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모여 있는 자들은 대부분 나이가 들어 보이는 자들이었다.
움직임도 평범, 골격이나 덩치도 평범해 보였다.
그래도 군사훈련은 받았는지 기본적인 자세는 하고 있었다.
태훈이 다가가자 유리아가 인사를 했고 다른 자들도 고개를 숙였다.
“면접을 본다던 사람들인가?”
“그렇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남작님.”
태훈은 그들에게 서로 얼마나 알고 있냐고 물었다.
그들은 전 주인 밑에서 알게 된 사이들이며 짧게는 5년.
길게는 7년을 같이 일했다고 답했다.
“유리아, 어때?”
“기본적인 자세는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상회의 호송단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 녀석들은 현역이잖아.”
그는 면접을 보는 자들에게 경비 책임자로 유리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보통의 남성이라면 여성 무관을 위에 두는 것을 꺼렸다.
하지만 그들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상관없습니다. 저희보다 강하니까요.”
“그래도 네 녀석 여편네보단 약하실걸?”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군.”
면접 자리고 귀족이 앞에 있다는 것치고 그들은 자유분방한 모습이었다.
“귀족을 어려워하지 않는군. 전 주인에게 그래서 잘린 건가?”
“귀족은 어렵죠. 하지만 시종장이 남작님에 대해서 말해줬습니다. 관대하신 분이라더군요.”
“행여 실례였다면 사과드리고 물러가겠습니다.”
그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던 태훈은 그 자리에서 고용하겠노라 말했다.
유리아가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서로 오래 일했으니 손발은 맞을 거고. 배신할 사람들 같진 않아.”
“그래도 실력이 좀 더 나은 자들이 있을 겁니다.”
“여차하면 호송단에서 차출해도 되고 저택 구조도 잘 아니 문제없어. 무엇보다 성격이 좋아 보이는군.”
남작이 자신들을 고용한다고 말하자 그들의 안색이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남작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급여는 전에 받던 것보다 1할을 더 주겠다. 그리고 이걸로 각자 장비를 사오도록 해.”
태훈은 주머니를 한 남자에게 던졌다.
주머니 속에 든 금화들을 본 남자들은 깜짝 놀랐다.
“이……. 이걸로요?”
“왜? 부족해?”
“이 정도면 공작가의 기사 정도 되는 장비를 살 수 있는 돈입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고 내일부터 일하도록 해. 돈이 남으면 들어가면서 술이나 한잔하고.”
쿨한 모습으로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태훈을 보며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를 따라 들어온 유리아가 그에게 서신을 내밀었다.
다리아 남작 어머니의 편지였다.
편지에는 약을 잘 받았으며 사건이 있던 날의 자세한 내용이 쓰여 있었다.
거기다 본인의 서명까지 날인되어 있으니 물증으로는 충분.
재판이 다시 열려 증인으로까지 나선다면 결과를 바꿀 수 있었다.
하지만 3왕자와 맞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정작 본인도 쉽사리 증인으로 나서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이 편지만으로는 재판을 다시 열리게 하는 것밖에는 안 돼.’
전 남작의 부인을 증인으로 나오게 하려면 여론을 조성해야 했다.
“유리아, 궁에 아는 사람 없어? 드나드는 사람이라도 좋아.”
“저보다는 오일 경이나 바스테리온 공작님을 통해 알아보는 게 편할 텐데요.”
“그쪽까지는 안 돼.”
“무슨 일이신데 그러십니까?”
“아직 말할 수는 없어.”
그가 말을 아끼자 유리아가 실망하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자신 말고 아무도 모른다는 말에 그녀의 표정이 조금 펴졌다.
“자주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궁에서 근무하는 위병조장과 아는 사이입니다.”
“어떻게 아는 사인데?”
“검술 훈련을 받을 때 기초과정의 교관이셨습니다. 그런데 졸업 후엔 전혀 연락을 하지 않아서…….”
“너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나?”
유리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궁에서 일하는 위병조장은 일반 경비나 위병과는 달라. 섣불리 뇌물을 먹일 수도 없는데.’
결국 유리아 때처럼 자연스럽게 접근하는 방법을 택해야 했다.
그는 유리아가 알고 있는 위병조장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냈다.
위병조장이 술을 좋아해 퇴근 후엔 술을 마신다는 것을 알고는 바로 행동에 옮겼다.
해가 질 무렵 허름한 술집에 나타난 위병조장은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중년이었다.
태훈은 자연스럽게 합석하며 그에게 술을 사주었다.
위병조장이 취하자 3왕자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비밀리에 궁을 나가는 경우가 있으며 외박도 더러 한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그저 방탕한 생활을 하는 왕자 정도의 소문.
평판을 떨어뜨릴 순 있었지만 고립시키기엔 무리가 있었다.
술에 절은 조장은 눈이 반쯤 풀린 상태였다.
“근데 자네는 3왕자에 대해서 관심이 많구만?”
“뭐 출세하려면 줄을 대야죠.”
“푸핫, 자네 같은 평민이 황족에게 줄을 댄다고? 오크가 마법 쓴다는 소리하고 있구만.”
“모아둔 돈이 꽤 됩니다. 실제 귀족층에도 연줄이 좀 있구요.”
“그래서? 나한테 뭘 원하길래 접근해 온 건가.”
“3왕자가 여색을 좀 밝힌다는 소문이 있는데. 아시는 게 좀 없습니까?”
“흥, 높으신 양반들이야 다 그렇지. 틈만 나면 옆구리에 끼고 있는 게 여자 아닌가.”
“평범한 여자가 아니라 유부녀를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만.”
“…….”
조장은 놀라거나 되묻지 않았다.
오히려 살짝 표정이 굳어지며 말문을 닫자 태훈은 옳거니 했다.
“그게 사실입니까?”
“자네 그거 어디서 들었나?”
“귀족에도 연줄이 있다고 했잖습니까. 발신처는 말 못 합니다.”
“흠, 난 모르는…….”
툭-
태훈은 그의 앞에 돈이 담긴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술을 마시며 조장과 대화해 본 결과 그는 상당히 돈을 필요로 하는 남자였다.
술과 투기장을 좋아하는 남자에게 돈은 항상 마르는 법이었다.
주머니 안을 본 조장은 술기운이 싹 가시며 눈을 껌벅였다.
“대단한 걸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3왕자님의 취향을 확실히 알고 싶어서요.”
“자네 사람 장사하나?”
“뭐 비슷합니다.”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건가?”
“3왕자님이 출타하실 때마다 기별을 넣어주실 수 있습니까?”
조장은 생각에 잠겼다.
3왕자가 출타를 할 때 위병에게 따로 연락이 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출타용 마차가 따로 있어서 그것이 궁궐을 드나들 때가 있었다.
그날은 3왕자가 외출을 하는 날이었다.
“자네를 어떻게 믿지? 자네가 암살이라도 한다면 내 목숨도 파리 목숨이야.”
조장은 술이 조금씩 깨면서 조심스러워했다.
“제가 3왕자님을 암살해서 뭐가 좋겠습니까? 3왕자님이 권력 다툼을 하시는 것도 아닌데요.”
“그……. 그렇긴 하지.”
조장은 힐끔힐끔 주머니를 쳐다보았다.
돈과 본분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 같자 태훈은 주머니를 하나 더 내밀었다.
“똑같은 금액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정보를 주실 때마다 소금화 1닢씩을 드리죠.”
“으흐흠!”
두 주머니의 금액을 모두 합하면 대금화 5닢은 되는 금액이었다.
평생을 벌어도 벌지 못할 정도의 금액 앞에 조장은 무너졌다.
그는 주머니를 자신의 품 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어떻게 알리면 되나.”
“사람 하나를 조장님이 근무하시는 초소 옆 벽 너머에 대기시키겠습니다. 돌에 표시를 해서 벽 너머로 던져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장은 비틀거리며 술집을 나섰다.
‘사람은 고쳐 쓰기 어렵지. 3왕자의 현장만 잡아낸다면 충분해.’
다음 날이 되자 태훈은 보스완 백작가로 향했다.
백작은 정원에 차를 마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두고 있었다.
잠시 후 나타난 영애를 본 태훈은 자신도 모르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짙은 푸른빛의 긴 생머리는 뒤로 묶고 있었다.
눈은 컸고 코는 적당히 높았으며 백옥 같은 피부에 그의 동공이 커졌다.
전형적인 지구의 미인상에 그의 심장이 뛰었다.
“그렇게 빤히 보시면…….”
“아, 미안합니다. 앉으시죠.”
태훈은 의자를 빼내 주었다.
마주 앉은 둘은 잠시 대화가 없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태훈이었다.
“차가 식으니 차부터 드시죠.”
“감사합니다.”
말없이 차를 들이켜는 중에도 태훈은 계속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느껴지는지 영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크로이츠 남작님이 저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솔직히…… 믿기 어렵습니다.”
“이해합니다. 저라도 그럴 테니까요. 서로 천천히 알아가면 됩니다.”
보스완 레이첼.
올해 20살로 2남 2녀 중 나이로는 3번째였다.
그 아래로 2살 차이의 남동생이 있었지만 이미 3년 전에 결혼.
보스완 백작가에서 결혼을 하지 못한 것은 그녀뿐이었다.
태훈은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외모가 마음에도 들었지만 그녀는 때 묻지 않았다.
추한 외모라는 이곳의 특성상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거기에 손가락질 당하고 눈치를 보며 가족과도 원활한 소통을 하지 못해 보였다.
비밀이 많은 그에게는 완벽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레이첼의 마음의 벽을 허물기 위해 그는 최대한 그녀를 배려하며 편하게 해주려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머뭇거리며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았다.
‘지구라면 술이라도 한잔하겠지만 지금은 낮이고 지구도 아니니.’
사실 태훈도 이 상황이 낯설긴 마찬가지였다.
여성과 소개팅 같은 만남을 가져본 적은 있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다.
“레이첼님은 취미가 있습니까?”
“전 책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책? 어떤 종류의 책입니까?”
“가리지 않습니다. 방에 있던 시간이 많다 보니…….”
여기서 취미로 책을 읽는다는 것은 흔치 않았다.
종이라는 것이 굉장히 비쌌으니 책이라는 것 자체가 희귀했다.
그러다 보니 책으로 보관하는 것은 중요한 내용을 기술한 기술서가 대부분.
간혹 역사서 같은 것들이 있긴 했지만 둘 다 여성이 좋아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그녀가 방에서 얼마나 심심해할지가 눈에 그려졌다.
‘아, 혹시……. 그거라면…….’
좋은 생각이 떠오르자 그가 운을 떼었다.
“읽는 것을 좋아하시나 보군요. 혹시 소설 좋아하십니까?”
“소설? 그게 뭔가요?”
이곳에서의 로맨스 이야기는 대부분 구전으로 전해졌다.
내용 역시 우여곡절이 없는 밋밋한 것이었다.
“가상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이죠. 음유시인들의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음유시인?”
그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떠돌아다니며 곳곳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음유시인들은 여성들에게 인기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걸 기록할 정도로 종이가 흔한 물건은 아니잖습니까.”
“돈은 넘쳐납니다. 원하신다면 책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레이첼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누던 그는 마차를 타고 의료원과 상회를 들렀다.
귀족 환자들은 지쳐 보이긴 했지만 문제는 없어 보였고 상회도 여전히 성황이었다.
“알, 종이 좀 구해줘.”
“종이 말입니까? 얼마나요?”
“구할 수 있는 대로.”
“그 많은 종이를 어디다 쓰시려고?”
“책을 만들 거야. 구하는 대로 전부 저택으로 보내줘. 펜과 잉크도 부탁해.”
점심 무렵이 됐을 때 마차 두 대가 저택에 도착했다.
수많은 상자 안에는 문방구류가 가득 담겨 있었다.
태훈은 지구에서 보고 들었던 내용을 토대로 직접 쓸 생각이었다.
‘소설을 써보기는 처음인데.’
설레는 마음으로 책상에 앉은 그는 펜을 들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펜촉을 타고 잉크만이 흘러내렸다.
“젠장! 난 드라마를 본 적이 없어!”
그는 여성에게 인기 있던 드라마를 소설화시켜 볼 생각이었다.
K드라마 열풍을 일으켰던 로맨스 드라마라면 먹힐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제목만 들어봤을 뿐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보던 것은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다큐멘터리, 뉴스뿐이었다.
지구에서 정치 이야기와 북극곰에 대해 이야기하다 까인 경력도 있었다.
하지만 큰소리까지 쳤으니 어떻게든 써야 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결국 드라마 쪽을 포기하고 다른 것을 적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