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태훈은 모든 과정을 집무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대화 내용은 듣지 못했지만 상황은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경비대장을 찾았다.
숙소에서 상처를 치료하며 정비하고 있던 그들에게 약들을 건넸다.
“바르면 상처에 도움이 될 거야.”
“감사합니다, 약으로 정평이 나 있는 상회 주인다우시네요.”
“소싯적에 싸움 좀 했나 봐?”
“그래봐야 뒷골목 싸움이죠. 훈련받은 놈들이었으면 저희가 졌을 겁니다.”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었기에 태훈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대장에게 종이 뭉치 여러 개를 건넸다.
뭉치는 사람 수에 맞게 7개였다.
“글은 읽을 줄 알지?”
“네, 근데 이게 뭡니까?”
“당신들이랑 가족들은 우리 의료원에서 진료와 치료를 받을 수 있어. 근무하는 동안 공짜로.”
“가족들까지 말입니까?”
남자들은 앞다투어 대장에게서 종이를 빼앗아 읽어 내려갔다.
좋아하는 부하들을 보자 대장은 웃으며 말했다.
“이거 너무 잘해주시는 거 아닙니까?”
“일종의 직원 복지야. 목숨 걸고 일하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잘해주시는 건 좋지만 그만큼 부담이 가는데요. 여기 경비 일이 생각보다 빡셀 것 같습니다?”
미래를 내다본 듯 대장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의 어깨를 치며 푹 쉬라고 말한 태훈은 숙소를 나왔다.
* * *
꽁지가 빠져라 도망친 불량배들은 자신들의 거처로 돌아왔다.
멀쩡한 자들은 부상당한 동료의 치료를 도왔다.
“대장, 이제 어떻게 합니까? 이대로 그냥 넘어갑니까?”
“저희가 한 번에 달려들면 그 다섯 정도는…….”
“자작가 아들놈은 싸우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어.”
“이미 돈을 받았잖습니까. 그리고 혼쭐을 내주라는 건 어느 정도 무력행사를 하라는 이야기 아닌가요?”
“돈은 돌려줄 거야. 그리고 아무리 뒷골목 잡배라지만 조직의 명예가 있지 어떻게 초대 기수들이랑 싸우겠어.”
하지만 대장의 마음도 편하지는 않았다.
자작가에서 어떻게든 보복이 올 것이 분명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대장은 돈을 모아둔 상자로 다가갔다.
거기엔 자작가 아들에게 받은 돈과 얼마 되지 않는 돈과 금품이 들어 있었다.
받은 돈만 돌려줘선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상자를 비웠다.
“자작가에 다녀오겠다.”
“형님, 이대로 갔다간 적어도 어디 한군데 못 쓰게 될 겁니다.”
“그 정돈 각오하고 있어. 뒤는 잘 부탁한다.”
대장은 자작가가 아닌 뒷골목의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현재 뒷골목 세계를 평정한 푸에르코라는 인물이 있었다.
한눈에 봐도 여타 다른 사람과는 다른 떡대였다.
대장은 푸에르코 앞에 가져온 주머니들을 내려놓았다.
“이건 뭐냐?”
“받은 돈과 이자. 우리는 이번 일에서 손을 떼겠어.”
“손을 떼?”
푸에르코는 대장을 한번 훑어보더니 혀를 찼다.
“설마 당한 건가?”
“…….”
“거긴 다 늙은 녀석들이 경비를 서고 있다던데.”
“우리 조직의 선대들이다. 뒷골목에도 규칙이…….”
푸에르코의 발이 대장의 가슴팍에 작렬했다.
늑골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대장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대장은 쉽사리 일어나지 못하고 가슴을 쥐고 바닥을 쓸었다.
푸에르코는 바닥에 있던 주머니를 발로 찼다.
주머니에 있던 은화와 동화들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이 자식이 내 말을 개똥으로 알아듣나.”
“크윽…….”
“일을 한번 맡겼으면 제대로 해야지. 돈까지 받아 처먹었으면서.”
“나로 끝내. 조직은 건드리지 말아다오.”
“다 박살 난 조직 따위 관심도 없어.”
퍼억- 퍽-
푸에르코의 발길질과 주먹질이 시작됐다.
5분도 되지 않아 대장은 피떡이 되었다.
머리채를 잡아들어 올리자 원래 얼굴을 찾아볼 수 없는 몰골이 드러났다.
“우우…….”
“지옥에 가서 네놈들 동료에게 안부나 전해라.”
푸에르코의 무쇠 같은 주먹이 대장의 얼굴에 작렬하려는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죽이진 마.”
“어르신.”
푸에르코가 주먹을 내리고 돌아보니 자작가의 아들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그냥 죽여서야 쓰나. 내가 데리고 가지.”
“이놈을 어디다 쓰시려고?”
“다 쓸데가 있지. 그리고 나한테 뭘 묻지 말라고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어르신.”
푸에르코는 30대였다.
10대인 자작가의 아들에게 깍듯이 대하고 있었다.
“쯧, 그건 그렇고 그 자식 하나 처리 못 하다니.”
“제가 직접 나설까요?”
“아서라. 그놈 뒤에는 공작가가 있다고 소문이 났어.”
“그럼 그냥 놔둡니까?”
“그래서야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지.”
자작가 아들은 턱을 매만졌다.
뒷골목 양아치들을 이용한 것도 후탈이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나저나 약이 떨어져 갑니다.”
“이제 더 손 볼 녀석들도 없잖아. 약이 왜 더 필요해?”
“그래도 약을 주십시오. 이 몸을 유지하려면 필요합니다.”
푸에르코는 자신의 터질 듯한 근육을 움직여 보였다.
그는 원래 아주 왜소한 체구의 남자였다.
그러던 중 자작가 아들이 약을 가져왔고 자신의 부하가 되라고 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삶.
거기다 푼돈마저 뒷골목 불량배에게 뜯기기 일쑤였던 그는 그의 손을 잡았다.
약으로 얻게 된 육체는 최강의 육체였다.
이따금 알 수 없는 고통과 멍해짐이 찾아오긴 했지만 푸에르코는 만족했다.
경비대들도 한번 혼쭐이 난 후 그를 보면 슬그머니 피했다.
평소에 자신을 무시하던 자들이 자신에게 굽히는 모습을 본 그는 이루어 말할 수 없는 뿌듯함에 매료됐다.
자작가 아들은 얼굴을 찡그리며 물러섰다.
“그 흉측한 건 들이밀지 마. 약은 더 알아보마.”
“그 남작 놈은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괴롭힐 방법은 많아. 그보다 애들 좀 보내라.”
“무슨 일이십니까?”
“밀수 건이다. 예의 그곳으로 보내.”
“알겠습니다.”
* * *
석양이 질 무렵 레이첼은 물건을 하나 받았다.
아직 새 종이 냄새가 나는 책이었다.
그녀는 태훈이 쓴 책을 읽어 내려갔다.
책은 그의 말대로 소설이었다.
서로 앙숙이던 두 왕국의 왕자와 공주의 이야기.
이루어질 수 없던 사랑을 남몰래 지켜가던 두 남녀가 결국 비극으로 치닫는 이야기.
로미오와 줄리엣을 각색한 이야기는 레이첼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다음 날 아침에 찾아온 태훈과 티타임을 가지며 그녀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 이야기는 어느 나라 이야긴가요?”
대부분의 구전 이야기는 음유시인이 퍼뜨린 것.
그리고 음유시인은 실제 있었던 일을 각색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으음, 저는 음유시인과는 좀 다릅니다. 그 이야기는 허구죠.”
“그렇다면 지어내신 거라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레이첼은 감탄했다.
태훈은 도용(?)을 한 것이지만 레이첼에게는 그가 멋진 이야기꾼으로 보였던 것이다.
하물며 그것을 비싼 종이를 들여 책으로 만들어 자신에게 선물했다는 것은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이 남자가 정말로 나에게 관심이 있는 건가?’
그녀를 골탕 먹인 남자들은 이렇게까지 정성을 들이진 않았다.
태훈은 시간이 된다면 계속해서 책을 써주겠다고 했다.
그날 저녁에도 보내준 책은 정실부인에게서 핍박받던 공주의 이야기였다.
일곱 요정이 그녀를 돌보았고 왕자의 키스로 잠에서 깬 내용은 신선했다.
그녀는 훌륭한 그 책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비밀친구에게 책을 보냈다.
레이첼이 보내준 책을 읽은 비밀친구 역시 감탄하며 자신에게도 공유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한편 태훈은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새벽에 누군가의 방화로 상회가 운반할 약이 모두 타버렸던 것.
그는 자작가의 아들 짓이라고 짐작했다.
“그 자식이 선을 넘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피해가 얼마나 돼?”
“물량의 3분의 1이 타버렸습니다.”
“재고는?”
“아슬아슬합니다.”
알은 재고 목록표를 보여주며 말했다.
“의료원으로 들어가는 물량을 우선시해.”
“그러면 군대 납품 약이 부족해집니다.”
“그건 내가 이야기해 볼게.”
중앙군 청사에 들러 납품 기일을 미루는 대가로 단가를 깎아야만 했다.
그는 자작가가 운영하는 상회를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선 마법으로 상회를 날려 버리고 싶었지만 도시 내에는 결계가 펼쳐져 마법을 쓸 수 없었다.
쓴다면 대단위 마법을 써야 했는데 그랬다간 상회만을 날리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았다.
‘받은 만큼 되돌려 주는 게 또 한민족의 정이지.’
보복을 다짐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태훈은 치안대에 들렀다.
얼마간의 돈을 쥐어주고 탈론을 만난 태훈은 경과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럼 3왕자와 접촉하려는 겁니까?”
“뭐 그래야지. 그리고 너 말이야. 나한테 뭔가 숨기는 거 없어?”
연쇄살인에 대해 조사하던 도중 그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탈론이 남작가의 첩을 발견한 곳은 그의 순찰 구역이 아니었다.
“말했잖습니까. 비명이 들려 뛰어갔다고요.”
“내가 거길 가봤거든? 사방이 빽빽하게 집들로 가득 차 있더라고.”
“그런데요?”
“거긴 누가 죽어나가도 모를 그런 곳이었어. 소리를 질러봤는데 벽들 때문에 소리가 길가까지 새어나가지도 않던데?”
“아무도 없는 한밤중이었습니다. 작은 소리도 새어나가긴 충분하죠.”
탈론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또 하나 있어. 넌 번즈 남작가의 첩을 보내고 괴한과 싸웠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싸우긴 했지만 놓쳐 버렸죠.”
“그래, 그리고 넌 어둠 속에서 그를 봤고 그게 3왕자라 했지?”
“네, 분명합니다.”
“내가 아는 사람이 그러는데 그날 밤 3왕자는 궁을 나가지 않았어.”
태훈은 조장에게 사건이 있던 날 밤 3왕자가 외출해 있는지를 물었다.
사건이 있던 날 다음날에는 연쇄살인범이 붙잡혔다는 소문이 퍼졌었다.
그 덕분에 조장은 전날 밤을 기억하고 있었다.
“확실합니까? 꽤 오래전의 일인데요.”
“돈 앞에서는 젖 먹던 시절도 기억이 나는 법이야. 너 자꾸 이렇게 거짓말로 나오면 안 도와준다?”
그가 협박하자 탈론은 입을 다물었다.
태훈은 조사 도중 몇 가지 사실도 알아냈다.
탈론은 자신이 순찰을 돌지 않는 날에도 순찰을 도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비번인 날에도 순찰을 도는 경우가 있었다는 동료의 증언도 있었다.
그 날짜를 기억하냐는 태훈의 말에 동료들은 기억이 나는 대로 알려주었다.
그리고 조장에게도 연쇄 살인기간에 3왕자의 행적도 물어보았다.
그 결과 3왕자와 탈론의 스케줄이 대부분 겹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것을 이야기하자 탈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너 팔 좀 보자.”
“팔은 왜 그럽니까?”
“잔말 말고 내밀어.”
탈론은 마지못해 양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태훈은 그의 손과 팔을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오른쪽 엄지손가락은 다른 손가락보다 가늘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과 비슷한 경우를 최근에 본 적이 있었다.
“엄지손가락은 왜 그래?”
“태어날 때부터 이랬습니다. 그래서 검을 쥘 때마다 어려웠죠.”
태훈은 머릿속으로 퍼즐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 결과 레이첼에게 책으로 써주어도 될 만큼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음, 지금부터 내가 추리를 하나 해볼 거야. 듣고 생각 잘 해봐.”
태훈은 한 권의 책을 써도 될 만큼 장황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작은 사건이 있기도 전에 있던 오래된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