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보스완 백작가는 다른 때와는 달랐다.
평소 레이첼과 단둘이 있는 상황과 달리 이번에는 보스완 백작과 그의 부인이 동석했다.
“결혼 말입니까?”
보스완 백작은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정식으로 교체를 신청한 후 이제 막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뿐이니 꽤나 급한 진행이었다.
“빠른 감이 없진 않지만 두 사람의 좋다면야 시간이 문제인가?”
“그럼요, 무엇보다 두 사람의 의지가 중요한 걸요.”
백작 부부는 태훈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간 둘을 지켜봐 오면서 나름 판단한 것이 있었다.
크로이츠 남작이란 자의 취향은 굉장히 독특했고 타인과는 정반대였다.
그런 그가 진심으로 레이첼과의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랬기에 이번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상대는 재력도 충분했고 제국 고위층과도 연줄이 있는 자였다.
거기에 공국의 귀족까지 겸하고 있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저는 좋습니다.”
“오, 그게 정말인가!”
태훈의 입에서 긍정과 수락의 의미가 담긴 답이 나오자 보스완 백작 부부는 크게 기뻐했다.
당사자인 레이첼도 조용히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녀도 태훈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지 오래였다.
그래서 전날 밤 보스완 백작이 찾아와 통보에 가까운 결혼 계획을 말해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미룰 필요가 있나? 당장 날짜를 잡는 것은 어떠한가.”
“날짜는 제가 신관에게 물어 잡도록 할게요.”
백작 부인은 날짜는 자신이 잡겠다며 나섰다.
“어허, 이 사람이 너무 경망스럽구만. 먼저 양가 상견례부터 하는 것이 순서이거늘!”
“그, 그렇죠. 너무 경사스러워서 그만.”
머쓱해하는 백작 부인을 향해 태훈은 괜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미처 세 분께 드리지 못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에 세 사람은 가슴이 철렁였다.
“미처 못 한 말이라니?”
“결혼은 좋다 하지 않았습니까?”
백작 부부가 당황했다.
레이첼도 근심 어린 눈빛으로 태훈을 바라보았다.
“죄송하지만 상견례는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왕자 신분을 버린 지 오래니 상견례는 불가능했다.
백작 부부와 레이첼은 잠시 놀라는 듯했다.
“그럼 혼자서 그 위치까지 오른 건가요?”
“저는 본래 공국 출신입니다. 공국은 실력과 자본만 있으면 얼마든지 신분 상승이 가능하죠. 어릴 때 물려받은 얼마간의 재산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정이 있었군. 미처 살피지 못한 점 미안하네.”
백작의 사과에 태훈은 손을 들어 괜찮다는 뜻을 보였다.
그러곤 레이첼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그것 때문에 뭔가 불편하시거나 꺼리시는 게 있다면…….”
“그럴 리가 있나? 우린 그 정도는 신경 쓰지 않아.”
“그럼요, 오히려 자수성가한 본보기로 자랑하고 다닐 만한 일인걸요!”
백작 부부는 행여 일이 틀어질까 강하게 부정했다.
배경이야 어떻든 상대는 미래가 유망한 재벌 귀족이었다.
하물며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애물단지 딸을 데려가 준다 하는 인물.
천애고아라도 적국의 첩자만 아니라면 내어줄 의향이 있었다.
“그럼 레이첼 양은…….”
“레이첼도 그런 건 신경 안 쓸거네. 안 그러냐?”
백작 부부의 매서운 눈길을 받은 레이첼은 놀랐다.
하지만 그녀도 상대의 배경 따위는 그동안 안중에도 없었다.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작은 크게 웃었다.
“그럼 날을 잡는 게 어떤가?”
“그렇게 하도록 하시죠. 그럼 수일 내로 예물을 준비하겠습니다.”
일사천리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백작 부부는 흡족해하며 저택 안으로 돌아갔다.
둘이 남자 레이첼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음, 이야기가 금세 진행이 되어버렸네요.”
“죄, 죄송합니다. 부모님이 성격이 급하셔서…….”
“아닙니다. 언젠가는 꺼낼 이야기였는데요.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입니다.”
태훈이 웃자 레이첼의 고개는 더욱더 내려갔다.
그러던 중 태훈은 지난번 레이첼이 꺼냈던 친구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 친구분하고는 이야기가 됐나요?”
“아, 네. 언제든지 한번 보자고 합니다.”
“그럼 결혼 소식도 그 친구분한테 알려야겠네요.”
“네, 아마 축하해 줄 것 같아요.”
이야기를 오래하고 싶었지만 태훈도 흥분 상태였다.
자신의 의지로 결혼이 진행되려 하고 있었다.
거기다 상대는 자신의 기준에 있어 외모와 성격 면에서 최상의 상태.
“그…….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 사……. 살펴가세요.”
쭈뼛거리며 백작가를 나온 태훈은 마차에 올랐다.
마차에 오르는 그를 보며 대기하고 있던 유리아가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음? 그래 보여?”
“네, 기분 나쁠 정도로 웃고 계셨습니다만.”
유리아는 결혼이 결정됐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놀라워하지 않았다.
“잘되셨군요. 백작가와 연을 맺으면 남작님의 출셋길에도 도움이 될 테죠.”
“그런 거 없어도 출세할 수 있어. 뭣보다 출세는 하지 않아도 돼. 그보다 높은 데도 있어봤으니까.”
“네?”
“그나저나 너랑 알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야?”
“출발합니다.”
유리아는 태훈의 말을 무시한 채 마차를 출발시켰다.
저녁이 되어 상회에서 일을 마친 알이 돌아왔다.
이야기를 들을 알은 좋은 소식이라면서도 걱정했다.
“지금 시점에 괜찮을까요?”
“그게 걱정이긴 해. 하지만 그쪽에서도 미룰 입장은 아니잖아.”
가면의 조직이 언제 또 간섭해 올지 모르는 상황.
그리고 적들은 빼앗긴 신기를 되찾으려고 움직일게 뻔했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한테는 말했습니까? 펄펄 뛸 텐데요.”
“아직. 이제 부르려고.”
태훈이 뮤즈를 부르자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태훈이 조심스럽게 결혼 소식을 알렸지만 뮤즈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너 괜찮냐? 아무리 기억 일부가 없다지만 주인님이 결혼하려는 거라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알의 조롱에도 뮤즈는 말투 하나 바뀌지 않고 무미건조하게 받아쳤다.
“뭐, 됐어. 난리 치면 오히려 곤란하다고.”
“쳇, 재미없기는.”
알이 재미없다는 식으로 맥이 빠져 있을 때 태훈은 뮤즈에게 번즈 남작가의 경비를 그만두라고 지시했다.
적들의 목표 중 하나가 신기를 되찾는 거라면 뮤즈를 곁에서 떼어놓기엔 위험했다.
대신 알에게 사람을 고용해 번즈 남작가를 감시하며 지키라 했다.
“적당한 용병패들이 있습니다. 상회와 여러 번 거래했으니 충분히 믿을 만합니다. 그보다 한 가지 건의드릴 게 있습니다.”
“건의? 뭔데?”
알은 태훈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자치령?”
“그렇습니다. 오늘 타 상회 지배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알은 세레니스 제국에서 벗어나 공국으로 돌아갈 것은 건의했다.
동시에 제국에게 법치령을 내어달라고 요청해 보라고 했다.
‘자치령이란 게 새로운 법치국가를 말하는 건가?’
“정확하게 그게 뭔데?”
“또 하나의 공국을 만드는 거죠.”
“나라를 만들어?”
나라를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원하지 않아도 눈에 띄게 되었다.
“그래선 왕자 신분을 버린 의미가 없잖아.”
“왕국이나 공국을 만드시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요새 하나를 만드시는 거죠.”
알은 수비적으로 나서서는 싸움에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
신분과 위치를 감추고 싸우자니 병력 확보에 어려움이 크다는 것.
그럴 바엔 제국이나 공국의 도움을 얻어 제대로 된 방어를 하자는 것이었다.
“취지는 알겠어. 그런데 그것보단 제국에 요청해서 지방에 영지하나를 얻는 게 낫지 않아?”
“그러셔도 되지만 제국 법에 의해 사병에 제한을 두게 됩니다. 그리고 귀족들의 서열 싸움에 휘말리게 될 염력도 크죠.”
“병력을 강조하는데 알은 어느 정도를 생각하는 거야?”
“못해도 제국 황실 정예군 정도의 규모는 되어야 할 듯싶습니다.”
세레니스 제국 황실에는 기사단이 존재했다.
그리고 별도로 중앙군 소속이면서 황실 직속 황제 예하 부대가 존재했다.
병력의 수는 2만.
순전히 황제의 명령만 따르는 최정예 군대였다.
“2만이나 되는 정예 병력을 어디서 모아? 전부 용병을 고용하자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대륙에 있는 모든 용병을 합쳐도 그 숫자는 안 될 겁니다.”
알은 태훈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받아 보니 모험가 길드에서 보내져 온 공문이었다.
“오그리아 제국에서 쿠데타?”
“네, 쿠데타 소식이 도착한 건 이틀 전입니다. 오늘 그쪽에서 도착한 상회의 인물에 의하면 쿠데타는 성공했다고 하는군요.”
한 나라의 정권이 바뀌는 것은 타 국가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장사를 하는 입장에서 무역과도 관련되었다.
“그런데 쿠데타랑 병력이 무슨 상관이야?”
“오그리아 제국 전 황제가 부리던 황제 예속 부대가 국경을 넘어 도망쳤다고 합니다.”
알은 그들을 포섭하자고 제의했다.
그 의견에 태훈은 회의적이었다.
일단 그렇게 되면 오그리아 제국과는 적이 되는 것이었다.
적을 늘릴 필요도 없었고 충성심하나로 움직이던 그들을 자신이 부리기엔 뭔가 석연치 않았다.
그럴 바엔 물의 정령왕이 신탁을 통해 보내주기로 한 병력이 나을 듯 보였다.
“그들이 내 명령에 목숨을 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그래도 뭔가 의견이 일치한다면 용병들보다는 믿음이 갈 겁니다.”
“오그리아 제국과는 어떻게 하고?”
“3제국은 서로 견제하는 중입니다. 법치령을 세레니스와 공국 사이에 두면 오그리아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죠.”
오그리아 제국은 세레니스 제국의 서북에, 제국은 세레니스 제국의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전체적인 네 생각은 알겠어. 하지만 일단 법치령이 되려면 제국의 허락이 필요한데 그걸 허락해 줄까?”
자기 나라 바로 옆에 나라를 세우겠다는 일을 좋게 받아들일 나라는 없었다.
“제가 말씀드린 건 국가가 아니라 법치령입니다. 국가가 아니라니까요?”
“그게 그거지. 자기 나라 법이 안 닿는 치외법권 지역인데. 좋아할 녀석이 어딨겠어.”
“그것 역시 태훈님의 해결해야 할 몫이죠.”
“너 이렇게 엉성한 놈이었냐? 상회의 미래가 암울한데?”
“전 전략가가 아닙니다. 다만 현 상태로 볼 때 왕자님의 결혼 상대나 주위 사람 중에 피해자가 나올게 분명합니다.”
그 부분은 전적으로 알의 말이 맞았다.
자신도 정령왕에게 토로했던 것도 병력의 열세.
정령왕이 보내준다는 병력과 함께 자치권을 가진 영토를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흠, 자치령 문제는 좀 더 고민해 보자고. 다른 소식은 없어?”
“몇 개 있습니다. 나쁜 소식부터 말씀드릴까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지.”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태훈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알을 쳐다보았다.
“아버님이라면 카나리스의…….”
“엘리우스 국왕님이 서거하셨습니다.”
“…….”
태훈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아버지인 엘리우스의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 점을 두고 로텐바르와 왕위 서열로 인해 신경전을 벌인 적도 있었다.
“언제?”
“이틀 전입니다.”
“다음 왕위는?”
“로텐바르 님이 이으셨습니다.”
“그렇군.”
태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자신은 큰 애정이 없었지만 국왕이 생전에 자신에게 많은 것을 해주려고 노력한 것은 사실이었다.
선조의 증표를 가진 아이라고 좋아하던 선왕의 표정이 떠올랐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음, 일단 조의를 표해야겠지. 레드크로스 상회……. 아니, 크로이츠 이름으로 조문단을 보내.”
“공국에서 조문단을 보내게 되면 그때 같이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음, 그렇게 해.”
“괜찮으십니까?”
알은 태훈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태훈은 걱정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다시 앉았다.
“문제없어. 다음은?”
다음은 상회의 일들이었다.
전부 매출과 납품 계약으로 인한 좋은 소식들뿐이었다.
하지만 그걸 들으면서도 태훈은 그렇게 달갑지 않았다.
‘그래도 정이라는 게 있었나.’
좋은 시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현생의 부모였던 점이 마음에 걸렸다.
‘괜찮으신 분이었으니 나쁘지 않은 조건으로 환생하시겠지.’
“다음으로 치료 중인 귀족들의 건강 보고…….”
알이 보고를 하고 있을 때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유리아의 고함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