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대법관과 헤어져 거처로 돌아온 태훈은 침대에 몸을 뉘였다.
지구에서 전해져 오던 허구의 전설이 실현되고 있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했다.
첫째로 가면의 조직 상부의 인물이 지구에서 왔을 가능성.
둘째로 자신이 보았던 마법진이 작동했을 때 저승으로 가는 문이 열린다는 것.
‘대법관의 말대로라면 그 마법진이 작동했을 땐 영화에서만 보던 인류 멸망급 재난이 벌어진다는 건데.’
이미 한번 마법진이 발동했었기에 그는 심란했다.
다만 베닝스가 마법진을 발동했어도 대참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다른 마법진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서둘러 그 마법진을 찾아야 했다.
그는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탁자로 갔다.
그러곤 제국 지도를 꺼내 들었다.
자신이 발견한 마법진의 위치는 지도의 동쪽 끝.
대법관이 그렸던 지도를 떠올리며 대칭을 맞추어보았다.
문제는 발견했던 마법진이 전체 그림의 어느 부위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가장 흡사하게 생긴 마법진은 상단부 오른쪽 그림. 그럼 나머지 위치들은…….’
태훈은 제국 지도 위에 마법진의 배치를 그렸다.
하지만 전체 크기를 알 수 없는 만큼 지도의 척도를 맞출 수 없었다.
적어도 하나의 마법진을 더 발견해야 위치들을 추측할 수 있었다.
대법관은 그에게 손을 잡고 조사하자는 의견을 피력해 왔다.
태훈은 그가 의외로 선한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 평민들의 고혈을 빨아먹어 왔던 총국.
듣지도 않는 포션을 팔아왔던 약팔이들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일단 상아탑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일부 정보만을 교류하기로 했다.
다음 날부터 수도는 소란스러웠다.
총국 소속의 병사와 기사들이 수도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강제로 집 안이나 창고를 조사하는 통에 소란이 벌어졌고 결국 제국 경비대가 출동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총국과 제국이 실랑이를 벌이는 것을 본 태훈은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발견한 마법진은 엄밀히 말하면 공국의 영토였어. 제국 수도가 넓긴하지만 사람이 많은데 구태여…….’
그 순간 태훈은 아차 싶었다.
베닝스가 있던 신전은 지하에 있었다.
제국 수도도 카니르스 수도처럼 지하 수로가 있었다.
그는 이번엔 직접 찾으려 하지 않았다.
비밀이 유출될 염려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제국은 지난번의 신전 포로들에게서도 단서 하나 얻지 못했다.
이미 공조도 한번 했던 터라 그는 공작에게 서신 하나를 썼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지하에 적들의 은신처가 있을 법하다는 개인적인 의견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서신을 받아 본 공작은 지하 수로를 탐색할 것이 분명했다.
지상은 총국.
지하는 제국이 찾아주니 그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아침을 먹고 찾아간 백작가에서 그는 레이첼과 담소를 나누었다.
며칠 사이 레이첼은 태훈에 대한 벽이 많이 허물어진 상태였다.
보통 며칠 만에 자신을 가지고 놀다 버린 사람들과 달리 그는 매일 자신을 찾아와 주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 매일, 혹은 이틀에 한 번씩 소설을 가져다주는 것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다.
“어제 보내주신 내용의 다음은 혹시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이번엔 장편이라 완결까진 시간이 좀 걸려요.”
그는 반지 원정대와 일곱 난장이를 섞어서 쓰고 있었다.
원작이 방대하다 보니 간추려 쓴다 해도 양이 적지 않았다.
“그 드워프는 반지를 찾게 되나요?”
“미리 알려 드리면 재미가 없잖습니까.”
“아하, 그렇죠.”
내용인 즉슨 인간을 사랑한 드워프가 저주를 푸는 반지를 찾아 떠난다는 내용이었다.
저주를 건 것은 저주받은 마녀로 원작에서 보스급으로 나왔던 역할의 대행이었다.
종족 간의 사랑이란 점에서 레이첼은 굉장한 호기심을 보였다.
이곳에서 엘프는 추한 종족이고 오크와 드워프가 각광받는 종족이다 보니 호빗과 드워프는 매치가 잘되었다.
레이첼이 받아 본 소설은 반지 원정대가 꾸려지는 장면에서 끝이 났다.
“음? 그건 못 보던 반지네요.”
태훈은 그녀의 중지에 껴진 반지를 보았다.
척 보아도 상당히 값이 나갈 것 같은 반지.
그러자 레이첼이 황급히 손을 숨겼다.
“아, 이……. 이건…….”
그녀가 피하는 모습을 보이자 태훈의 얼굴이 구겨졌다.
반지란 물건은 보통 이성 간에 주고받는 물건이었다.
“혹시 저 말고 만나는 분이?”
“결단코! 그런 물건이 아닙니다. 이건 그……. 우정의 증표예요!”
“우정의 증표?”
태훈은 집요하게 반지에 집착했다.
결국 오해만 사겠다고 판단한 레이첼은 반지의 출처를 털어놓았다.
“책에 대한 답례? 그 책을 다른 사람에게 주신 겁니까?”
“빌려드린 거예요. 혼자 보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책은 꼭 돌려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그걸 문제 삼는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제가 드린 선물이니 책은 레이첼님 것이죠. 그보다 친구가 있으실 줄이야.”
“저도 칠구 한 명쯤은 있습니다!”
레이첼은 부끄러우면서도 당황한 듯한 목소릴 내었다.
태훈은 그녀가 여태껏 혼자 살아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어 안도했다.
“그 친구분이 혹시 남자…….”
“아닙니다. 저랑 같은 여성입니다!”
“흠, 이미 레이첼님의 말에는 불신이 생긴걸요. 쉽게 믿지 못하겠습니다.”
“그, 그럴 수가…….”
레이첼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자신이 미움을 샀다고 생각한 듯했다.
태훈은 친구라면 같이 한번 보자고 말을 던졌다.
그러자 레이첼은 더욱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건 좀 곤란……. 합니다.”
“그 친구가 정말 여성이 맞습니까? 그럼 소개를 못 시켜줄 이유가 없는데요.”
“노……. 노력해 보겠습니다.”
태훈도 기분이 찝찝했다.
그날은 그렇게 헤어진 태훈은 점심때가 되어 상회로 이동했다.
상회에서는 신품을 유통하기 시작했다.
바로 도자기.
양산이 가능하다는 보고를 받자 즉시 유통을 진행시켰다.
그리고 인물 하나가 합류했다.
부상에서 회복한 파케 영애는 건강한 모습이었다.
“이제 도착한 건가?”
“네, 왕……. 아니, 남작님. 제국이 좋긴 좋네요. 카나리스나 공국하고는 규모 자체가 달라요.”
“영감님은?”
“지금쯤 구시렁대면서 가마나 살피고 있겠죠. 자기만 못 간다면서 구시렁대던데요.”
연구팀의 또 다른 한 명은 새롭게 옮긴 연구실에 남아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영감님은 여기서 추방당했으니까. 짐은?”
“알 님이 저택으로 가져가셨어요.”
태훈이 그녀를 수도로 부른 이유는 시간을 아끼기 위함이었다.
새로운 신약 개발에 편지로 의견을 주고받는 것은 굉장히 번거롭고 시간을 잡아먹었다.
“연구실은 저택 지하에 따로 준비해 놨어. 거긴 저택에서 일하는 고용인도 출입하지 못해.”
그의 말대로 그곳은 오로지 3명만 출입이 가능했다.
태훈과 알, 그리고 유리아뿐이었다.
“낮에는 돌아다녀도 되나요?”
“저택에서 일하는 경비들을 대동하는 선에서.”
그것만 해도 파케 영애에게는 만족스러웠다.
공국에선 그간 밤이 아니면 출입조차 힘들었다.
파케 영애가 저택으로 향하는 동안 태훈은 도착한 도자기들을 관찰했다.
그가 참고한 도자기의 형태는 고려 청자와 조선 백자였다.
물론 들어가는 재료나 제작 기법은 그 시절의 것과는 많이 달랐다.
형태는 가져왔지만 좀 더 은은한 광이 났다.
지구의 것보다 더 발전된 형태로 만드는 데에는 두 사람의 공이 컸다.
본격적인 영업에 앞서 태훈은 유력 집안에 도자기들을 보냈다.
오일 경과 바스테리온 공작에게는 특별히 순금을 녹여 무늬를 새긴 고급품을 보냈다.
그는 여성들의 사치품을 대량 생산을 계획중에 있었다.
도자기는 시작에 불과했다.
기존에는 유리 세공품으로 된 향수가 전부였다.
거기에 은은한 광을 내고 곡선의 미를 살린 자기는 색다른 사치품이었다.
이미 시험작에서 충분한 호응을 보았기 때문에 시장에 대한 반응은 충분했다.
거기에 더할 것은 화장품.
파케 영애는 그간 태훈이 알려주는 성분을 이용해 화장품을 연구하고 있었다.
신약이 나오지 않은 이유였다.
그가 신약보다 화장품의 개발을 택한 이유는 꽤나 심오한 이유에서였다.
의료원의 효과를 톡톡히 본 그는 건강 개선을 위한 책자를 배포했던 전력이 있었다.
하지만 효과는 없었다.
그 이유를 분석한 그는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들은 아프면 그제야 약을 찾는 성향을 보였다.
평상시엔 건강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건강을 챙기는 것은 다름 아닌 여성들이었다.
부인이나 애인이 그들의 건강을 챙겼으나 그들은 공용어를 아는 사람이 적었다.
결국 책자는 외면당했던 것이다.
거기에 여성들은 책보다는 미용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는 일단 귀족이나 평민 같은 신분을 떠나 공통된 관심사로 접근하기로 했다.
그것이 화장품이었다.
여성들은 재와 혼합물을 이용한 화장품을 이용해 미백 효과를 보고 있었다.
물론 발암물질로 똘똘 뭉친 중세시대 화장품이었다.
건강 개선도 할 겸 여성들의 인지도를 얻기로 한 것이다.
상회 관리인 중 하나가 태훈에게 다가왔다.
“주인님. 모든 화물의 하역이 끝났습니다.”
“경비엔 문제없겠지?”
“평소의 3배입니다.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파케 영애와 함께 온 이번 물건들은 전부 상당한 금액이었다.
거기다 자작가 아들놈의 행패도 있었기에 보안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좋아, 물건들은 상회 소매점으로 옮기고 대대적으로 홍보해. 돈은 얼마가 들던 상관없다.”
“화끈하시군요.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상회 일꾼들은 얼마 전 태훈이 대량 매입했던 종이와 양피지를 이용했다.
글은 최소한으로.
그림을 그린 양피지 전단지를 곳곳에 붙이고 종이를 나누어주었다.
판촉비에 아낌없는 투자를 한 결과 그날 오후부터 소매점에는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판매하는 물건은 딱 두 가지였다.
로션과 립스틱.
가장 기본적인 화장품이었다.
하지만 입으로 들어가고 피부에 닿는 만큼 건강과는 직결이었다.
소매점에 물건이 옮겨지는 것까지 확인한 태훈은 저택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태훈은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
창문을 열어 소음의 출처를 보니 정문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자작가 아들놈이 또 행패를 부리는 건가 했다.
하지만 마차들에게 새겨진 문양이 저마다 다르고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의 행색을 보고 태훈은 웃었다.
그들은 다른 상회들의 사람들이었다.
* * *
“이런, 빌어먹을!”
그웬은 탁자를 내려쳤다.
레드크로스 상회의 신상품 입하 소식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오웬 자작가가 주 상품으로 다루는 것은 다름 아닌 사치품이었다.
주 고객층은 귀족이었고 그중에는 여성들의 화장품도 들어 있었다.
사실 화장품은 마진이 엄청나게 남는 장사였다.
주 재료는 타다 남은 잿가루.
거기에 들어가는 기타 화합물은 가격이 쌌다.
입에 바르는 화장품 역시 잿가루에 염료를 사용하면 되었기에 포장만 그럴듯하게 했던 것이다.
그 시장의 판도가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당장 우리도 똑같은 걸 만들어!”
“레드크로스 상품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결과가 나올 겁니다.”
관리인은 식은땀을 흘렸다.
나름 화장품을 만드니 연금술을 배운 자들을 고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관리인이 봐도 레드크로스 상회의 물건을 따라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웬은 화를 삭이지 못했는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수행인 하나 없이 직접 말을 몰고 어디론가 향했다.
그곳은 푸에르코가 있는 곳이었다.
“도련님? 무슨 일로?”
“네가 직접 나서야겠다.”
“전에 그 남작 놈입니까?”
푸에르코는 씨익 웃었다.
그웬은 푸에르코에게 두 병의 약병을 내밀었다.
“부탁한 약이다. 놈을 제대로 손보고 오면 더 주지.”
“보는 눈도 있으니 저녁에 찾아가겠습니다. 죽여도 됩니까?”
“죽여 버리면 나도 덮기 힘들어. 적당히 손이나 봐줘.”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남작 놈이 아니면 죽여도 되는 거죠?”
“다른 놈들? 왜?”
“거기 경비 놈들이 예전에 이쪽을 꽉 잡고 있던 놈들이더랍니다. 한번 손봐주면 이쪽 애들 부리기가 손쉬울 겁니다.”
“맘대로 해. 절대 실수 없게 해라.”
“걱정 마십시오. 확실하게 손봐 놓겠습니다.”
푸에르코는 약병을 챙기며 음흉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