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그게 발동되면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망자의 세계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그곳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지.”
“전에도 그랬나?”
“그렇다. 마도 왕국의 인간들 대부분이 그곳으로 빨려들어 갔지.”
100억 포인트가 없으면 천국으로 가는 문을 열리지 않는다.
망자의 세계라 하면 천국보다는 저승에 가까운 단어.
‘문이 열리면 저승으로 가는 길이 생겨나는 거고. 이걸 계획한 놈은 강탈한 포인트로 천국의 문을 열려는 것인가?’
가면의 조직이 그린 그림을 대략 파악이 되었다.
태훈은 지금 손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자신의 정체와 정체적인 사건의 흐름을 읽고 있는 사람은 알과 뮤즈뿐.
혼자서 많은 것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 불안했다.
“잠깐, 그럼 뮤즈가 신기를 흡수하는 건 무슨 이유야?”
물의 정령왕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몸은 그릇이다.”
“그릇?”
“신기가 모두 모이면 그것을 모아 열쇠로 만들어야 한다. 저승으로 들어가는 길 끝에는 문이 있기 때문이지.”
정령왕은 고대에선 마도 왕국의 왕이 자신의 몸을 열쇠로 만들었다고 했다.
“뮤즈가 그 그릇이라고?”
“내가 생각해 본 결과는 그렇다.”
“이 녀석은 내가 탄생시킨 녀석인데? 고대 왕국이든 그 왕이란 녀석하곤 하등 상관이 없어.”
“그 점이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고대 예언이 이걸 뜻할 수도 있었겠군.”
정령왕은 정령왕들에게 내려오는 예언을 알려주었다.
혼돈을 불러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그는 이야기의 출처를 물었다.
“모른다. 그저 구전으로 전해져 오는 것일 뿐.”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뮤즈가 그 왕이란 놈 대신 그릇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그렇게 볼 수 있지. 결국 그 문을 열려는 녀석은 신기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이 몸을 노릴 것이 분명해.”
모든 것이 정리되자 태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컨대 뮤즈가 신기 두 개를 가지고 있고 정령왕 쪽에서도 가지고 있으니 당장 마법진이 발동될 염려는 없었다.
문제는 늦든 빠르든 그들이 전면으로 뮤즈를 노린다면 상당히 골치가 아파진다는 것이다.
“그놈들은 중간계를 아우르고 있어. 나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데.”
“결국 너는 우리와 손을 잡을 수 없다는 거군.”
그 말에 태훈은 발끈하며 정령왕에게 다가갔다.
“손을 잡고 싶거든 그쪽에서 믿음을 보여라. 선택지가 한정적이라도 거짓말 친 놈하고는 손을 잡지 않아.”
“거짓말이 아니라 감춘 것이라 생각해 주면 좋겠군.”
“말 돌리지 말고. 손을 잡고 싶으면 어떻게 협력할 건지 대답해.”
정령왕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이내 자신 혼자서는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다른 녀석들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건가? 뭘 해줄 건데?”
“지금 그대는 믿고 일을 맡길 존재가 필요한 것이지. 맞는가?”
“일손이 딸리긴 하지.”
“그렇다면 신탁을 통해 그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존재들을 보내주는 게 어떠한가?”
“신탁? 너희가 신도 아니면서 무슨 신탁을 내린다는 거야?”
“어렵지 않지. 신의 능력을 잠시 이용하면 된다.”
“신? 신이 있어?”
“있다.”
태훈은 깜짝 놀랐다.
신이 있다면 당장 불러오라고 성을 냈다.
“너희보다 윗선이 있으면 그 신이라는 존재를 불러와. 이 세계의 존망이 달려 있는 문제잖아!”
“아직 우리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을 신께 알릴 수는 없다.”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그는 말문이 막혔다.
신기 몇 개가 손안에 있으니 문이 열리긴 어렵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신이라면 별 힘들이지 않고 일을 처리 할 수 있을 법했다.
하지만 정령왕은 끝끝내 신에게 알리는 것을 거절했다.
“그렇게 비밀로 하려고 하면서 어떻게 능력을 빌리겠다는 거야?”
“그것은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말해보아라, 몇 명의 인원이 필요한 건가?”
“몇 명? 상대는 전쟁도 일으킬 수 있는 녀석들인데 몇 명으로 되겠어?”
“그렇다면 나라 하나 정도를 밀어주면 되겠나?”
“그것도 안 돼.”
정령왕이 무심하게 말하는 단위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것도 논외였다.
어디에나 그들의 끄나풀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럼 어쩌라는 것인가? 도움을 준다 해도 싫다 하니.”
잠시 고민하던 정령왕은 이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방법 한 가지를 제의했다.
듣고 난 태훈은 반문했다.
“그게 가능해? 그보다 그런 녀석이 있다고?”
“꽤나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없었지만 분명히 있다. 이 제안에는 동의하는 건가?”
“그 녀석들은 강해?”
“너의 능력을 알고 있다. 그 정도는 될 것이다.”
막강한 전력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멋대로라면 그만큼 곤란했다.
“말 안 듣는 놈들은 필요 없어.”
“그 점은 내가 손쓰도록 하지. 그렇다면 우리의 관계는 계속되는 것으로 알지.”
정령왕이 돌아가려 하자 태훈은 급히 막아섰다.
“뮤즈의 기억은 대체 언제 돌아오는 거야?”
“그 점은 나도 알 수 없다. 이 혼종에 대해서는 나도 확실히 알 수 없어.”
그 말을 끝으로 정령왕은 사라졌다.
?
한편 오웬 자작가의 장남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부탁했다.
푸에르코가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것이다.
천성적인 장사꾼인 오웬 자작은 그를 나무라면서 평소 친하게 지내던 귀족들을 찾아갔다.
폭력으로는 해결이 안 되니 정식으로 문제 삼으려 한 것이다.
자신의 아들을 욕보였다는 주제로 귀족 재판을 제안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공작 선에서 무마됐다.
공작이 자신을 막자 자작은 불만을 토로했지만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오웬 자작도 점점 자신의 사업이 위축되자 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미치겠구만. 대놓고 손을 쓸 수도 없고.”
“아버님, 그럼 이 방법은 어떻습니까?”
그웬은 태훈이 종이를 쓸어간 것을 생각하고는 묘안이라며 방법을 제시했다.
“그러니까 그쪽 상회의 물건을 싹 쓸어버리자는 거냐?”
“그렇습니다. 저희가 전부 사버린 다음 차익을 더 붙여서 팔면 되잖습니까.”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오웬 자작가도 다섯 손가락 안에드는 재벌가문이었다.
“그놈들도 상인 밥을 먹었는데 아무 생각 없이 우리한테 다 팔 거라고 생각하느냐?”
“우리인 줄 모르게 다른 상회를 내세우면 됩니다.”
“그놈들 물량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이제 막 화장품 사업에 뛰어든 놈들입니다. 소매점도 하나밖에 없으니 그 녀석들 물량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으음…….”
매점매석은 흔히 있던 일이었다.
다만 자작은 레드크로스 상회의 생산 능력을 전혀 알지 못했다.
물건도 제국 외부에서 받아오고 있어서 파악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계속해서 우리가 차입만 하면 그놈들에게 타격이 가지 않을 텐데.”
“그……. 그 점은 아버님이 생각해 주셔야…….”
그웬의 말에 오웬 자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미련한 놈! 그래서야 장차 가문을 어찌 이끌겠다고!”
상회에서 일하게 하며 몇 년을 굴려먹였지만 아들놈의 성장은 더디기만 했다.
“그나마 뒷골목 놈들하고 어울려 다니면서 뭔가 좀 하나 싶었는데 그것마저 제대로 못 하다니!”
“죄송합니다…….”
“네가 만나는 그 흑마법사를 데려와라.”
오웬 자작은 아들의 행적을 모조리 꿰고 있었다.
불량배들과 함께 흑마법사의 불법 사업을 돕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 알고 계셨습니까?”
“그럼 모를 줄 알았더냐?”
“위험한 녀석들입니다. 아버님께서 직접 만나시는 건…….”
“그래 봐야 내가 너만큼 처신을 못 할까?! 냉큼 불러와!”
그날 밤 그웬은 낯선 이를 하나 데려왔다.
상대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를 본 자작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너희들이 사람들을 인신매매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이디와도 일을 하지 않나?”
“그렇소.”
“그렇다면 뒤를 봐주는 게 3왕자라는 소리군?”
“그렇소.”
상대도 감출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인 자작은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그럼 사람 하나쯤은 쥐도 새도 모르게 데리고 사라질 수 있나?”
“우린 부여받은 일 외에는 하지 않소.”
자신들은 일개 심부름꾼이라며 가면은 거부 의사를 밝혔다.
“불법적인 일을 하는 주제에 뭘 가린다는 거야? 돈이라면 얼마든지 주지.”
“일에 대한 보수는 그쪽 아들에게 충분히 받고 있소. 그리고 우리는 돈을 보고 하는 일이 아니오.”
“뭔 개소리야?”
인신매매는 돈을 보고 하는 일이었다.
자작도 하이디가 3왕자를 등에 업고 하는 장사 중에 노예 장사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네놈들이 하는 인신매매는 뭔데?”
“그것은 대의를 위한 일. 그리고 발설할 이유도 없소.”
오웬 자작은 눈을 지그시 감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돈을 보고 하는 일이 아니다? 그럼 그 사람들은 다 어디다 팔아넘기는 건가?”
“말할 이유가 없다 했을 텐데.”
가면은 이제 말을 놓고 있었다.
목소리에서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이……. 이놈이! 당장 네놈을 위병소에 데려갈 수도 있어!”
“하아?”
되묻는 듯한 말과 함께 가면의 고개가 살짝 꺾였다.
자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화를 냈다.
“네놈이나 하이디 놈들을 깡그리…….”
자작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목에 실선이 가더니 머리가 땅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푸슉!
“흐아아악!”
그것을 본 그웬은 자리에 주저앉으며 괴성을 질렀다.
가면의 손에서 실로 보이는 것이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이래서 예정에 없던 일은 안 늘리는 건데.”
가면은 고개를 도리질했다.
본래 자작가하고는 예정에 없던 일을 벌였었다.
목표량을 빨리 채우기 위함이었지만 자신이 경솔했다 생각했다.
가면이 고개를 돌려 주저앉은 그웬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귀찮은 일은 만들지 말라했는데.”
“사……. 살려주시오! 저…….절대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그웬의 바지가 축축해지고 있었다.
그런 그의 사지가 분리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의 시체를 보며 가면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약도 충분히 시험해 봤으니 더 이상은 필요 없지.”
가면은 집견실의 문을 열고 나섰다.
달빛 아래 저택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음 날, 날이 밝자 태훈은 여느 때처럼 보스완 백작가로 향했다.
그러면서 오웬 자작가의 앞을 지나다가 몰려 있는 사람들을 보고 마차를 세웠다.
그러곤 근처의 위병을 불러 세웠다.
위병은 귀족 마차라는 것을 보자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무슨 소란입니까?”
“아예 간밤에 실종 사건이 있었습니다.”
“실종?”
태훈은 자작가 저택을 바라보았다.
“자작가 저택에서?”
“네, 그렇습니다.”
“누가 실종된 겁니까?”
태훈은 단번에 가면이 떠올랐다.
안 그래도 오늘 중으로 자작가에 들러 아들놈에게 가면의 관계에 대해 따져볼 생각이었다.
“그게…… 전부 사라졌습니다.”
“전부라니? 저택가에 있는 사람들 전부?”
“네, 그렇습니다.”
위병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위병들은 아침이 되면 귀족 저택가를 순찰했다.
아침이 왔다는 타종과 함께 저택가를 순찰하는데 오늘은 경비병도 보이지 않더랬다.
“한참을 기다려도 경비병이 보이지 않고 기척이 없어서 강제 진입했습니다.”
“그랬는데 집에 아무도 없다?”
“네, 그렇습니다.”
“들어가 봐도 되겠나?”
“당장은 안 됩니다. 지금 조사 중이니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 기다리니 저택 쪽에서 위병들이 잔뜩 나왔다.
태훈이 저택의 상태를 물었다.
위병들은 저택은 깨끗했다고 답했다.
침입의 흔적도 없었고 방화나 싸움의 흔적도 없었다고 말했다.
“너무 깨끗한 상태였습니다. 마치 일순간에 사람들이 지워진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들어가 봐도 되겠나?”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됩니다. 왕궁에서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하시라 했습니다.”
태훈은 저택 쪽을 바라보았다.
부득이하게 무리해서 일을 키울 필요는 없었다.
‘일단 조사가 끝나면 와봐야겠군.’
그렇게 생각한 태훈은 다시 마차를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