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번즈 남작가의 두 번째 첩은 기사가문의 딸이었다.
사실상 평민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녀의 아버지는 신분 출세를 위해 딸을 다 늙은 남작 가문에 시집을 보냈다.
명색이 수도 귀족이라 자랑스러워했지만 이내 번즈 남작가가 다 쓰러져 가는 가문임을 알고는 병을 얻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아버지는 사망.
남작가로 시집온 그녀는 출산을 한다.
그 자식이 현재의 번즈 남작이었다.
그녀는 야밤에 자주 외출을 했다.
시종들은 그것이 그녀의 유일한 즐거움이라고 했을 정도로 야밤 산책이 잦았다.
그러던 중 납치를 당했다.
그리고 3일 뒤, 그녀는 죽임을 당하기 직전에 발견되었다.
범인은 도시 경비대에 소속되어 있던 경비병이 지목되었다.
그가 피해자가 발견된 장소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점.
그리고 여지껏 피해자들이 근무를 선 다음 날 실종 신고들이 접수되었다는 것이 증거로 제출되었다.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이미 알려진 정보들인데요.”
“첫 번째. 네 출신지가 남작 부인이랑 가까워.”
“수도 주변만 해도 상인과 여행자들 때문에 작은 마을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난 그 여자를 그날 밤에 처음 본 겁니다.”
“그래? 그럼 걸어서 한 시간도 안걸리는 거리라는 건 잠깐 제쳐두지.”
태훈은 꼬고 있던 다리를 바꾸며 다시 입을 열었다.
“또 있어. 남작 부인이 수도로 온 날과 네가 편입한 날도 같아. 이것도 내가 과민 반응한 건가?”
“……수도로 가는 마차를 얻어 탈 수 있었소.”
“일면식도 없는 자를 수도로 가는 마차에 태운다? 짐마차도 아니고 귀족가로 결혼하러 가는 여자가 있는 행렬에?”
탈론이 아무 말 못 하자 태훈은 쇠창살 쪽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탈론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넌 남작가 부인과 알고 있던 사이야. 그리고 나만이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어.”
탈론이 다시 고개를 들어 태훈을 바라보았다.
“당신만이 아는 증거?”
“그건 좀 있다 이야기하고. 너는 자신이 무죄라고 이야기하는데 내 생각은 좀 달라.”
태훈은 부녀자들이 실종되던 날 탈론이 근무를 섰다는 증언이 확실한지 조사했다.
3왕자나 하이디 상회의 돈을 받아먹은 자들이 거짓 증언을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뇌물을 받은 증거는 찾지 못했다.
그리고 위조할 수 없는 근무일지까지.
“넌 3왕자와 일면식이 있어. 왕자의 출타날과 네 근무 이력. 솔직히 말해서 너는 그의 조력자야. 안 그래?”
“……일 없습니다. 더 할 말 없으니 돌아가십쇼.”
탈론이 아예 돌아섰지만 태훈은 개의치 않았다.
그러곤 일어서서 감옥 안을 서성이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한 남자가 있었어. 평민 출신이지만 기사 가문의 딸을 사랑했지.”
“시끄럽습니다. 내일 경기가 있어서 자야 합니다.”
“응? 난 그저 혼잣말하는 거니까 자고 싶으면 자.”
태훈은 계속해서 이야기해 갔다.
남자는 신분의 차를 생각하지 않았다.
시골의 가난한 퇴역 기사의 딸은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돈과 명예를 위해 다 죽어가는 늙은 귀족에게 여자를 넘긴 것.
남자는 여자와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여자는 아버지의 말을 거역할 수 없다며 돌아섰다.
여자가 수도로 떠나는 날 남자는 그 뒤를 쫓았다.
그러곤 숲에서 사냥하던 실력을 내세워 수도 경비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기사가 된다면?
다 늙어가는 남작은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
자신이 기사가 된다면 그 여자를 다시 데려올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민 출신이 기사가 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한 가지 솔깃한 제안이 들어왔다.
한 상회의 지배인이 자신을 도와준다면 기사 작위는 물론 섭섭지 않게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했다.
그 지배인은 3왕자의 일을 도우라 했다.
그 일은 부녀자의 납치.
경비대원이라면 밤에 접근해도 부녀자들이 경계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남자는 3왕자를 도와 부녀자를 납치했다.
남자는 왕자가 여자들을 어떻게 하는지 잘 알았다.
며칠을 가지고 놀다가 잔인하게 살해했다.
시체 처리는 남자가 맡아야 했다.
상당한 대가를 챙긴 남자는 일에서 손을 떼려고 했다.
하지만 상회는 공범이라며 그를 쉽게 놔주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모두 납득할 수 있는 과정이었다.
결국 일을 계속해서 맡아야 했다.
왕자가 출타한다는 전갈을 받으면 비번이라도 근무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3왕자가 타깃으로 삼은 여인을 보고 그는 당황했다.
자신이 데려오고 싶어 하던 여자였다.
그녀를 향해 도망가라고 외치려는 순간 3왕자의 수하들이 그녀를 납치했다.
손을 써볼 순간도 없었다.
납치되어 괴로워하는 그녀를 본 순간 그는 결심했다.
이대로 가면 여자는 죽는다.
그렇기에 여자를 탈출시켜야 했다.
이야기를 듣던 탈론은 누운 채 미동도 없었다.
“어때? 내 이야기가?”
“음유시인을 해도 되겠습니다. 대단한 망상력이군요.”
“자는 거 아니었어?”
“…….”
태훈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해나갔다.
“그래서 결국 여자를 탈출시켰어. 하지만 3왕자의 수하들이 눈치챘지. 여자는 이미 관절을 난도질당해서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으니까 금방 따라잡혔겠지.”
남자는 3왕자의 수하들과 상회의 인간들을 상대했다.
하지만 일대 다수를 상대할 만큼 그는 대단한 실력이 아니었다.
땅 위를 기는 여자를 본 남자는 여자를 살리기 위해 결국 호각을 불었다.
여자는 살아날 수 있었다.
남자는 3왕자와 상회의 인간들을 고발하려 했지만 윗선에서 막히고 말았다.
남자는 모든 살인 누명을 뒤집어써야만 했다.
“여기까지가 내가 쓴 소설이야. 마음에 드나?”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죠.”
“전부 다 증거가 없는 건 아니야. 아까 내가 나만이 알고 있는 증거가 있다고 했지? 바로 네 손가락이야.”
탈론은 누운 채 자신의 손을 품 안으로 감추었다.
그의 새끼손가락은 기형이었다.
그리고 태훈은 그것과 같은 형태의 손을 보았다.
“유전병이 있어. 나만 아는 병명인데 뭐 내가 의료원 한다는 이야긴 들었지?”
“그게 뭐 어떻다는 겁니까?”
“다인즈의 손도 너랑 똑같아. 그 병이 유전된 거지.”
그가 알고 있는 병은 유전될 확률이 높았다.
다만 그것이 바로 밑에 대로 유전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발병 확률도 36만 분의 1로 낮았던 것이다.
결국 다인즈 번즈는 선대 남작의 자식이 아들이 아니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70이 넘은 남자의 아이를 갖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지. 내가 추측컨대 아마 마을을 떠나기 전날이 아니었을까?”
“당신 혹시 3왕자가 보냈소? 나더러 얼른 죽으라 하던가요?”
탈론이 다시 쇠창살 앞에 앉자 태훈도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난 그들이 보낸 게 아니야.”
“그럼 왜 나를 겁박하려는 겁니까?”
“겁박? 그건 아니지.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야. 더불어 하이디 상회를 박살 내고 싶었을 뿐이고.”
“당신은 대체…… 뭐 하는 사람입니까? 정말 귀족이 맞습니까?”
“나? 나는…….”
잠시 뜸을 들이던 태훈은 웃으며 말했다.
“탐정이야.”
“탐정?”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는 그에게 태훈은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난 너도 죄를 많이 지었다고 생각해. 하지만 살인죄는 억울하잖아. 그렇지?”
“……원하는 게 뭡니까?”
“3왕자와 하이디 상회가 얽혀 있는 건 이 업계에선 공공연한 비밀이야. 넌 그들과 어떤 일에서 조력을 한 거지?”
“말하면 내 상황이 달라집니까?”
“최대한 손은 써볼게. 그리고 다인즈의 일은 내가 무덤까지 가지고 가도록 하지.”
탈론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조력하던 일을 불기 시작했다.
그가 조력한 분야는 태훈의 추측대로 인신매매였다.
탈론이 인물을 발견하면 하이디 상회에 연락.
하이디 상회는 날을 잡아 납치를 실행하면 탈론이 망을 보았다.
3왕자는 그 때마다 수상한 인물과 함께 나타나 납치된 인물을 넘겼다고 했다.
“수상한 인물?”
“그렇습니다. 아무튼 딱 봐도 인신매매였습니다.”
“노예를 사면 될 텐데? 굳이 그런 리스크가 큰일을 왜 한대?”
“하이디 상회는 특정인을 지목했습니다. 버젓이 미행할 수 있는 저를 이용한 거죠.”
태훈은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하이디 상회는 납치하고 싶은 인물들이 있었다.
무작위가 아닌 특정인을 노렸고 대놓고 거리를 활보해도 문제없는 경비병 탈론을 포섭.
탈론이 그 특정인을 조사해 거주지와 행동 반경을 조사해서 알리면 하이디 상회가 나섰다.
그리고 3왕자와 수상한 인물이 나타나 납치한 인물을 데리고 갔다는 것.
“그럼 부녀자들도 그 특정인인가?”
“아니요. 그건 어디까지나 3왕자의 우발적인 범행이었습니다.”
“그 수상한 인물이 누군지 알겠어?”
“모르겠습니다. 항상 가면을 쓰고 있었고 말수가 없었습니다.”
“가면?”
당황한 모습을 보이던 태훈은 바닥에 가면의 형태를 그렸다.
“혹시 이런 가면인가?”
“맞습니다. 아는 자들입니까?”
이번엔 도리어 탈론이 놀라 물었다.
태훈은 다른 일로 조사 중인 자들이라고 둘러대었다.
‘대체 이놈들은 규모가 얼마나 되는 거야. 어디까지 손을 뻗고 있는거지?’
태훈은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그들이 특정인을 납치하고 있다는 것.
‘설마 그 납치 대상자들이 포인트를 가진 자들인가?’
하지만 그렇기엔 상황이 맞지 않았다.
포인트를 가지고 있을 정도면 좋은 신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
자신만 보더라도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났다.
탈론의 말을 들어보면 납치 대상자들은 평범한 인간들이었다.
‘포인트를 위한 사람들이 아닌 건가? 내가 모르는 것들이 더 있는 걸까?’
머리가 아파져 오자 태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범죄를 증명할 만한 물증이 있어?”
“없습니다. 있으면 지금 제가 여기서 이렇게 있겠습니까?”
“확인은 여기까지. 넌 중요한 증인이 될 수 있으니 어떻게든 살아남아라. 나도 손을 쓸 수 있는 데까진 손써두마.”
감옥을 나오는 태훈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지하 신전에서 얻은 명단에 대한 소식은 아직 없었다.
그런 와중에 다시 듣게 된 가면 무리의 흔적은 그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지하 아지트 습격으로 일대 가면의 무리는 모두 처리한 줄 알았는데.’
태훈은 여태껏 실종당했던 자들의 명단을 알아보았다.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 이외에도 실종된 자들의 이름은 제법 되었다.
하지만 전부 평민일 뿐 이렇다 할 신분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거기에 공통점도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퍼즐 조각은 많았지만 어느 하나 쉽게 끼워 맞춰지지가 않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번즈가였다.
3왕자의 욕심에 의한 납치였으니 가면과는 무관했다.
뮤즈가 가면들과 맞닥뜨릴 확률은 적었다.
저택으로 돌아온 태훈은 환생한 이후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새벽이 되어서야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빼곡히 정리되었다.
순서대로 정리하던 그는 한 가지 항목에서 멈추었다.
‘물의 지니도 나에게 뭔가 숨기는 것 같았는데.’
베링스와의 전투 때 보았던 신전과 마법진.
물의 지니의 대답은 시원한 해답이 아니었다.
‘결국 직접 알아봐야 하는 건가.’
신기는 먼 옛날의 물건이었으니 마법진과 신전도 옛날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기관은 상아탑과 총국 정도.
태훈은 신전의 구도와 마법진의 생김새를 종이에 그렸다.
그러곤 상아탑에는 레드크로스 상회 지배인의 이름으로 서신을 보냈다.
총국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익명으로 보냈다.
신전과 마법진에 대해 알고 싶다는 질문이었고 협조할 경우 막대한 원조를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