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상점가는 소란이 일고 있었다.
누군가 싹 쓸어간 종이 때문이었다.
종이를 필요로 하는 것은 관공서와 상회들.
일반인들은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종이의 주요 소비처들은 혼란스러웠다.
“그럼 양피지라도 내놔!”
“그것도 조금 전에 다 팔렸습니다. 오늘은 더 이상 재고가 없어요.”
“아니, 너희들만 장사하면 다야? 우리도 장사는 해야 할 것 아니야!”
종이가 없이는 물품의 거래대장을 작성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양피지라도 구입하려 했지만 이미 종이의 품절을 알아챈 자들이 쓸어간 뒤였다.
애초에 종이는 항상 재고가 남는 물건이었다.
가격도 비싸고 일반인은 글을 모르는 자가 부지기수.
결국 소비층이 국한되어 있다 보니 종이의 생산도 제한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취급하는 상회도 단 한 곳.
“그럼 누가 사 갔는지나 말해줘. 종이가 없다면 우린 하루를 공치는 거라고!”
사람들의 성화에 못이긴 상인이 종이를 사간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본래 거래자에 대해선 발설하면 안 되는 법.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간 뭇매를 당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저택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몰려오는 마차를 보았다.
“음? 저건 뭐야?”
“첫날부터 일이 빡세구만?”
그들은 전 주인에게 해고되었다가 다시 고용된 인력들이었다.
마차들이 저택 앞에 줄지어 멈춰 서자 경비들이 앞으로 나섰다.
“여긴 귀족 가문의 저택이오. 소란을 피우지 마시오.”
사람들은 다가오는 자들을 보고 잠시 머뭇거렸다.
전신을 뒤덮은 판금 갑옷.
허리의 검 등 한눈에 봐도 자작가 이상의 고용인들이 쓸 법한 장비들이었다.
“여기가 크로이츠 남작가가 맞습니까?”
“그렇소. 댁들은 누구요?”
저택의 소유주를 확인한 사람들이 앞다투어 몰려들었다.
“우리는 상회 사람들이오. 남작님과 이야기할 것이 있소.”
“길에서 마차부터 치우고 한 사람씩 말하시오.”
길 위의 정리가 끝나고 사람들의 목적을 들은 경비대장이 안쪽으로 사람을 보냈다.
소식을 들은 유리아는 태훈의 방으로 향했다.
자신의 방에서 종이와 씨름하고 있던 태훈이 보고를 들었다.
“상인들이 종이 때문에 찾아왔다고?”
“네, 그렇습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종이들이 구겨져 뭉치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표면도 울퉁불퉁하고 찢어지기 쉬운 탓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참이었다.
‘볼펜이랑 노트가 이렇게 그리울줄이야.’
잠시 펜을 내려놓으며 그는 찾아온 사람들을 홀로 불러모으라 했다.
사람들은 평민 신분이었기에 그에게 조심스레 따졌다.
“남작님, 종이를 모조리 사 가시면 저희가 곤란합니다.”
“당장 판매대장 작성이 어렵습니다. 종이를 나누어주십시오.”
“귀족 집에 흙발로 뛰어드는 건 무슨 경우지? 내가 아직도 상회 주인으로 보이는 건가?”
태훈도 아는 얼굴들이었다.
남작 신분을 받기 전 그는 제국에서 상회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전부 귀족밑에서 일하고 있는 대리인이라는 것들도 잘 알고 있었다.
“종이만 나눠주신다면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그건 곤란한데. 자네들 주인들한테 사과는 받아야겠어.”
그들의 주인들은 귀족을 말하는 것이었다.
상인들은 당황했다.
그도 상인 밥을 먹었고 자신들의 심정을 충분히 헤아려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실상 그들은 백작 이상의 주인을 두고 있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씀입니까?”
“나는 바쁘니까 그대들의 주인을 데리고 오든 사과장을 받아오든 알아서 해.”
태훈이 위층으로 사라지자 사람들은 난감해했다.
장사를 못해도 난감했고 자신들의 주인에게 일을 알리는 것도 난감했다.
유리아와 경비들은 그런 그들은 모두 저택에서 내보냈다.
태훈은 그 나름대로 짜증이 나 있었다.
종이의 질 때문이기도 했지만 우르르 몰려와서 뭘 내놔라 하는 분위기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자신은 경제 활동으로 종이를 구매한 것이었다.
상인들의 장사에 방해가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도 당연히 내놓으라는 듯한 태도는 못마땅했다.
잠시 후 창문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내다보니 정문의 입구에서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화려한 갑옷을 입은 기사가 유리아를 밀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기사의 뒤에 있는 마차의 문양을 본 태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익히 알고 있는 문양이었다.
그가 나가니 실랑이는 멈추었고 마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
태훈과 비슷한 또래의 남자는 거만한 만큼 튀어나온 뱃살을 출렁였다.
“자네가 크로이츠 남작인가?”
“그러는 그쪽은 오웬 자작가의 자제분인 것 같소만.”
“장남인 그웬이다! 불경하게 어디 허리를 세우는 거야!”
오웬 자작가는 오웬 상회의 주인이자 상인협회장을 맡고 있었다.
정경유착의 근본을 보여주는 가문이었다.
처음 레드크로스 상회를 세울 때 몇 번인가 자작가를 방문했던 기억이 있었다.
“어서 허리를 숙이지 못해!?”
“아직 가문을 잇지도 않은 녀석에게 내가 왜 허리를 숙여야 하지?”
“이…… 이놈이…….”
제국법에 백작 이상의 가문은 세습이었다.
다만 세습을 하더라도 귀족회의 평가와 승인이 필요.
이 과정은 큰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귀족회를 통과하면 황제의 승인이 있어야 했다.
이 과정은 많은 국가들이 쓰는 방법이었고 나라마다 기준이 되는 귀족의 계급이 달랐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현 가문의 수장을 맡고 있는 게 아니라면 그 자제들은 귀족의 자제일 뿐 정치에 아무런 힘도 없었다.
“우리 아버지 다음은 나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닐 텐데?”
“그건 그때 가서 볼 일이고. 무슨 일로 남의 집 기사를 붙잡고 시비거는 거야?”
“네놈이 쓸어간 종이 때문에 내가 직접 오게 됐잖아! 당장 종이를 가져와!”
손바닥까지 내밀며 성을 내는 꼴을 보며 그는 속으로 혀를 찼다.
가문의 후광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녀석이 나대는 꼴이 아니꼬왔다.
“뭐 좋아. 원하면 정가의 3배를 내도록 해.”
“뭐야?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장난할 기분도 아니고 시간도 없어. 3배를 내고 가져가든가 아니면 꺼져.”
“이 발칙한 놈이!”
상대는 멱살을 잡으려 했다.
태훈은 가볍게 그의 손을 낚아채며 힘을 주었다.
오크 멱을 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작가의 기사가 검을 뽑으려 하자 유리아도 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손목뼈가 으스러지기 직전 멈춘 태훈은 그를 밀쳤다.
쿵-
마차에 부딪힌 뚱땡이는 아픈 손을 쥐어싸며 웅크렸다.
태훈이 상자 하나를 가져오라고 한 뒤 그걸 녀석의 앞에 내려놓았다.
“위자료다. 갖고 꺼져.”
“네놈……. 이대로 그냥 넘어가진 않아.”
자작가 아들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는 마차를 타고 사라졌다.
“자작가의 자제입니다. 문제가 커질 소지가 있습니다.”
유리아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래봐야 군대를 끌고 오겠어 뭘 하겠어.”
“사병이라도 끌고 왔다간 이곳의 병력만으로는 힘듭니다. 상회에서 호송대를 불러오시죠.”
“황가가 아닌 이상 그 누구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어. 문 걸어잠그고 있도록 해.”
어느 국가나 마찬가지지만 황가를 제외하곤 주인의 허가가 필요했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병장기를 갖춘 30여 명의 사내들이었다.
태훈이 자세히 보니 자작가의 사병은 아닌 듯했다.
자작가의 병사치곤 장비도 허술했고 행동거지도 모자라 보였다.
‘저건 그냥 뒷골목 불량배들 같은데.’
그의 말대로 그웬은 술집에서 잡배들을 고용했다.
아버지인 자작에게 당하고 왔다고 말하긴 곤란했다.
큰소리치며 자기가 해결하겠다고 나섰기에 해결은 해야 했다.
사병을 고용하면 일이 귀찮아지니 불량배들을 고용한 것이다.
철창 사이의 문을 두고 유리아가 경고했다.
“여긴 귀족가다. 불량배들이 올 곳이 아니다.”
“그건 우리도 알죠. 우린 그냥 지나가다 구경하는 것뿐입니다? 안 그러냐?”
“그럼. 이 길이 귀족가 것은 아니잖습니까?”
명백히 시비를 거는 듯한 어조로 불량배들이 시시덕거렸다.
“그럼 조용히 구경만 하고 돌아가.”
“아이고, 얘들아 좀 쉬어야겠다.”
그러더니 불량배들은 길바닥에 드러눕기 시작했다.
유리아는 고개를 뒤로 돌려 창문 너머에 있는 태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놔둬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귀족 가문이 몰려 있는 거리는 수시로 수도 경비대가 순찰을 돌았다.
그들이 오면 불량배 정도는 물릴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경비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뭐 그놈이라면 뇌물이라도 썼겠지.’
그렇다면 무력을 써야 했는데 구실이 없었다.
저택을 침입한 것도 아니고 귀족을 능멸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입구를 막고 길의 통행을 방해했다고 무력을 쓰기엔 귀찮았다.
그때 경비대장이 유리아와 뭔가를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유리아와 옥신각신하는 듯하더니 이내 경비대장과 몇 명이 숙소로 들어갔다.
숙소에서 나왔을 때 그들은 가벼운 가죽 튜닉만을 입고 있었다.
“아, 교대 시간인가.”
경비대는 번갈아 가며 근무를 서게 했다.
경비대장과 4명이 뒤쪽의 작은 문으로 나섰다.
그러곤 어디선가 들고 온 몽둥이 같은걸 들고는 불량배들에게 걸어갔다.
이내 싸움이 벌어졌고 태훈은 놀랄 만한 광경을 보았다.
불량배들도 몽둥이와 단검 같은 것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경비대장을 포함한 5명은 신속한 몸놀림으로 그들과 싸우고 있었다.
쉽게 말해 5 대 30으로 맞장을 뜨고 있는 것이다.
싸움은 5명 쪽이 우세했다.
대미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경비대장 일행은 맞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즐기는 듯한 표정으로 불량배들을 때려눕혔다.
“이, 이 자식들 대체 정체가 뭐야!”
불량배의 리더로 보이는 자가 비틀거리며 외쳤다.
이미 너덧 명은 일어나기조차 힘들어 보였고 전체의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었다.
경비대장은 입가의 피를 한번 훔치더니 씨익 웃었다.
“요새 애들은 패기가 없구만. 나 때는 곧 죽어도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았다고.”
“대장, 요새 애들은 근성이 없어요, 근성이.”
“근성만 없게? 돈만 주면 다 하는 근본도 없는 놈들이지.”
“낄낄낄.”
다섯 명은 아주 친숙한 듯 마주 보고 웃었다.
‘다 늙은 놈들이 뭐 이런 무지막지한…….’
불량배 두목은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단검에 잘려 나간 경비대장의 어깨 죽지를 보고 동공이 커졌다.
오크 얼굴이 그려진 문신이 보였다.
그것은 자신의 어깨에도 있는 것이었다.
“호……. 혹시 푸링파 조직원이셨습니까?”
“음? 아, 이걸 본 건가.”
자신의 문신이 드러난 것을 보며 경비대장은 웃었다.
“너도 푸링이냐?”
“맞습니다. 그럼 선배님들, 혹시 몇 기이십니까?”
“몇 기? 지금 너희는 몇 기냐?”
“저희는 4기입니다. 5기들도 더러 있구요.”
“우린 몇 기고 뭐고 없어. 우리가 초대니까.”
“헉!”
불량배 두목은 헛숨을 들이켰다.
초대들의 무용담은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 전설에 반해 조직에 들어온 자들도 상당했다.
“모…… 몰라 뵀습니다. 혹시 초대 대장이었던 라무스 씨를 아십니까?”
“내 이름이 너희들 기수에도 남아 있냐?”
“으허헉!”
불량배들은 단체로 놀라며 무기를 버리고 바닥에 엎드렸다.
“초대 대장님을 뵙습니다!”
“네놈이 지금 대장이야?”
“그렇습니다.”
“다 늙은 노인네들한테 밀리다니 왜 이렇게 썩어빠졌어?”
“며, 면목 없습니다.”
“그리고 인원이 이게 전부야? 나 때는 백 명이 넘었는데.”
“죄송합니다, 제 불찰이 큽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태훈은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대충 상황은 짐작하고 있었다.
“자작가 아들놈한테 얼마 받았냐?”
“1인당 10실버씩 받았습니다.”
“그런 푼돈을 받고 움직인다고?”
“대장, 우리 때랑은 완전히 다른가 본데요?”
다섯 중년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들은 한때 수도 경비대와 호각을 다툴 정도로 큰 조직을 이끌던 간부들이었다.
“여기 주인분은 좋은 분이시다. 냉큼 돌아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불량배들은 주섬주섬 무기들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허리 숙여 인사한 뒤 이내 등도 보이지 않고 줄행랑쳤다.
“그래도 위계질서는 살아 있나 보네.”
“그런데 조직도 많이 약해졌나 봐.”
“다 한때의 영광이지. 우리도 젊은 혈기였잖아.”
“저놈들 괜찮을까? 자작가 아들놈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신경 꺼. 이제 정신 차릴 때가 되어 보이는 나이대도 있어 보이던데. 데일 때도 있어야지.”
경비대장은 몸을 툭툭 털더니 정문으로 다가갔다.
“갔습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모든 걸 지켜본 유리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문을 열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