스럭-

탁-

가지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한 사람이 떨어졌다.

땅에 착지한 것은 어린아이였다.

머리와 눈동자 모두 금빛을 띠고 있는 아이.

“그 녀석은?”

“공작원이 새로운 정보를 보내왔습니다. 현재 자치령을 부여받아 나라를 세웠답니다.”

“어디에?”

“세레니스 제국과 오그리아 제국이 맞닿은 국경 지역이라고 합니다.”

“흐음.”

아이는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그 녀석 부하였던 녀석의 이름이 뭐였지?”

“홀든입니다.”

“부상은 다 낫지 않았어? 데리고 와봐.”

남자는 고개를 숙이더니 물러갔다.

잠시 후, 홀든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 몸은 좀 어때?”

“많이 나았소.”

“그럼 다시 일을 해야지. 난 게으름을 싫어해.”

“이제 막 회복한 참이오. 약속은 지킬 터이니 당신도 약속을 잊지 마시오.”

“그럼 그럼. 난 약속은 반드시 지켜. 그런데 말이야…….”

슥-

순식간에 아이는 홀든의 앞으로 다가갔다.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얼굴은 바닥과 마주하고 있었다.

퍽-

“크윽!”

“나를 내려다보는 건 그만해 줄래? 싫어하는 녀석이 떠올라서 말이야.”

바닥에 얼굴을 찧은 홀든의 머리에 아이는 발을 올렸다.

천진난만하게 웃는 얼굴로 발에 힘을 주자 그의 얼굴이 깊숙이 묻혔다.

“네가 한때 영웅이었을지는 몰라도 지금은 그냥 내 부하야. 그걸 잊으면 곤란하다고.”

아이가 발을 치우자 홀든이 기침을 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조…… 조심하겠소.”

“그 녀석을 내 앞으로 데려와. 반드시 살려서. 알겠어?”

홀든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통로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아이는 자신의 뒤에 있는 나무를 쳐다보았다.

나무 위로는 천장이 있었다.

지하에 만들어진 정원은 봄 같은 날씨를 가지고 있었다.

나무로 다가가 기둥에 가만히 손을 얹은 아이는 애틋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정원을 나선 아이는 통로를 지나 왕좌가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자 가면을 쓴 자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왕이시여, 오그리아의 황제가 서신을 보냈습니다.”

“말해.”

“거래를 하겠다고 합니다.”

“풋.”

아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인간은 정말 쉽단 말이야. 그깟 부귀영화가 뭐라고.”

“미개한 인간들이 생각하는 수준이야 오크와 다를 바 없죠.”

“황제가 해달라는 건 다 해줘. 우리 계획에 차질이 없는 선에서.”

“그럼 군대를 움직여도 된다는 건가요?”

“어차피 피를 위한 군대였잖아. 오그리아 놈들이 앞장설 때 해치우는 게 좋지.”

“알겠습니다.”

“시일은 네가 적당히 맞춰서 진행해. 군대와 관련된 것은 모두 너에게 맡기마, 헤라.”

“알겠습니다. 왕이시여.”

* * *

새 황제는 반란 세력을 일주일 만에 제압했다.

반란 세력을 제압한 후에는 얀 제국과 세레니스 제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전쟁의 근거는 늘 그랬듯 영토 문제.

3제국을 제외한 왕국들은 국경이 인접해 있는 제국의 편에 붙었다.

전쟁이 선포된 후 3일 뒤.

자치령으로 찾아온 손님이 있었으니 대신관이었다.

“시간 끌기는 실패한 것 같군요.”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탈론 사건은 조사해 보셨습니까?”

대신관은 자체적으로 3왕자와 하이디 상회의 밀회 관계를 조사했다.

그 결과 인신매매와 관련이 있다는 심증은 확실해졌다.

다만 물증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미 많은 관리들이 연루되어 있어 더 캐내기는 힘들었던 것.

“인신매매된 자들이 정체불명의 조직에게 넘겨진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럼 손을 쓰셔야죠.”

“손은 썼습니다. 인신 매매 현장을 성기사들로 하여금 급습하게 했습니다.”

생각보다 결단력 있는 대신관의 행보에 태훈은 놀랐다.

“놈들은 잡았습니까?”

“그게…….”

대신관은 말끝을 흐렸다.

습격하러 나갔던 병력과의 연락이 끊겼다는 것.

“당했다는 건가요?”

“다음 날이 되도 복귀를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다시 보내봤지만 현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합니다.”

대신관의 말에 태훈은 홀든이 떠올랐다.

적의 거처를 알아내겠다며 떠났던 홀든.

그러곤 자신에게 칼을 들이미는 형태로 다시 보게 되었던 일이 떠올랐다.

“전멸했거나 적에게 포섭되었을 겁니다.”

“성기사들 중에서도 최정예입니다. 믿음만큼은 강한 자들이니 절대 포섭당할 일은 없습니다.”

“전멸을 해도 문제 아닙니까?”

“그건…….”

대신관은 고개를 떨구었다.

최정예 성기사들이 당해내지 못할 자들이라면 애초에 잘못 건든 상대였다.

잠시 뜸을 들이던 대신관은 한 가지 사실을 더 털어놓았다.

탈론 사건이 정체불명 조직과 연관이 있다고 확신했을 때 그는 오그리아 제국의 신전에 연락을 했다고 했다.

그러곤 태훈이 부탁한 일을 지시했다.

하지만 이틀 뒤 오그리아가 두 제국을 향해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선전포고 이후에 자초지종을 듣기 위해 연락을 했습니다. 하지만 연락이 되질 않더군요.”

“연락이 안 되다니. 그게 무슨 말 입니까?”

“단거리 전언에 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사람을 보냈는데 그들도 연락이 안 됩니다.”

“전부요?”

“네, 그렇습니다.”

오그리아에도 여러 신전이 있고 수도에는 중앙 신전이 있었다.

단시간 내에 그 많은 세력이 넘어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선전포고도 그렇고...... 놈들이 오그리아를 장악한 걸 수도 있어.’

나라가 통째로 넘어갔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마음이 급해졌다.

아무드가 일으키려던 전쟁으로 바라던 것을 오그리아를 통해 재실현 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그럴 경우 아무드 때와는 규모가 다를 수 있었다.

‘생각보다 움직임이 빨라. 요새 하나로는 힘든 싸움이 될 거야.’

인력 자원에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하지만 이쪽에서 먼저 손을 뻗을 순 없어. 그랬다간…….’

태훈은 여태껏 총국이 보여왔던 모습에 망설였다.

기존 기득권층이었던 총국이 그 대가로 요구할 것들이 불안했다.

대신관도 오그리아 제국이 장악당했을 경우를 생각하고 있었다.

오그리아에 있던 수많은 성기사들과 신관들의 안위가 걱정되었던 것.

죽어도, 살아서 적에게 붙었어도 여러모로 큰 손실이었다.

후자의 경우, 백성들에게 미칠 영향은 적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만.”

대신관이 먼저 운을 떼자 태훈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손을 잡아야겠군요.”

“하지만 우리만으로는 안 됩니다. 얀 제국까지는 몰라도 세레니스 제국과는 함께해야만 합니다.”

“바스테리온 공작은 적의 정체가 세레니스의 경제를 잡고 흔들려는 세력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탁은 공표하지 않을 겁니까?”

태훈은 고민했다.

아직 준비는 되지 않았지만 더 이상 미루다간 더 큰 것을 놓치게 될 수도 있었다.

경제와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서 초월적 협력을 이끌어내려면 신탁이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공표는 하도록 하죠. 대신 내용은 조금 조정하도록 하는 걸로 합시다.”

둘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협약서를 만들었다.

총국과 자치령 및 상회에 대한 일시적인 협약이었다.

공표문까지 만들어지자 태훈은 손을 내밀었다.

“위기가 지나갈 때까지 서로 최대한 협조합시다.”

“좋습니다.”

대신관은 밤이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떠나려 했다.

그런 그를 태훈이 멈추어 세웠다.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대신관께서 잠시 봐주셔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태훈은 대신관은 레이첼에게 데려갔다.

오랜 경험이 있는 대신관은 아무 말 없이 레이첼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대신관의 손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다.

손을 거둔 대신관은 미소를 지었다.

“축하드립니다.”

대신관의 말에 레이첼의 표정이 환해졌다.

태훈도 기쁜 마음을 감추었지만 흘러나오는 미소만은 어쩔 수 없었다.

“가시는 길에 아내를 수도로 데려다주시겠습니까? 이곳은 아이에게 좋을 것이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부인은 총국의 명예를 걸고 돌봐드리겠습니다.”

대신관은 밖에서 기다리겠노라 말하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레이첼은 자신도 남아 있으면 좋겠다고 피력했지만 태훈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정한 일이잖아. 이곳은 언제 전쟁터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아.”

“저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눈치는 있어요. 하지만…….”

태훈은 말없이 레이첼을 안아주었다.

“걱정 마, 아이가 태어날 때는 꼭 옆에 있을게.”

이미 준비는 하고 있었다.

레이첼을 따라 자치령으로 왔던 시종인들이 금세 그녀의 짐을 갖고 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내를 지켜야 한다.”

“걱정 마십시오, 각하.”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은 태훈은 루세프를 불렀다.

그녀를 따라가 지키라는 말을 하자 루세프는 반대했다.

“족장은 일족을 떠날 수 없소.”

“총국이 신탁을 공표할 때 신탁의 증표를 보여야 해. 이것도 너희 일족과 관련된 일이다.”

“크흠.”

루세프는 내키지 않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듯했다.

대신 자신의 아들을 불렀다.

“네가 나 대신 이곳을 맡아라.”

“걱정 마시고 떠나셔도 됩니다.”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세프의 아들은 쿨하게 대답했다.

대신관과 레이첼.

루세프까지 요새를 떠나는 것을 본 태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되십니까?”

“걱정이 안 될수 없지. 하지만 이곳보다는 후방이 안전해.”

“이제 저에게도 자초지종을 알려주셔도 되지 않습니까?”

유리아는 무거운 분위기로 이야기했다.

그런 유리아의 표정을 본 태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유리아는 계약 기사니까.”

“저에게는 거짓말을 말하지 마십시오. 적어도 알이 알고 있는 것 까지는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태훈은 그녀를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한 시간 가까이 상황을 설명했음에도 그녀의 표정은 덤덤했다.

“생각 외로 담담하네?”

“솔직히 환생 이야기는 아직 믿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공국…… 아니, 모든 나라가 위험하다는 이야기는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군요.”

“그리고 언젠가는 보게 될 테지만 내가 약한 것도 아니야.”

“그 푸에르코라는 자가 쳐들어 왔을 때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유리아는 상관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한 가지 말해주고 싶어. 이곳은 전쟁터가 될 수도 있으니 내 기사직은 그만두어도…….”

“근위대장이 되는 순간부터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계약 기간은 남아 있거든요.”

그 모습에 태훈은 실소하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보너스는 두둑이 넣어둘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