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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태훈을 조사한 이유는 자작가의 실종사건 때문이었다.

법정은 그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있었다.

최근에 트러블이 있었고 치안대로부터 그의 저택 근처에서 벌어진 싸움에 대해서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실한 알리바이와 고위 귀족들의 압력에 못 이겨 그를 풀어주어야만 했다.

태훈은 자작가가 가면의 조직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주변인들이 더는 휘말리지 않기 위해 알의 충언대로 하기로 했다.

“자치령을 받고 싶다고?”

“네, 그렇습니다.”

제국이란 나라가 쉽사리 자치령을 내어줄 리가 만무했다.

하여 태훈은 오그리아 제국을 끌어들였다.

오그리아 제국의 정권 교체로 인해 세레니스 제국도 혼란 상태였다.

태훈은 오그리아와 세레니스의 국경 근처에 자치령을 세우고 싶다고 했다.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곳에서 세레니스의 방패가 되어보겠다는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세레니스의 영토와 허락을 얻을 생각이었다.

세레니스 입장에서는 태훈이 막강한 상회 자본력으로 국방의 일부를 담당하는 결과가 되었다.

거기다 그가 원하는 자치령의 규모는 지방 남작령보다도 작은 수준이었다.

“갑자기 자치령을 원하는 이유가 뭔가?”

“이번에 자작가가 사라진 데에는 그 정체불명의 집단이 관련된 것 같습니다.”

“그놈들이 경제적인 측면을 노리고 있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군.”

공작은 태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태훈은 자치령을 받게 되면 일정량의 공물도 바칠 것이라 약속했다.

제국이 자치령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사이 태훈은 공국에도 이를 알렸다.

공국에서도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훈은 자치령을 하사받을 수 있었다.

세레니스의 아들뻘 되는 국가라는 개념의 자치령이었다.

그는 제국의 남작 신분과 공국의 의원직을 내려놓았다.

자치령으로 받은 자치령은 제국 수도의 절반 정도 크기였다.

태훈은 그곳에 가용 가능한 모든 자원을 쏟아부었다.

축구장 10개 규모의 요새, 수십 개의 창고.

그리고 추가로 만들 공방까지 모조리 자치령에 세울 계획을 세웠다.

자치령 공문이 귀족들에게 내려온 날 많은 수의 귀족들이 반발했다.

미리 말해둔 오일 경과 바스테리온 공작이 그들을 수습했으며 알을 통해 유력 귀족 가문에 뇌물을 뿌렸다.

그 결과 귀족들의 반발은 금세 잦아들었다.

자치령의 크기가 지방 남작이 가질 법한 크기보다도 작은 것.

위치가 오그리아 제국과의 접경지대라는 것에 귀족들은 배 아파하지 않았다.

그래도 태훈에게 뛰어온 귀족이 있었으니 보스완 백작가와 번즈 남작가였다.

자신을 보호해 주기로 한 사람이 갑자기 자치령의 주인이 되어 제국을 나간다 하니 놀란 번즈 남작이 찾아온 것.

태훈은 염려 말라며 손을 써두었다고 어린 그를 타일렀다.

보스완 백작은 난감한 듯했다.

혼인도 혼인이었지만 그는 태훈이 장래가 촉망한 귀족으로 봤던 것.

그런데 자치령의 주인이 되면서 제국 귀족직과 공국 의원직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백작에게 있어 가슴이 찢어지는 소식이었다.

“어찌 보면 남작보다 더 높은 신분입니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백작은 뭔가를 더 말하려는 듯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그의 말도 아예 틀린 것이 아니었고 가장 중요한 것은 딸아이의 출가였다.

“그럼 식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자치령이 준비되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그사이 결혼식을 하려 합니다.”

보스완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첼도 소식을 듣고는 혼례가 어찌 되는 것인가 노심초사 하고 있었다.

결혼은 문제없이 진행한다는 소식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태훈은 간소하더라도 결혼을 서둘렀다.

결혼은 보통 신전이나 신랑이 되는 가문의 자택에서 진행했다.

제국은 총국과 현재 냉랭한 분위기였기에 태훈은 자택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결혼식 전날 태훈은 한껏 꾸며진 저택을 둘러보고 있었다.

“기분이 어떠십니까?”

“솔직히 좀 착잡해.”

첫 결혼이라 들떠야 하는 것이 정석.

하지만 태훈은 그보다도 고민거리가 더 많았다.

“이 시국에 결혼을 하는 게 맞는 건가 싶기도 하다.”

“레이첼 영애는 왕자님의 버팀목이 되어 줄 겁니다. 그런데 언제 진실을 말해줄 겁니까?”

알의 말에 태훈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레이첼 영애는 불 속으로 뛰어드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음, 너무 서두르다 보니까 타이밍을 놓쳤어.”

“그럼 어차피 늦은 거 자치령으로 옮길 때까지 비밀로 하시죠.”

“…….”

태훈은 잠시 멍하니 전방을 응시했다.

그러더니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알은 별말 없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 내리질러 달려간 곳은 보스완 백작가였다.

그는 익숙하게 벽을 타더니 창문 하나를 두드렸다.

잠시 후 창문을 열고 나타난 인물은 레이첼이었다.

그녀는 잠옷을 입고 있었고 그를 보자 깜짝 놀라했다.

“남작님. 왜 거기 매달려 계시는 거예요?”

“……주무시고 계셨다면 미안합니다. 오늘 꼭 드려야 할 말이 있어서요.”

“…….”

레이첼은 잠시 그를 응시했다.

태훈의 약간 서글픈 표정을 보고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그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레이첼은 침대에.

태훈은 의자에 앉아 서로를 마주 바라보았다.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하지. 모든 걸 다 말해야 하나.’

생각에 잠겨 있던 태훈은 결심한 듯 입을 움직였다.

“사실은…….”

“내일 결혼식은 아름답겠죠?”

“네?”

말을 가로채는 레이첼 탓에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네, 내일 결혼식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진행될 수 있을 겁니다.”

“남작님은 저를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게 맞나요?”

“……물론입니다. 저는 당신의 행복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할 겁니다.”

“그럼 아무 문제없네요. 저는 웃으면서 내일을 맞이하고 싶어요.”

“……저는 꼭 드려야 할 말이 있습니다.”

“남작님에게 비밀이 많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눈칫밥을 먹은 지 오래되었거든요.”

“하지만…….”

레이첼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 역시 남작님을 생각하는 마음은 같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든 당신의 반려로써 그에 걸맞는 행동을 보이겠습니다. 그러니 오늘 밤은 푹 주무시고 내일 뵈어요.”

태훈은 레이첼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문으로 다가갔다.

“늦은 밤에 죄송했습니다.”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그녀가 손을 흔드는 것을 보며 태훈은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지붕을 타며 저택으로 돌아가는 그는 큰 짐을 던 기분이었다.

* * *

끼익-

침대 옆에 있던 가구의 문이 열렸다.

거기엔 포동포동한 여성 하나가 몸을 욱여넣고 있었다.

“저 사람이 소문의 크로이츠 남작인가.”

“네, 맞아요. 이제 남작은 아니지만요.”

레이첼은 그녀를 향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

가구 속의 여성은 레이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도와줘. 혼자선 못 나가.”

레이첼이 그녀를 도와주자 간신히 가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빠져나온 여성은 레이첼보다 조금 작은 키를 가지고 있었다.

여느 다른 귀족 영애들처럼 뚱뚱하다기보단 포동포동한 느낌이었다.

“뭔가 중요한 말을 하려던 것 같던데 안 들어도 돼?”

“지금은요. 그리고 공주님이 계시는데 비밀을 말하게 할 순 없죠.”

“뭐야? 너랑 나 사이에 비밀이 어딨어!”

“저랑 공주님 사이에 비밀은 없지만 저분의 비밀은 지켜야죠.”

“쳇, 벌써부터 아내 흉내 내는 거야?”

그녀는 세레니스 제국의 막내 공주.

레이첼이 소설을 공유했다던 비밀 친구였다.

레이첼과 공주의 접점은 책이었다.

두 명 모두 책을 사기 위해 시내로 나갔다가 서점에서 만났던 것.

당시엔 서로가 행색을 바꾸고 신분을 감추었기 때문에 서로가 누군지 몰랐다.

시간이 지나고 친분이 두터워졌을 때 서로의 신분을 알 수 있었다.

공주는 레이첼이 주는 소설을 보며 마찬가지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어느새 그녀도 태훈이 쓰는 책의 팬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레이첼의 결혼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결코 행복하지 못했던 친구의 결혼 소식에 그녀는 태훈에 대해 조사를 지시했다.

어떤 남자인지.

다른 남자들처럼 그녀를 가지고 노는 것은 아닌지.

하지만 베일에 싸인 그의 정보를 알아내는 것은 힘들었다.

그 정도로 비밀이 많은 자이기에 공주는 레이첼이 걱정되었다.

“비밀이 많은 자잖아. 그 비밀을 말하려고 온 것 같은데?”

“하나씩 알아가면 되죠. 그리고 그걸 안다고 제 결정은 바뀌지 않아요.”

“아주 그냥 열녀가 나셨어.”

“그런데 정말 오늘 안 돌아가셔도 되요?”

공주는 태훈이 앉았던 의자에 앉았다.

결혼을 하면 쉽게 볼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 공주는 몰래 궁을 빠져나왔던 것이다.

“책도 돌려줘야 했으니까. 저 남자가 책 돌려본 것 때문에 화가 났다면서.”

“그건 공주님이 풀어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저자는 공식적으로 자치령을 가진 자야. 내가 쉽게 대하지 못해.”

공주가 책 좀 봤다 한들 남작이 뭐라 할 것이냐라고 말할 참이었다.

하지만 명색이 공왕이면 제국의 공주가 함부로 대할 상대가 아니었다.

거기다 공작은 물론이고 황제도 그를 나쁘게 보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화는 풀어주셔야 해요. 저 내일 결혼식이라고요?”

“약속은 지켜.”

“그리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세요.”

“뭐? 왜? 나 간신히 빠져나온 거라고!”

“결혼 당일 날 신부 얼굴이 퀭해서 되겠어요?”

“쳇.”

공주는 혀를 한번 차더니 그녀의 방문을 열었다.

“그럼 내일 보자.”

“조심히 가세요.”

?

날이 밝자 태훈의 저택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규모가 작다고는 하나 공식적으로 황제가 인정한 공국의 공왕과 제국 귀족의 혼례였다.

“축하하네!”

“어서 오십시오, 오일 경.”

“새 신랑 신수가 훤하구만!”

오일 경은 그의 어깨를 치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크흠, 지금 신분은 나보다 높지.”

“그냥 평소처럼 대하시면 됩니다. 하하하.”

오일 경을 비롯해 바스테리온 공작도 참석하는 자리였다.

그랬기에 수도에 있는 대부분의 귀족들이 참석하면서 저택은 사람들도 바글바글했다.

주례는 바스테리온 공작이 맡았다.

우레 같은 박수를 받으며 태훈이 입장을 하고 이어 보스완 백작이 레이첼을 데리고 나타났다.

전통 예복을 입고 나타난 레이첼은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본래 없는 치장이었지만 레이첼이 강력하게 원했었다.

한창 주례가 진행되고 마지막에 공작이 물었다.

“두 사람은 언제까지고 함께하겠는가?”

공작이 묻자 두 사람은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반려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전통적인 관례에 따른 대답이었다.

“이로써 크로이츠 공왕과 레이첼양의 혼례가 이루어졌음을 나 바스테리온 공작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식이 끝나면 신부는 그대로 시집온 신랑의 가문에 머물게 되었다.

축하연이 시작되자 레이첼은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방으로 돌아갔다.

태훈이 돌아다니며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을 때 한 인물이 다가왔다.

“당신이 소문의 남자인가.”

통통한 여자아이가 자신을 올려다보며 반말로 말하자 그녀를 응시했다.

옆에는 식장에서 유일하게 무장을 하고 있는 기사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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