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서신을 가장 먼저 받은 것은 총국이었다.
총국의 수뇌부라 할 수 있는 중앙신전이 제국에 있었다.
배달물을 정리하던 신관은 자그마한 상자를 발견했다.
상자의 수취인은 대법관.
발신인의 정보가 어디에도 없자 신관은 상자를 열었다.
고위급 인물에게 가는 배달물들은 내용물을 모두 확인하게 되어 있었다.
상자 안에는 편지가 한 통 들어 있었고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말단인 그는 마법진을 보아도 뭔지 알 수 없었다.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그림 아래 조그맣게 적혀 있을 뿐 역시나 발신인은 알 수 없었다.
다만 복잡해 보이는 마법진이었기에 상자를 자신의 상관에게 가져갔다.
상관도 편지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곤 다시 윗선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타고 타고 올라간 상자가 대법관 앞에 도착한 것은 상자가 총국에 도착한 지 이틀이 지나서였다.
대법관은 상자를 열고 펼지를 펼쳤다.
나이가 70이 넘은 대법관은 침침한 눈으로 편지를 코앞에서 살폈다.
찬찬히 그림을 살피던 그의 눈이 커졌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움직였다.
그가 향한 곳은 신전의 최심부에 있는 고대 서적실.
대법관만이 가진 열쇠로 열고 들어간 서고에는 수많은 책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는 기억을 더듬으며 몇 개의 책을 골랐다.
그러곤 바로 다른 책들 위에 걸터앉아 책장을 넘겼다.
이내 찾은 듯한 페이지를 펼쳐놓고 다른 책들에서도 페이지를 찾아 펼쳤다.
그렇게 펼쳐놓은 페이지를 확인한 그의 눈이 커졌다.
대법관은 바로 원탁회의를 소집했다.
원탁회의는 선인들을 모으는 자리였다.
대법관이 될 뻔했지만 되지 못한 자.
아주 오래전부터 총국에 몸담고 있던 자.
총국과 관련된 노인들이 소집을 듣고 중앙신전으로 모여들었다.
원탁에 모여 앉은 자들은 대법관이 보여주는 그림에 시선을 모았다.
“이게 뭡니까?”
“굉장히 복잡해 보이는군요. 고대의 것이 아닌지.”
마법진에 일가견이 있는 자들은 호기롭게 그림을 살폈다.
이어 대법관은 서고에서 꺼내온 책들을 내놓았다.
책이 비밀 서고에 있던 장서라는 것을 안 사람들은 감탄했다.
비밀 서고의 장서는 오직 대법관만 볼 수 있었다.
책을 읽어 내려가던 노인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걸 누가 보내온 겁니까?”
“익명이네. 다만 상대가 만나자는 의미로 연락할 방법은 보내왔네.”
“일반인이 이걸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희박하지. 나조차도 대법관이 막 되었을 때 훑어봤던 장서를 겨우 떠올릴 정도였는데 일반인이 알 턱이 있나.”
“이 장서는 대대로 총국에만 내려오던 것. 이 그림을 보내온 자를 한시라도 빨리 찾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표정은 무거워 보였다.
펼쳐져 있는 장서들은 그저 이야깃감으로만 전해져 와야 했던 내용을 담은 책자였다.
“찾으면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그림의 출처를 물을 것이네. 만약 그가 그림을 그린 것이라면…….”
“것이라면?”
사람들의 질문에 대법관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이 뭔지 안 사람들은 덩달아 침묵했다.
그중 한 노인이 용기 있게 침묵을 깼다.
“허나 개인 혼자서는 이 일을 하긴 힘듭니다. 필시 막대한 세력이 있을 텐데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총국만의 힘으로는…….”
현재 총국은 아군이었던 세레니스 제국과는 사이가 틀어져 있었다.
물론 성기사를 포함한 정예 병력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소수.
국가 단위가 개입해 있다면 손을 쓰기가 힘들었다.
“정보가 좀 더 모이면 판단하기로 하지. 우려하던 일이라면 내가 황제를 만나겠네.”
대법관은 혼자서 정보 제공자를 만나겠다고 덧붙였다.
사람들은 극구 반대했다.
위험인물일지도 모르는데 어째서 혼자 만나려고 하냐며 따졌다.
“일단 우리 쪽에서 함정을 파놓고 사로잡아야 합니다. 저들이 적이면 어쩝니까?”
“적이 구태여 그림까지 보내오면서 정보를 묻겠나? 이자도 뭔가를 알고 있지만 확실한 정보가 없는 게지. 그리고 나는 그가 혼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함정을 파놓아도 상대가 인원이 많다면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대법관은 만일을 대비해 자신을 대신할 인물도 지목했다.
그러곤 직접 편지를 썼다.
대법관이 쓴 편지는 도심의 으슥한 골목에 있는 벽 틈새에 숨겨졌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답장이 왔다.
대법관이 만나고 싶다는 편지에 호응하는 답장이었다.
시간이 되자 대법관은 수행원 두 명을 데리고 마차에 올랐다.
약속 장소는 야외였고 달빛이 잘 들지 않는 곳이었다.
수행원을 멀찍이 둔 채 대법관이 지팡이에 의지해 걷기 시작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그는 상대를 기다리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앉을 만한 장소를 찾는 듯했다.
그러자 건물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에서 나무 의자가 슬그머니 나타났다.
“헉!”
“거기 앉으시죠.”
“노…… 놀랐군. 호, 혼자인가?”
“혼자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노안이 있는 대법관은 그림자 속의 인물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신력을 이용해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 자네는 어디 소속인지부터 묻지.”
“난 누군가에게 얽매이는 걸 싫어합니다.”
“그 말은 혼자서 움직인다는 건가?”
“혼자서 움직일 리가 있나요. 내 자신이 헤드라는 이야깁니다.”
이야기를 이해한 대법관은 그림의 출처부터 물었다.
“그 그림은 어디서 구했나?”
“그 전에 대답부터 해주셔야 할 것이 있을 텐데요. 그 마법진은 무엇이죠?”
“우선 자네가 알고 있는 것부터 말해보게. 보아하니 정보는 내가 쥐고 있는 것 같네만.”
상대가 협조 의사를 물어온 것부터가 자신에게 열쇠가 있다고 믿는 대법관이었다.
노련하게 협상을 시작한 대법관을 보며 태훈은 알고 있는 것을 말했다.
사실 물의 지니에게 들은 정보가 전부였고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별것도 아닌 정보라면 말해 버리는 것이 시간을 절약하는 길이었다.
“고대 문명이 만들어낸 마법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실제로 본 적이 있나?”
“그림의 신전 속에서 발견한 겁니다.”
“자네가 본 것을 그대로 이야기해 주게. 그래야 자네를 도울 수 있을 것 같군.”
“상호 이득이 없다면 나는 구태여 여기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직접 보았다면 상황을 알려주게. 그래야 내가 설명을 할 수 있어.”
“나는 총국에게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연락을 해왔다는 것은 이유가 있겠지?”
대법관은 나이만큼이나 노련했다.
한숨을 쉰 태훈은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다만 제국군과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수 있는 부가적인 설명은 생략했다.
지하에 신전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마법진이 발동되며 빛이 났지만 파괴하여 발동을 멈추었다는 것을 설명했다.
마법지에서 빛이 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대법관은 작은 신음을 흘렸다.
“그쪽이 말할 순서입니다.”
“그것은 고대부터 내려온 것이 맞네. 우리는 그것을 절대 열어선 안 되는 문으로 알고 있다.”
“문? 워프 같은 개념입니까?”
“뭐 비슷해. 그 문 너머에는 사후 세계가 있다고 전해지지.”
태훈은 저승을 떠올렸다.
‘그 마법진이 저승으로 가는 문이라고?’
그러자 퍼즐이 어느 정도 맞춰지기 시작했다.
가면의 조직은 포인트를 모으는 것과 동시에 저승으로 갈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것.
하지만 구태여 그런 문이 필요한지는 의문이었다.
포인트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죽어서 저승으로 간다는 것도 안다는 터.
“고대인들은 그 문을 통해 신의 영역에 다가가려고 했다는 것이 정설이지.”
“그 고대문명이 그것 때문에 멸망했다는 것은 들어봤습니다. 그들은 그걸 다시 실행하려는 겁니까?”
“그렇다고 봐야 하지. 그럼 이번엔 다시 내가 묻지. 자넨 그것들을 만들어낸 자들에 대해 아는 것이 있나?”
“그들은 가면을 쓰고 활동합니다. 여러 나라에 숨어들어 정치, 군사, 외교에 모두 간섭을 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는 되어야겠지. 문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은 우리들뿐인 걸로 아는데.”
“그 말은 총국에도 그들의 끄나풀이 있다는 거군요.”
“그…… 그렇게 되는군.”
대법관에게서 탄식이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가면의 조직은 무엇 때문에 아무런 특징이 없는 사람들을 납치하는 가에 대한 의문.
“혹시 그 문을 여는데 제물이 필요합니까?”
“뭔가 짚이는 것이 있는가?”
“그들이 사람들을 납치한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장서에서 제물이 바쳐진다는 글귀를 본 적은 없어. 다만 우려스러운 글귀는 있네.”
“뭡니까 그게.”
“하늘이 열리는 날 지상의 모든 것에 그림자가 드리울지어다. 선택받은 자가 문을 통과하여 신의 계단을 오르는 순간 징벌은 시작된다.”
태후은 곰곰이 대법관의 말을 곱씹었다.
하늘이 열리는 날은 마법진이 발동한다는 것.
경계해야 할 것은 그림자와 징벌이란 단어였다.
“모든 것에 대한 죽음인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그래서 자네의 편지를 받고 어떻게든 만나 봐야겠다고 생각했네.”
계단이라는 단어는 태훈에게 천국으로 가는 문을 떠올리게 했다.
‘그림자는 대충 연상이 가는데 징벌은 대체 뭐지? 계단이 천국의 문이라면 행복한 세상으로 가는 내용이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퍼즐은 어느 정도 맞춰지고 있었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았다.
“더 아는 건 없습니까?”
“그게 전부야. 장서를 더 연구해 보면 뭔가 알 수 있는 게 있겠지.”
“그럼 여기서 거래를 하죠. 장서에 대해 연구해서 아는 게 있다면 오늘 같이 만납시다. 대신 나는 정보료를 내겠소.”
총국은 심각한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제국과 사이가 틀어지고 레드크로스 상회 때문에 포션의 입지가 많이 줄어든 덕분이었다.
“이건 돈이 중요한 게 아니야. 자칫하면 인류의 종말이…….”
“그 마법진이라면 내가 파괴했습니다.”
“파, 파괴?”
대법관은 화들짝 놀랐다.
필시 그런 마법진을 준비한 자들이라면 상당한 경비를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면 다행이군. 자네 조직이 혹시 군사를 가지고 있나?”
“왕국 한둘쯤은 상대할 만한 전력입니다. 더 알려고는 하지 마십시오.”
“그……. 그 정도나?”
대법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정보가 뇌리를 스쳤다.
“혹시 자네가 남쪽에서 일어난 전쟁에 관여했다는 자들의 우두머리인가?”
대법관도 말도 안 되는 실력자가 나타났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 조직의 우두머리라는 생각을 하자 대화 상대에 대한 신뢰가 생겨났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손을 잡도록 하게. 그 가면의 조직을 막는 거라면 우리도 돕겠네.”
“당신들은 손을 잡을 만한 조직이 아닙니다. 아까도 말했을 텐데요. 전 총국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거기까지 말한 태훈은 등을 돌렸다.
상대가 돌아가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대법관이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가 우리한테 어떤 억하심정을 가졌는지는 몰라. 하지만 나머지도 찾아내서 파괴해야 할 걸세.”
“나머지?”
등을 돌렸던 태훈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가 관심을 보이자 대법관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집어 들고 흙으로 된 바닥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아는 정보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 마법진은 내가 알고 있는 문을 여는 마법진의 일부야.”
“일부라면?”
“그런 마법진이 열 개가 준비되어야 문이 열린다는 것으로 아네.”
대법관은 구부렸던 허리가 아픈지 이내 무릎을 땅에 대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다 그린 듯한 대법관이 한숨을 내쉬며 벽에 등을 기댔다.
그림은 달빛이 드는 공간에 그려졌기에 태훈은 대법관이 비켜서자 그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이건!?”
태훈은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자신이 본 적 있는 그림이었다.
“이걸 아는가?”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이런 게 있을 리가 없을 텐데.”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전의 삶에서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었지만 그곳에도 그것은 허구였고 구설이었다.
‘대체 그놈들 뭐 하는 놈들이지? 어째서 지구의 지식을?’
태훈이 본 것은 10개의 마법진이 선으로 이어진 모습이었다.
‘분명 세피로트의 나무라고 봤던 것 같은데.’
태훈이 본 것은 정확하게 세피로트의 나무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클리포트의 나무였다.
하지만 그는 세피로트의 나무라는 단어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 마법진이 9개가 더 있다는 겁니까?”
“그렇네. 그걸 찾아서 파괴해야 해.”
태훈은 머리가 아득해짐을 느꼈다.
어째서 지구의 구전이 이곳에 존재하는지.
또 그것이 어째서 실제로 만들어지고 있는지가 의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