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황가에서 오셨군요. 제가 크로이츠입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나는 5황녀인 피리아다.”
“피리아 황녀님, 누추한 결혼식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태훈이 공손하게 인사를 했지만 여전히 피리아는 허리에 손을 올린 채 꼿꼿하게 서 있었다.
“아버님을 대신하여 왔다. 앞으로도 제국에 충성을 다해주길 바란다는 말씀이 있으셨다!”
“크로이츠 공국은 제국의 아들 같은 존재. 약속과 의리는 반드시 지킬 겁니다.”
“좋다. 그리고 이걸 돌려주려 왔다.”
피리아가 손짓하자 뒤에 있던 고용인이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꾸러미를 풀자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책이었다.
한눈에 자신이 만든 책임을 알아본 그는 레이첼이 말했던 친구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대가 이걸로 화가 나 있다고 들었네.”
“화가 난 것까지는 아닙니다. 다만 제가 정성을 담아 그녀에게 선물한 것이라서요.”
“그럼 이제 문제는 없겠지?”
“그럼요. 앞으로도 좋은 친구가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그 녀석을 울리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아.”
당부를 하고 등을 돌리는 황녀를 보던 태훈은 그녀를 불러 세웠다.
“황녀님, 잠시 이야기 좀 하실 수 있을까요?”
?
황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축하연까지 끝나자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모두가 떠나고 뒷정리가 한창인 가운데 태훈은 그녀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결혼식 때 예복 그대로 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층 신경 쓴 화장과 아름다운 옷은 그녀의 몸선을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침대 위에서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나한테 와줘서 고맙소.”
“저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많이 힘들 수 있소.”
“그만큼 더 잘해주실 것이라 믿어요.”
그는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그가 부르자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한 명씩 소개시켜 주었다.
알과 유리아.
경비대원들과 고용인들의 소개가 한 명씩 이루어졌다.
모두의 소개가 끝나자 레이첼이 말했다.
“크로이츠 레이첼이라고 합니다. 부족하지만 공왕님의 반려로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많이 도와주세요.”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둘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태훈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팔찌였다.
한눈에 봐도 엄청난 고가처럼 보이는 물건이었다.
이미 예물을 모두 받은 그녀는 생가지도 못한 선물에 놀란 듯했다.
“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겁니다. 항상 몸에 지니고 있어주시오.”
팔찌는 보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최고급 마나석을 바탕으로 마나 회로를 비롯한 모든 마법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었다.
거기에 신력까지 들어가 있는 것으로 웬만한 고대 아티팩트급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예물은 받았는데 이런 것을 주시니 평범한 것은 아니겠죠?”
“면목없지만 그렇소. 위급한 상황에 놓인다면 팔찌를 돌리시오. 당신을 지켜줄 것이오.”
태훈은 그녀의 팔에 팔찌를 채워주며 설명해 주었다.
팔찌가 채워지자 그녀는 마음에 들어 했다.
“예쁘네요.”
“아무렴 당신만 할까.”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 * *
태훈의 결혼식이 끝난 직후 황궁에는 오그리아 제국의 사절단이 도착했다.
새로운 황제가 보내는 사절이었다.
오그리아는 세레니스 말고도 다른 제국에도 사절을 보냈다.
3개의 제국들은 서로 삼파전 양상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국경 문제로 인해 충돌하는 부분들이 있었다.
오그리아는 두 제국에게 자신들이 주장하는 국경선을 강력하게 어필했다.
당연히 황제는 강력하게 반발하며 사절을 돌려보냈다.
그러고는 수도의 귀족들을 불러 모았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귀족 대표인 공작이 말했다.
“명백한 도발이군.”
“하지만 이제 막 정권이 바뀐 그들에게 그럴 만한 여력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오그리아는 지금 내부에도 크고 작은 문제가 많습니다. 단순한 도발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건 내부를 단결시키기 위한 외교 술책일 수도 있습니다. 내부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는 데 오래된 영토 분쟁만큼 좋은 건 없죠.”
의견이 팽팽하게 맞물리는 가운데 황제가 공작에게 물었다.
“크로이츠는 오지 않은 건가?”
“네, 이제 그는 공식적으로 귀족이 아닙니다. 부를까요?”
“그럴 필요는 없다. 그의 자치령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현재 정비 중에 있습니다. 그 규모가 매우 커서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규모는 얼마나 되나?”
“영토는 작지만 요새의 규모로만 본다면 저희 측의 그 어떤 요새보다도 규모가 큽니다.”
“병력은 어떻게 해결한다고 한다던가?”
“이야기를 나누어본 결과 일단 오그리아에서 탈주한 병력들을 포섭한다는 생각도 있는 것 같습니다.”
“흠, 쿠데타로 도망친 그 병력들인가.”
공작이 자치령이 일반적인 영지 운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신청했던 영토의 규모도 그렇고 공작은 태훈이 자치령을 선택한 것도 정체불명의 조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손을 뻗지 않은 조직이 필요했던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태훈은 공작에게 오그리아에서 탈주한 전 황제의 군속들을 포섭할 생각을 어필했다.
다만 그럴 경우 세레니스와 오그리아의 관계가 악화될 수 있으니 보류를 하겠다고 알려온 것.
“그 숫자가 2천이 넘습니다. 단기적으로는 많은 도움이 되겠죠.”
“그들을 포섭할 수 있다고 장담하던가?”
“그 부분에서는 저희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작은 오그리아가 끝내 도발을 감행할 경우에 한해 말했다.
“그들에게 전 황권을 부활 시켜준다는 약조를 하면 협조를 할 것 같습니다.”
“전 황제의 핏줄이 살아 있나?”
“그건 좀 더 알아봐야 할 문제지만 최악의 경우 현 황제를 몰아내준다고만 해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크로이츠 공국은 우리 국경에서도 가장 핵심이다. 그도 그걸 알고 있을 터. 공작이 그가 배신하지 않음을 증언했지?”
“그렇습니다, 폐하. 그가 운영하는 주식회사라는 것에 대한 지분을 우리가 일부 가지고 있으며 그 금액 또한 엄청난 것. 천직이 상인인 그가 저희를 배신할 일은 없습니다.”
“좋다. 국경에 대한 병력을 증편하라. 또 그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최대한 지원하라.”
황제의 명령에 따라 공작은 오그리아와의 국경에 군대를 증파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탈주한 오그리아군의 소재를 파악해 접선을 시도했다.
접선에 성공하자 그들의 대표와 태훈을 연결시켰다.
태훈은 그 대표를 만날 수 있었다.
탈주군을 이끄는 자는 전 황제의 수호 기사단 중 한 명이었던 자였다.
“내가 내걸 조건은 단 하나. 나에게 충성을 하는 것이다.”
“세레니스 제국이 내건 조건만 충족시켜 준다면 목숨을 버릴 수 있소.”
“물론 계약은 지킨다. 다만 그대들의 적의와 충의가 단순히 오그리아만을 향하면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 말은?”
“내가 상대할 적은 오그리아 제국뿐만이 아니라는 것이지. 오그리아의 현 황제가 아닌 자들과 싸워도 그대들은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건가?”
그 말에 상대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자신들의 증오는 오그리아의 현 황제였지 다른 곳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기사가 말했다.
“우리에게 충성을 요구하기 전에 당신이 보여줄 수 있는 건 무엇인가?”
네가 가진 패는 무엇이냐라는 물음이었다.
“오갈 데 없는 당신들을 받아들여 주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건가?”
“그늘이 없으면 스스로 만들면 그만이다. 그리고 오그리아에 적대감을 가진 것은 세레니스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텐데.”
말하는 것은 건방졌지만 태훈은 그들이 탐났다.
비록 싸움에서 진 개라고는 하나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쿠데타였다.
그리고 황제 직속의 정규군이라면 실력 또한 정예.
그런 병력 2천을 손에 넣는다는 것은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을 해주면 그대들의 충성심을 살 수 있는지 말해라.”
“한 인물을 데려와 주시오.”
“인물?”
기사는 전 황제의 핏줄 중 하나를 데려와 달라고 했다.
“전 황제의 권속이 살아 있나?”
“사생아가 한 명 있소. 그 존재는 나와 내 상관이었던 기사 단장만이 알고 있지.”
그러면서 그 사생아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내가 오그리아에 이 정보를 넘기고 화평을 주도한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당신부터 칠 것이오.”
그의 확고한 대답을 들은 태훈은 웃었다.
그리고 3일만 기다리고 했다.
그러곤 뮤즈와 함께 국경을 넘었다.
한적한 지방 영지에서 사람 한 명을 빼내오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수백, 수천, 수만의 병력과 싸우는 것과 비교하면 식은 죽 먹기였다.
목표를 찾자 태훈은 오는 길에 곳곳에 만들어둔 마법진을 사용했다.
마나석과 함께 그려진 마법진은 8클래스 마법인 워프였다.
최상급 마나석이 들어가지만 단거리 워프만이 가능한 물건이었다.
약속 장소인 자치령에 다다랐을 때는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여……. 여긴 어딥니까? 왜 사람을 납치하는 겁니까?”
그는 집에서 쉬고 있다가 끌려왔다.
갑자기 자신을 따라오라는 남자.
그것도 시간이 없으니 검을 들이밀며 따라오라 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공사장 같은 곳으로 끌려온 그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납치라니. 듣기 안 좋구만. 이쪽은 위험을 감수하고 데려온 건데.”
“바라지 않았습니다. 왜 나를 끌고 온 겁니까?”
“당신을 데려와야만 내 일이 편해지거든. 그리고 당신만 피해 본 건 아니야. 나는 신혼 중이라고.”
잠시 후 말을 타고 나타난 기사는 평복을 입은 상대를 보고 그의 앞에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에레니스 님?”
끌려온 남자는 자신 앞에서 무릎을 꿇은 자를 안다는 듯 이름을 불렀다.
“다시 뵙게 되어 다행입니다. 아루스 폐하.”
“폐하? 갑자기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아루스는 기사 에레니스를 몇 번인가 보았었다.
기사라며 자신을 소개했던 그는 꽤 오래전부터 자신이 살던 지방에 일 년에 한 번씩 놀러왔었다.
그때마다 자신이 사냥을 안내했고 그 보수를 받았었다.
“아루스 님은 전 황제의 아드님이십니다.”
에레니스라는 기사는 자초지종을 모두 설명했다.
황제의 명령에 의해 매년 한 번씩 그의 상태를 살피러 갔던 것.
일반적인 보수를 훨씬 상회하는 보수를 지급한 것도 황제의 명령이었던 것을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아루스라는 남자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 어머님은 그저 아버지가 방랑 용병이라고 하셨는데.”
“아루스 님은 오그리아 제국을 되찾으셔야 합니다. 저희와 함께해 주십시오.”
“그……. 그런…….”
혼란스러워하는 아루스 옆으로 다가간 태훈이 기사를 향해 말했다.
“이번엔 그쪽이 약속을 지킬 때인 것 같은데.”
“염치없지만 한 가지만 더 약조해 주시오.”
“이건 계약 위반 아닌가? 뭘 더 하라고?”
“약속은 지킵니다. 우리는 당신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겠습니다. 다만 여기 있는 아루스 님을 끝까지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이분은 유일한 정통 후계자입니다.”
그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존대를 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워하는 아루스를 한번 흘겨본 태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약속하지.”
“고맙습니다. 앞으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인원은 언제쯤 합류할 수 있나?”
“이미 와 있습니다.”
에레니스는 입에 손을 가져다대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삐-익-
그의 휘파람은 고요한 공터에 울려 퍼졌다.
공터를 넘어 숲까지 퍼진 소리가 잠잠해졌을 때.
바람 한점 없는 숲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숲에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원 무장을 한 병력이었고 오그리아 제국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요새를 건설 중인 공터를 애워싼 병력을 보고 태훈은 놀랐다.
‘이만한 인원을 내가 눈치채지 못했다고?’
기척조차 느끼지 못한 태훈은 그들이 상당한 정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달빛에 드러난 병력을 보며 감탄하고 있을 때 기사가 말했다.
“오그리아 해방군. 현 시간부로 크로이츠 공국군으로 편입합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