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문이 열리자 뮤즈는 몸을 숨겼다.
문이 열리며 들어온 것은 병장기로 무장한 사람들이었다.
“무슨 짓들인가? 여긴 남작가다!”
알이 호통을 쳤지만 맨 앞에 있던 기사는 아랑곳 하지 않고 태훈의 앞으로 다가갔다.
“크로이츠 남작님 되십니까?”
태훈은 그의 가슴에 붙은 문양을 보았다.
일반 치안대가 아닌 귀족들의 범죄를 다루는 곳에 소속된 자들이 지니는 문양이었다.
“내가 크로이츠인데. 무슨 일이기에 오밤중에 이 난리를 피는 거지?”
“남작님을 중요한 참고인으로 소환하라는 법정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는 태훈에게 종이를 하나 내밀었다.
일종의 영장 같은 것으로 공작의 서명과 법정의 이름이 서명되어 있었다.
“참고인? 무슨 일의 참고인인가?”
“그것은 법정님이 말씀해 주실 겁니다. 같이 가주시겠습니까?”
알이 조심스레 태훈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시면 안 됩니다.”
“정식으로 발부된 영장이야. 안 가면 항명하는 거다.”
태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 따라가지. 병력을 물리게.”
태훈이 방을 나서자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경비대와 유리아가 눈에 보였다.
“남작님!?”
“아, 별일 없을 거야. 이봐, 병력을 물려.”
태훈이 쏘아보자 상대는 부하들을 물렸다.
태훈은 알에게 오일 경과 공작에게 알리라 지시했다.
마차에 오르는 태훈을 보며 유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차가 출발하자 손에 든 검을 팽개치며 알에게 따졌다.
“이대로 남작님을 보내도 괜찮은 건가!?”
“저들은 남작님 털끝하나 못 건드려. 그건 내가 장담하지. 넌 오일 경한테 달려가. 난 공작가로 가서 알리겠다.”
알은 그 말을 끝으로 말을 타고 사라졌다.
유리아도 자신의 검을 챙기고는 오일 경의 저택으로 말달렸다.
* * *
대륙 동북부에는 거대한 산맥이 있었다.
공국보다 북쪽에 있는 이 산맥은 험준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그곳은 사시사철 눈으로 덮여 있어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그런 그곳에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얼핏 보면 사람 같은 것들은 두터운 가죽 옷을 입고 사냥을 나섰다.
노루나 곰 같은 사냥감을 발견하면 수백 미터 밖에서 창을 날려 단번에 몸을 꿰뚫었다.
사냥감을 살피던 인물에게 한 인물이 다가갔다.
“족장, 신관이 찾습니다.”
“신관이?”
둘 다 가죽 외투에 달린 모자를 눌러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흰 입김이 길게 뿜어져 나왔다.
족장이라 불린 사내는 자신의 창을 빼낸 뒤 산양을 들쳐 멨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절벽이었다.
절벽 곳곳에는 굴이 파여 있었고 가죽옷을 입은 자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잡아온 산양을 내려놓은 자는 한쪽 굴로 들어갔다.
굴로 들어가며 벗은 얼굴은 사람과는 여뭇 달랐다.
푸른빛의 비늘이 얼굴 군데군데 나 있었고 동공은 파충류처럼 매서웠다.
“신관? 나를 찾았소?”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신탁?!”
족장은 신관을 향해 다가가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내 다시 움직이더니 신관의 앞에 주저앉았다.
“신탁이라니. 수천 년간 신탁은 없었다고 들었는데.”
“그 신탁이 방금 내려졌소.”
“뭐라 하던가. 드디어 우리를 양지로 이끌어주신다던가?”
“그렇소.”
신관의 말에 족장의 얼굴이 밝아졌다.
“드디어……. 우리 종족도 죄를 면제받는 것인가.”
“좋아하기는 이르오.”
신관은 신탁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족장의 얼굴은 어두웠다.
“쉽게는 안 된다는 건가.”
“하지만 이것은 기회요. 단번에 영웅으로 추대받을 수 있는 기회.”
족장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신탁은 한 인간 남자를 따라 세상의 위기를 극복하라는 것.
위기를 극복하면 종족에게 내려진 저주를 풀어줄 것이라는 것이었다.
“거부권은 없는 건가?”
“그런 말은 없었소. 하지만 다가오는 위협을 외면할 경우 종족뿐만이 아니라 세상이 위험할 것이라 했소.”
“……목숨을 걸어야 할 만한 일이라는 거군.”
쉽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신탁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따라야 할 인간의 정보는?”
“산을 내려가면 마중 나오는 자가 있을 것이라 하셨소.”
족장은 모든 부족원을 모았다.
모인 숫자는 이백이 조금 넘는 숫자.
족장을 통해 신탁을 들은 자들은 술렁였다.
“이 설산에 갇힌 지 어언 수천 년이 흘렀소. 구태여 산을 내려갈 필요가 있습니까?”
“신탁을 거부하면 세상이 위험해진다 하지 않나.”
“그 정도의 위기인데 우리들만으로 극복이 가능한 것이오? 죽음을 앞당기는 것이 아니고?”
부족은 둘로 나뉘었다.
신탁을 거부하자는 쪽.
세상이 망할 정도의 일에 나섰다가 명줄만 재촉한다는 것이었다.
부족원들의 설전이 오고가는 가운데 족장의 눈이 한쪽으로 향했다.
자신이 잡아온 산양을 해체하는 어린아이들이었다.
성인 남자 여자들은 모두 사냥을 담당하고 있었다.
사냥을 나간 동안 비워진 마을을 관리하고 살림을 꾸리는 것은 어린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산양의 뿔을 자신의 머리에 가져다 대며 웃었다.
그것을 본 족장은 마음을 굳혔다.
“선조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우리는 이 산에 갇혔다. 어차피 망할 세상이라면 나는 아이들에게 이곳과는 다른 곳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그 말에 주위는 숙연해졌다.
자신들도 눈 덮인 산 말고는 다른 세상을 본 적이 없었다.
내심 산 아래의 세상이 궁금해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갑시다. 여기 머물러봤자 구차하게 좀 더 사는 것밖에 더 되겠소?”
“그래요, 잘하면 우리도 제대로 된 세상에서 살 수 있는 거잖아요.”
순식간에 여론은 신탁을 따르자는 쪽으로 굳혀졌다.
여론이 모아지자 족장은 모두에게 짐을 싸라고 지시했다.
“엄마, 우리 어디 가?”
“이제 산을 내려간단다.”
“정말? 그럼 바다도 볼 수 있는 거야?”
아이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앞다퉈 굴로 돌아갔다.
설레기는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의 등에는 살림살이들이 실렸다.
아이들도 씩씩하게 짐낭을 들쳐 메며 웃었다.
“신관. 갑시다.”
족장은 부족원 중에서 가장 나이가 지긋한 신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500살이 넘은 나이 탓에 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신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여기 남겠소.”
“무슨 말인가? 여기서 혼자 얼어 죽겠다는 건가?”
“여기는 선조들의 무덤이 있는 곳. 나는 여기 남아 그대들의 무운을 빌겠소.”
“내 부모의 무덤도 있는 곳이오. 당신 혼자 남는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어. 우리와 갑시다.”
족장은 재차 손을 내밀었다.
신관은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족장은 잠시 신관을 바라보다 이내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
“몸조심하시오. 먼저 가거든 우리 앞길을 빌어주시오.”
“다른 이들을 부탁합니다.”
족장이 굴을 나가자 신관은 그의 등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행렬이 길게 늘어섰다.
날씨가 매섭고 눈발이 흩날렸지만 그들은 불평 한마디 없이 걸었다.
삼 일이 지나자 눈이 녹은 곳이 보였고 자갈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타난 돌무더기.
대대로 그 돌무더기를 벗어나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었다.
몇몇 부족원이 돌무더기를 넘었지만 몇 발짝 걷지 못하고 쓰러졌었다.
돌무더기 앞에서 족장이 멈추어 섰다.
‘여기를 넘어갈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족장은 뒤를 바라보았다.
자신들 종족이 수천 년간 살아왔던 고향.
구름에 가려 꼭대기는 보이지도 않았다.
족장이 돌무더기를 지나치자 다른 이들도 걷기 시작했다.
과거 몇몇 선조가 쓰러졌던 위치를 지나도 쓰러지는 이가 없자 족장은 안도했다.
“살아서 이곳을 벗어날 줄은 몰랐는데…….”
“족장, 저기.”
한 남자가 앞을 가리켰다.
거기엔 푸른 머리의 여성이 서 있었다.
“이 기운은…….”
멀리 있음에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족장은 무리를 이끌고 여자에게 다가갔다.
여자 앞에다가 서자 족장이 무릎을 굽혔다.
그를 따라 뒤따르던 이들도 무릎을 굽혔다.
“신의 사자를 뵙습니다.”
“왜 이제 내려와?”
“네?”
“너네 때문에 내가 이 추운 데서 며칠을 보낸 줄 알아?! 여긴 특별한 곳이라 현신해서 있어야 한단 말이야!”
여자의 짜증에 족장은 당황했다.
“죄송합니다. 무리 중에 아이도 있어서.”
“됐어. 이거나 받아!”
푸른 머리의 여자는 족장에게 꾸러미 하나를 던져주었다.
족장은 바닥에서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이게 무엇…….”
“난 분명히 전해줬다? 그럼 이만.”
그 말을 끝으로 여자의 모습은 사라졌다.
족장은 담담하게 일어나 주머니의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거기엔 지도와 함께 편지가 들어 있었다.
편지에는 가야 할 곳의 지명과 찾아야 할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찾아가라는 건가?’
족장은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산을 더 내려갈수록 녹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감탄하기 바빴다.
흐르는 냇물을 발견했을 때 사람들은 이미 냇가로 다가가고 있었다.
“물이 이렇게 흐르고 있다니.”
“아빠, 여기선 불을 안 피워도 물을 마실 수 있어!”
사람들은 들뜬 기분을 감추지 않았다.
“족장.”
“음? 왜 그러나?”
“어디로 갑니까?”
“지도가 있다. 그곳에 가서 기다리면 된다고 편지도 있더군.”
“그런데 괜찮습니까? 인간들은 우리를 미워할 텐데요.”
그들은 선조들의 실수를 알고 있었다.
그로 인해 저주를 받고 고립된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인간들도 자신들의 역사를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걱정하지 마라. 신탁이니 어떻게든 되겠지.”
그들은 길을 따라 정처 없이 걸었다.
길이 없으면 산을 타고 강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며칠을 걸었지만 인간을 마주친 적은 없었다.
부족원들은 불만 하나 없었다.
손쉽게 땔감을 구할 수 있었고 사냥감도 천지에 널렸으니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따금 만나는 몬스터들은 그들을 보고 알아서 도망쳤다.
족장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약간의 고저가 있는 언덕이었다.
“여기다.”
“여기가 약속된 장소입니까?”
“따듯하군.”
두꺼운 가죽 옷은 벗은 지 오래.
이들의 피부에는 군데군데 딱딱한 비늘이 자라나 있었다.
비늘의 색은 저마다 달랐고 빛에 반짝였다.
“그런데 왜 아무도 안 보이는 겁니까? 여기서 만나기로 한 것이 아닙니까?”
“곧 오겠지. 시간은 써 있지 않았다.”
족장은 머물 장소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순식간에 캠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기서 3일을 지냈다.
그리고 4일째 되던 날 아침.
지평선 너머로 그림자가 보였다.
간이 천막에서 나오던 족장은 그림자를 지켜보았다.
말을 타고 달려온 것은 여성이었다.
말을 처음 본 족장은 신기해했다.
상대도 족장을 보자 놀란 것 같았다.
말을 타고 있는 자신과 눈높이가 같은 자를 보고 놀란 듯했다.
하지만 이내 당당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대들이 신탁으로 보내져 온 자들인가?”
“그렇소. 그대가 약속된 자입니까?”
“나는 내 주인을 대신해서 왔다. 전부 몇 명인가?”
“어른과 아이를 합쳐 모두 이백이 조금 넘습니다.”
여성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린아이도 성인의 키와 다를 바 없었다.
“모두 짐을 챙겨 따라라. 내 주인께 안내하마.”
“당신과 당신 주인의 이름을 알려주시오. 이름도 모르는 자를 따라갈 수는 없소.”
여성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 이름은 유리아. 내 주인은 크로이츠 공국의 공왕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