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태훈은 총국의 사절을 돌려보낼 때 조만간 아는 것의 일부를 말해서라도 협력을 받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공식적으로 신탁을 알린 이상 총국의 개입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대신관이 앞에 나타나자 태훈은 준비했던 것들을 말했다.
단, 환생과 포인트에 대해선 여전히 비밀이었다.
그는 가면의 조직에 대해 설명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자들을 꼬드겨 구해주는 대신 자신들을 위해 일하게 한다는 것.
사람들의 인신매매와 관련이 있다는 것.
그들의 끄나풀이 국가와 단체를 막론하고 침투해 있다는 것.
다 듣고 난 대신관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들이 고대 시대 때의 과오를 되풀이하려 한다는 것이군요.”
“그렇다고 판단됩니다.”
“그러면 이 자치령의 목적이…….”
“반격의 기반이죠. 그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장소와 인력이 필요했습니다.”
“……이곳에 있는 자들은 믿을 만하다는 겁니까?”
태훈은 2천 2백 명의 병력에 대해 심혈을 기울이고 관찰하고 있었다.
가면과 관련이 있다면 어떤 수로든 바깥과 연락을 하려고 움직임이 있었을 터.
여태껏 그런 시도는 일체 없었다.
“믿을 만하지 않았다면 자치령은 생각도 안 했을 겁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으신 겁니까?”
“적들은 저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겁니다. 입단속을 한다 해도 신탁에 대한 정보도 어느 순간 새어나가겠죠. 거기다 제국에서 나왔으니 과감하게 나올 겁니다.”
“이곳에 직접 무력행사를 해오겠지요.”
“정치적으로도 이곳은 오그리아와 적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점에서 총국이 힘을 써줘야겠습니다.”
총국은 모든 국가에 신전을 두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도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왕자 시절에도 느꼈던 바.
“오그리아 제국의 국정에 개입하라는 겁니까?”
“이곳의 지금 병력으로는 가면의 조직들을 상대하기도 바쁠 겁니다. 시간을 좀 끌어주셔야겠습니다.”
“무리한 부탁은 아닙니다. 그곳 역시 지금은 혼란스러울 테니까요. 그럼 우리에게 이득은 있습니까?”
“이득? 지금 이득이라고 했습니까?”
쾅-
태훈은 탁자를 내려쳤다.
“나는 혼자서 큰 짐을 짊어지려고 하는 겁니다. 어디서 이득을 논하는 겁니까!? 나라고 좋아서 내 가족과 주위 사람들을 위험으로 몰아넣는 줄 압니까?”
“말씀 잘하셨습니다. 제가 보기에 각하는 성인이 아닙니다. 그런 분이 구태여 모든 위험을 무릅쓰려고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분명 제가 모르는 무언가의 득이 있겠죠.”
대신관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고 믿었다.
‘만만치 않군.’
태훈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곤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얼마 전에 가족을 이룬 사람입니다. 세상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위기에서 가족을 지키려는 것은 사람의 당연한 반응입니다.”
“정말로 그것뿐입니까?”
“난 총국의 도움이 없다 해도 내 할 일을 할 겁니다. 협력을 하지 않아도 좋겠지만 방해는 하지 마시죠.”
“차라리 신탁에 대한 내용을 모든 국가에게 공표를 하고 도움을 받는 방법이 낫지 않습니까?”
“그리하면 저들은 계획을 서두를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온 대륙이 혼란에 빠지겠죠. 그걸 바라는 겁니까?”
거기다 각 국가에서 제대로 된 도움을 준다고는 보장할 수 없었다.
당장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따져 보는 자들이 있었다.
거기에 곳곳에 포진되어 있을 적들이 무슨 공작을 할지도 몰랐다.
태훈은 요새의 준비가 끝나면 공개적으로 가면의 조직에 대해 공표할 예정이었다.
“적의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는데 전면으로 나서는 것은 리스크가 큽니다. 나는 무리하지 않을 겁니다.”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그날 밤 이후로 각하는 소득이 없었습니까?”
“제국 수도의 자작가 전체가 행방불명된 사건에 그들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만 말해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3왕자도 그들과 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도.”
“황족이 개입해 있다는 겁니까?”
대신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디까지나 추론입니다. 확신은 할 수 없지만 그들의 손길이 곳곳에 닿아 있다고 생각하면 전혀 신빙성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태훈은 그에게 종이 한 다발을 내밀었다.
탈론 사건에 대한 자료를 정리해 놓은 것이었다.
“이 사건을 쫓다 보면 그들의 인신매매와 황족의 개입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니 조사해 보시죠.”
“알겠습니다. 조사를 해보고 확신이 들면 기꺼이 협조하겠습니다.”
대신관이 요새를 떠난 시간은 초저녁 무렵이었다.
요새를 한 바퀴 둘러본 태훈은 처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레이첼이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돌아오셨어요?”
“응, 엄청 피곤하네.”
레이첼이 데려온 시종인들은 태훈을 보자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그가 의자에 앉자 레이첼이 뒤로 다가와 그를 앉았다.
“오늘도 바빴어요?”
“뭐 늘상 그렇지. 미안해, 시간을 많이 못 내서.”
태훈은 자신의 목을 감싼 그녀의 팔을 어루만져 주며 미안함을 표했다.
“신경 쓰지 말아요. 저도 하루 종일 바빴는걸요.”
“하는 일은 어떻게 되가?”
“파케 양이 잘 도와주고 있어요.”
레이첼은 여느 귀족가의 부인들처럼 느긋하게 보내고 있지 않았다.
요새의 외관과 구조는 완성되었지만 본래 암석으로 된 산을 깎아 만든 것.
생활 시설이 아직은 많이 부족했기에 그것들을 만드는 걸 돕고 있었다.
직접 무언가를 제작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책을 좋아해 모든 잡다한 책들을 읽었고 다행히 의료원에서 발간했던 책의 지식들도 습득하고 있었다.
공공 위생에 관해 파케 양과 협의하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최근에는 비누를 개발하고 있었다.
“거긴 약품 냄새로 힘들 텐데.”
“그렇긴 해도 내가 책 읽는 것 말고도 할 수 있다는 게 재밌어요.”
그녀는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타인의 눈을 피해 집 안에서만 숨어 있던 그녀가 수도를 벗어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고 했다.
그런 그녀가 보는 세상은 모든 것이 새로워 보이는 듯했다.
“오늘 총국에서 사람이 왔다고 하던데요.”
“응, 일 때문에. 대신관이 직접 왔어.”
“대신관? 그럼 이곳에도 신전이 생기는 거예요?”
“아직 확정은 아니야.”
“하긴 당신은 총국을 싫어했죠.”
불과 3개월 남짓이었지만 레이첼은 태훈의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황녀를 제외하면 친구가 없던 그녀는 태훈에게 많은 것을 의지했다.
그녀가 보여줬던 믿음과 헌신성에 태훈도 비밀을 제외하곤 많은 것을 그녀와 공유했다.
고개를 뒤로 젖혀 레이첼과 눈을 마주친 태훈은 그녀의 표정에서 미묘함을 느꼈다.
“무슨 일 있어?”
“네? 뭐가요?”
“난 눈치 빨라.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줘. 신경도 제대로 못써주는데.”
“아니에요, 필요한 거 없어요. 기도드린 지도 오래된 것 같아서.”
“꼭 신전에서만 기도하라는 법은 없어. 신이라면 어디서 기도를 하든 다 들어줘야지. 안 그래?”
“그렇죠. 하하.”
어색하게 웃는 그녀를 본 태훈은 그녀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뭘 숨기는 거야?”
“제……. 제가 뭘요?”
“당신 만나고 나서부터 종교 관련해선 내가 아는 게 없는데?”
그는 레이첼이 종교 활동을 하는 것을 목격한 전례가 없었다.
애초에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 집 밖 출입을 하지 않았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기도를 위해서 자택 밖을 드나들었을 리 없었다.
그리고 3개월 동안 같이 지내면서 기도를 한 모습 또한 없었다.
“이……. 이제 좀 안정감을 찾으려고…….”
“안정감을 왜 종교에서 찾아? 남편이 있는 가정에서 찾아야지. 얼른 말 안 하면 괴롭혀 줄 테다!”
태훈은 그녀의 옆구리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항상 간지럼을 통해 장난을 치던 그였다.
웃음을 참지 못한 레이첼은 그의 손을 막아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화 안 낼 거죠?”
“내가 당신한테 화낼 게 뭐가 있어.”
“바람을 펴도 화 안 낼 거예요?”
“음, 그건 좀 다른 상황인데. 하지만 당신이 바람 필 일은 없으니 화를 낼 일도 없겠지.”
“무슨 자신감이에요?”
“당신을 사랑해 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확신하거든.”
“흥.”
잠시 뜸을 들이던 레이첼은 입을 열었다.
“신전에 가서 할 일이 있어서요.”
“또 기도 이야기야? 당신이 독실한 신자인 줄은 몰랐는데?”
“독실한 신자는 아니에요. 기도 말고 다른 거예요.”
“신전에 가서 기도 말고 할 일이 뭐가…….”
그 순간 태훈은 말끝을 줄였다.
왕자로 지내던 시절 신전에 출입하던 사람은 유독 여자들이 많았다.
약과 의료원에 꿈을 두고 있던 태훈도 그 이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어……. 어……. 설마…….”
환생 이후 말을 더듬어본 적이 없던 그였다.
그의 눈이 커지는 것을 본 레이첼은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혼자 조용히 알아보려고 했는데.”
“아니, 왜 그걸 혼자 알아봐?”
“지금 상황이 좋은 편은 아니잖아요. 저도 그 정도 눈치는 있어요.”
태훈이 제국 귀족직과 공국 의원직을 걷어차고 독립한 것.
그것도 국경 분쟁이 일어나는 다른 제국과의 국경이었다.
거기에 자치령이라고는 하지만 영지라고 하기에 부끄러운 규모에 요새만 덩그러니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태훈의 신경은 온통 다른 곳에 있었다.
“언제부터?”
“한 일주일 됐어요. 예전보다 몸이 많이 피곤해서 벨라한테 물어봤어요.”
벨라는 그녀의 시종인이었다.
백작가에 있을 때부터 그녀를 15년 넘게 돌봐온 50대 중년 여인이었다.
태훈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그녀의 배에 가져다 대었다.
이곳의 대부분의 여성은 고도 비만이었다.
당연히 성인병이 많은 상태에서 임신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
환생 후 어머니가 태훈을 낳고 사망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렇게 여성들의 산후 사망이 잇따르고 유산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당연히 귀족가 여성들은 결혼 후 주기적으로 신전을 찾으며 관리를 받았고 임신 여부를 조기에 알려 했다.
레이첼은 지금 자신의 임신을 의심하고 있었다.
“벨라는 뭐래?”
레이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 수 없는 감정이 태훈을 감쌌다.
그리고 그 감정이 기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빠? 내가 아빠가 된다고?’
잠시 멍하니 있던 그는 벌떡 일어나서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내가 아빠라고!?”
“조용히 해요! 아직 모르는 일이에요!”
레이첼이 당황해하며 날뛰려는 그를 막았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그는 그녀를 안아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만감이 교차했다.
비단 귀족가뿐만 아니라 임신 소식은 모든 가정의 경사였다.
주위의 축복을 받아야 할 상황이지만 현실은 차디찬 암석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미안해, 나 때문에 이런 곳에…….”
“우……. 우는 거예요?”
태훈의 눈가가 촉촉이 젖는 것을 본 레이첼은 그를 힘차게 안아주었다.
“나 지금 굉장히 행복해요. 그러니까 자책하지 말아요.”
둘은 잠시 말없이 그대로 있었다.
태훈은 속으로 생각했다.
자신은 의사가 아니었다.
약을 개발하며 병에 대한 일부 지식만 있었을 뿐.
그리고 이곳에는 건강검진을 위한 설비는 전무했다.
임산부에게는 약도 함부로 쓸 수가 없던 것이다.
‘이번만큼은 신전을 의지해야 하는 건가.’
태훈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그녀를 이곳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당분간 수도의 집으로 돌아가 있는 건 어때?”
“네?”
“정말 임신이라면 여긴 환경이 좋지 않아. 그리고 이번만큼은 신전의 도움이 필요해.”
“하지만…….”
그녀는 태훈과 떨어지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그녀도 이곳이 아기에게는 좋지 않은 환경이라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사람을 보내서 백작가에 사정을 이야기할게. 그리고 당분간 연구실에는 가지 마.”
임산부를 온갖 약품 냄새가 가득한 곳에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임신이 아닐 수도 있어요.”
“그럼 다시 돌아오면 되지. 여기가 당신 집인걸.”
태훈은 다시 한번 그녀를 안아주었다.
생전 느껴보는 감정에 그는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