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초가을에 접어들면서 태훈은 거처를 자치령으로 옮겼다.
레이첼은 아무 말 없이 따라와 주었다.
천혜의 요새라고 불릴 수 있게 요새가 자리 잡은 위치는 절묘했다.
요새의 정면을 제외한 다른 3면은 절벽.
본래 암석으로 된 산을 깎아 만든 것으로, 일반적이라면 수년의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니트로클리세린 덕분에 작업은 무려 3개월 만에 이루어졌다.
머무를 수 있는 성도 마찬가지.
따로 지은 것이 아니라 암석을 깎아 만든 성으로 구레드르와 그 일행들이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었다.
지구의 판타지 영화에 나왔던 오크 무리들을 상대로 일전을 벌인 장소와 흡사했다.
“수용 인원은 얼마나 됩니까?”
“최대 1만 명일세.”
“겉보기와는 많이 다르군요.”
“이 산 전체에 굴을 팠으니 바깥에서 보는 것과는 많이 다르지.”
태훈은 흡족해했다.
유리아가 데리고 온 드래고니안 일족의 병력까지 합한 2천 2백의 병력이 지내기에 문제가 없었다.
“우리는 이곳을 지키면 되는 건가?”
“상황에 따라서 공수가 바뀔 수도 있다.”
“신탁은 언제까지 행하면 되는 건가?”
드래고니안 일족의 족장의 이름은 루세프였다.
드래고니안이라는 종족은 본래 드래곤이었다.
다만 저주로 인해 대부분의 능력을 빼앗기고 한정된 지역 안에서만 살게 되었던 종족.
유별난 것은 뛰어난 신체와 웬만한 갑옷만큼이나 단단한 비늘이 신체 급소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의 정령왕이 호언장담했던 것처럼 인간들 중에 그들을 당해낼 수 있는 자들은 존재할 수 없을 정도.
오그리아 출신 기사인 에레니스도 삼합 만에 손을 들었다.
“내가 충분하다고 할 때까지.”
“기약 없는 신탁이군.”
루세프는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드래고니안족을 본 전 오그리아군은 처음에는 당황했다.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드래곤들의 후예.
하지만 월등한 전투력을 본 후에는 아군이라는 것에 좋아했다.
“그리고 자네가 말한 그 병기 말인데.”
“구레드르 씨. 각하께 언행을 조심해 달라고 몇 번을 말씀드렸습니까.”
유리아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구레드르는 그러거나 말거나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무시했다.
“무슨 문제라도?”
“음, 원리는 충분히 이해가 됐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부품을 구하는 데에도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시간은 상관없으니 성능에 신경 써주세요.”
태훈은 마장기를 이용한 새로운 형태의 병기를 계획하고 있었다.
가면의 조직 정도라면 마장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태훈은 오그리아 쪽으로 정찰병을 보냈다.
더불어 정보원에게 오그리아 정계의 움직임을 보고받았다.
알은 제국 상회에 남았기에 유리아가 알의 위치를 대신하여 보고를 하고 있었다.
“오그리아 내부에서 현 황제에 반기를 든 자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 귀족들의 이름을 알 수 있소?”
장군 직책을 받은 에레니스는 유리아에게서 명단을 건네받았다.
“전부 전 황제를 따르던 보수파 귀족들입니다.”
“승산은?”
“숫적 열세를 감당할 수 없을 겁니다. 저희가 도와준다면 시선을 이쪽으로 돌릴 수도 있을 겁니다.”
에레니스의 건의에 태훈은 고개를 저었다.
“남의 싸움에 먼저 끼어들 생각은 없어. 계약은 잊지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아루스 님의 안전을 확보한 이상 충의는 크로이츠 공국에 있습니다. 다만 이쪽에 아루스 님이 계시니 그들이 합세한다면 유리할 수 있습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2천 명의 탈주병을 받아들인 순간 오그리아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었다.
거기에 아루스의 존재까지 알게되면 오그리아와 적대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에레니스의 설명을 들으니 반란 세력과의 지리적 여건이 좋지 않았다.
자치령과 반란 세력이 있는 지역 사이에는 영지가 존재했다.
“이 영지는 현 황제 편인가?”
“도움을 바라긴 힘들 겁니다.”
에레니스는 자신들이 오그리아를 빠져나올 때 해당 영지에서 다툼이 있었다는 것을 고백했다.
‘오그리아의 현 황제와는 적대관계를 피할 수 없어. 그렇다면 싸움은 시간문제겠군.’
자치령은 어디까지나 수비에 최적화 되어 있는 곳이엇다.
거기다 2천 2백이라는 숫자로 오그리아 제국과는 싸울 생각이 없었다.
“안 됐지만 지금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어. 그리고 아루스의 존재도 최대한 감춰야 해.”
“아루스 님의 존재를 알게 되면 반란 세력이 더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다고 당장 우리에게 이득은 없어. 당신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은 우리 밑에 있다는 걸 잊지 말아줬음 좋겠군.”
에레니스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불만이라기보단 현실을 직시하는 듯했다.
“각하, 총국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총국?”
태훈은 총국에서 온 사절을 만났다.
자치령인즉슨 독립된 지역이니 신전을 설치하라는 권고였다.
태훈이 레드 크로스 상회의 주인이며 상회가 만드는 약들로 인해 총국과는 라이벌 관계인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보시다시피 여기는 영지라기보단 요새요. 신전이 들어올 만한 이유가 없소만.”
“요새이니 더욱 필요하지 않습니까. 전투를 하다 보면 부상자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약은 장기간에 걸친 치료법이었다.
베이고 찔리고 잘린 상처엔 신력과 포션만큼 좋은 치료법은 없었다.
‘대법관하고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제한적으로 둬서 나쁠 것은 없지.’
태훈은 사절에게 요구 조건을 물었다.
“매달 대금화 20닢입니다.”
“대금화 20닢?”
말도 안 되는 액수였다.
자치령의 요새가 크긴 해도 병력은 3천도 안 되는 규모.
대금화 20닢이면 자치령에 주둔해 있는 병력의 3배 정도 되는 병력을 아우를 수 있는 금액이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비용을 책정한 거지?”
“국경 전선을 통틀어 가장 큰 요새입니다. 유사시 그만큼 손을 필요로 하는 곳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도 그에 합당한 요구를 해야겠지. 파견을 요청할 신관은 30명. 전부 종급 신관 이상으로 파견하라.”
“3…… 30명?”
이번엔 사절이 놀라 되물었다.
하지만 자신이 내뱉은 말이 있으니 딱히 반박하지는 않았다.
“이 정도 규모에 중급 신관 30명은 너무 많습니다. 중급 신관 10명에 하급 신관 10명으로 하시지요.”
“못 하겠다면 돌아가라. 이곳은 드래고니안이 지키는 천해의 요새라 부상병 걱정은 없을 듯하니.”
“드래고니안? 지금 이곳에 드래고니안이 있단 말씀입니까?”
“그렇다.”
사절의 얼굴 빛이 달라졌다.
저주는 신이 내린 것이니 당연히 총국이 드래고니안을 모를 리 없었다.
“드래고니안이 어찌 이곳에 있습니까? 그들은 저주받은 땅에서 나오지 못할 터!”
“신탁으로 이곳에 합류했다. 총국이 신탁마저 간섭하진 않겠지?”
“신탁? 신탁이 있었단 말입니까?”
사절로 온 자 또한 신관의 신분이었다.
그는 태훈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드래고니안이라는 종족은 구전으로만 전해져 오는 집단이었다.
거기에 신탁은 벌써 수백 년 동안 내려오지 않았던 것.
사절은 코웃음을 치며 신탁의 증거를 보여달라 했다.
“신탁을 받은 자는 분명 그 증거가 몸에 새겨져 있습니다.”
“아, 성흔이라는 것 말인가?”
태훈은 족장을 불렀다.
2미터가 넘는 거구가 나타나자 사절은 한 걸음 물러섰다.
거기에 드래고니안만이 가지는 비늘을 보자 다시 놀라며 한 걸음 더 물러섰다.
태훈이 증거를 보이라 하자 족장은 자신의 웃통을 벗었다.
그러자 등에 화려한 상처가 보여졌다.
‘이게 성흔?’
사절도 실물로는 처음보는 것이었다.
드래고니안과 성흔, 모두를 본 사절은 입을 다물었다.
“족장, 그대가 들은 신탁을 그자에게 말해 주어라.”
루세프는 태훈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절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이 땅에 어둠이 스며들고 있으니 빛으로 어둠을 물려라. 빛을 가진자의 이름은 크로이츠. 그를 도와 종족의 불명예를 벗어라.”
사절은 입을 다문 채 루세프와 태훈의 눈치를 살폈다.
거만함이 사라진 사절을 보며 태훈은 가보라는 듯한 손짓을 보이며 말했다.
“보고 들은 것을 총국에 보고하고 답을 가지고 오도록.”
?
사절이 돌아오자 총국에서는 긴급 소집이 이루어졌다.
거의 천 년 가까이 기도에도 응답하지 않던 신이 신탁을 내렸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특히 신탁의 내용을 들은 대신관과 장로들은 긴급히 자리를 가졌다.
“그 크로이츠란 자는 눈엣가시이던 자가 아닌가.”
“그렇긴 합니다. 그자 때문에 우리 총국의 재정 상황이 말이 아닙니다.”
“조사에 의하면 제국과 우리 사이에서 농간질을 한다고도 들었습니다.”
“그런 자가 신탁이라니!”
장로들의 반감은 대단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장로 하나가 대신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 편지의 발신인이 그가 아닐까요? 직접 한번 보지 않았습니까.”
“날이 너무 어두웠고 난 크로이츠라는 인물의 얼굴을 모르오. 하지만 상황으로 볼 때 크로이츠라는 인물일 가능성이 높군.”
대신관은 공국으로 신관을 보내기로 정했다.
세레니스도 자치령에는 신경을 많이 쓰는 듯했으니 이번 기회에 관계 개선을 해보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대신관님이 직접?”
“그렇소. 이번 기회에 그를 한번 만나봐야겠군. 그리고 편지의 인물이 맞는지 목소리를 들어보면 알겠지.”
대신관은 그날 밤의 목소리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날 이후 총국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마법진을 찾았지만 소득이 없었다.
이에 대륙에 퍼져 있는 신전에게 마법진의 행방을 찾아보라는 비밀 지령을 보냈지만 소득이 없었다.
자치령을 찾은 대신관은 태훈과 마주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크로이츠 각하.”
“대신관님이 직접 오실 줄이야. 미리 마중 나가지 못한 점은 양해해 주시죠.”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대신관은 그날 밤의 대화 상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각하, 독대를 하고 싶습니다.”
대신관이 독대를 청하자 태훈은 주위를 물렸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대신관이 운을 떼었다.
“저희가 독대를 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인가요?”
“감출 생각은 없습니다. 직접 오셨을 때부터 짐작은 했으니까요.”
“그날 밤 이후로 총국은 총력을 다했지만 마법진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제국 군부에서도 노력했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발견한 곳도 어지간해선 찾기 힘든 곳이었으니 쉽게 눈에 띄지 않겠지만.”
“오기 전에 여러모로 각하에 대한 조사를 해봤습니다. 하지만 어느 루트를 통해서도 의원직 이전의 정보를 찾을 수 없더군요.”
총국의 정보력은 웬만한 국가의 정보력을 넘어섰다.
국가의 패권자가 바뀌고 몰락과 탄생을 반복했지만 총국은 그런 것이 없었다.
하지만 총국의 정보력으로도 정보의 한계가 있었다.
“별안간 나타나 공국의 의원직을 맡고. 하루아침에 약과 의료원이라는 신드롬을 일으킨 자. 말도 안 되는 재보를 앞세우며 상권도 휘어잡으셨으니 그 누구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인물. 대체 누굽니까? 당신은.”
대신관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노인의 눈가는 평온해 보였지만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많이 알아보신 모양이군요. 헌데 제 정체보다는 신탁이 더 중요한 것 아닙니까?”
“말씀하시기 곤란한 부분이 있으신가 보군요. 그럼 한 가지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근본을 따지자면 각하와 저희의 관계는 좋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마법진에 대한 정보를 준 것은 저희와 협력할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생각은 있습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제한적인 부분에 해당합니다. 난 총국이 지금껏 해온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대신관은 사절을 통해 그가 어떤 부분에서 화가 나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말하기 부끄럽집만 높은 자리에 있다 보면 수면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에 둔감해지기도 합니다. 그런 부분은 최대한 시정하죠.”
“내 고향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 그런 자리를 거쳐오셨을 텐데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저희는 골이 깊은 것 같군요.”
“그 골은 깊은 채로 놔두고 눈앞에 닥친 일에는 일단 협력하도록 하죠.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