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백작가 영애는 당황하며 직접 문을 손으로 밀려 했다.
하지만 막고 있는 그의 손에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문 좀 열어주세요.”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어딜 가시려고 하시는 거죠?”
“그…… 급한 일이 있어서요. 저택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상하군요. 급한 전갈을 전하러 온 사람도 없는데요.”
“…….”
백작가 영애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백짓장이 되는 느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앞의 사내가 자신을 골탕 먹이려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백작가 사람입니다. 이 이상은 실례입니다.”
“뭐 정히 가시겠다면 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다만 초대장을 받으셨는데 인사도 없이 돌아가실 정도의 중요한 일이라면 제가 추후 백작가에 문의를 해도 될까요?”
그의 말대로 영애의 행동 또한 실례가 될 만한 일이었다.
“사실 바람이 좀 쐬고 싶어서…….”
“그럼 제가 정원을 안내해 드리죠.”
태훈은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파티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의 행동에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보스완 백작가의 차녀는 추녀로 유명했다.
시집을 갈 나이가 한참 지났는데도 결혼을 하지 못한 자제는 차녀가 유일했다.
가문에서도 꺼려하는 존재였기에 그의 행동에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가 그녀를 조롱한다고 생각하고는 모두가 킥킥댔다.
모두가 자신을 비웃자 영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온 태훈은 정원을 거닐었다.
세 걸음 떨어져서 걷던 백작가 영애는 모퉁이를 돌자 멈추어 섰다.
“왜 그러신 건가요?”
“제일 관심 있는 분이 말없이 돌아가시려 하기에 붙잡았습니다.”
그 말에 백작가 영애는 발끈했다.
과거에도 비슷하게 자신을 조롱하는 귀족가의 남자들을 여럿 보았었기 때문.
“절 조롱하시는 건가요? 만족하셨으면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영애는 그에게 목례를 하고는 등을 돌렸다.
태훈은 그런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영애님의 과거가 짐작은 갑니다만 저는 진심입니다.”
“끝까지 절 우롱하시는군요. 그렇게 진심이라면 정식으로 찾아오세요!”
태훈은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녀를 더 붙잡아봤자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름만 이라도 알려주시죠.”
“레이첼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정문으로 걸어 나갔다.
마차를 타고 사라지는 그녀를 보며 태훈은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성격 좀 있네. 당한 게 많아서 그런 건가?”
자신의 말대로 태훈은 그녀에게 관심이 많았다.
손목을 낚아챘을 때 그는 아넬리아 이외에 그렇게 얇은 손목은 만져본 적이 없었다.
귀족가의 영애인 이상 식생활은 다른 이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게 분명했다.
그런대도 저런 몸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은 체질 문제였다.
장내로 돌아가자 많은 여성들이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들이대기 시작했다.
엄청난 재산.
그리고 공국의 의원까지 겸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진 지 오래였다.
아직 남작이지만 백작을 넘어 자작까지도 문제가 아니라는 소문이 팽배해 있었다.
그는 웃는 얼굴로 그들과 하나하나 인사를 나눠야 했다.
뒤늦게 온 오일 경은 빠르게 취한 뒤 그를 데리고 다니며 자랑하기 바빴다.
그 덕에 여자들 사이에서는 신경전까지 벌어졌다.
정신없는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되자 유리아가 찾아왔다.
“남작님, 오늘 면접이 있습니다.”
“무슨 면접?”
“시종장이 추천한 저택 경비 병력입니다.”
“모두 몇 명이야?”
“오늘 면접 보기로 한 자들은 7명입니다.”
“음, 모두 너에게 맡기마.”
태훈은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네? 하지만…….”
“저택 경비는 네게 모두 일임하는 거야. 난 가볼 데가 있어서.”
“그럼 면접을 미루고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태훈은 그런 그녀에게 알과 동행하니 걱정 말라고 해주었다.
저택 밖으로 나가니 알이 마차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잘 준비해 왔어?”
“이른 아침이라 구할 수 있는 것들로 구했습니다.”
“좋아, 가자.”
태훈과 알이 오르자 마차가 출발했다.
마차가 멈추어 선 곳은 태훈의 저택보다 큰 저택이었다.
마당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가 마차를 세웠다.
귀족의 방문임을 안 병사는 태훈의 신분을 확인하며 물었다.
“무슨 용건으로 오셨습니까?”
“어제 이 댁의 영애님께서 남작님의 파티에 다녀가셨다. 그 일로 남작님께서 백작님과 직접 대화하러 오셨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병사는 귀족이 찾아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나온 병사의 옆에는 시종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저는 시종장 홉킨스라고 합니다. 혹시 어젯밤 무도회 겸 파티를 여셨던…….”
“크로이츠 남작이다. 백작님은 일어나 계시는가?”
태훈이 직접 이야기하자 시종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어떤 문제로 찾아오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차녀님의 문제로 왔다.”
시종장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
차녀 문제로 항의를 하러 왔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저택으로 들어간 태훈은 홀에서 알과 함께 대기했다.
잠시 후 등장한 보스완 백작은 그를 보며 두 팔을 벌렸다.
“오, 크로이츠 남작. 초면이로군.”
“반갑습니다, 보스완 백작님. 이른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음, 아니네. 아니야. 일단 앉지.”
홀에 있는 소파에 착석하자 곧 차와 다과가 나왔다.
백작은 양손을 비비더니 뭔가 결심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
“어제 일은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하네. 초대장은 받았는데 미혼인 자식이 하나밖에 없어서 말이야.”
백작도 태훈이 따지러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른 몸으로 인해 귀족들 사이에서도 손가락질 받는 딸이었다.
그렇다 보니 혼기도 놓친 노처녀 신세였다.
하지만 귀족회의 이름으로 온 무도회 초대장을 무시할 순 없었다.
그리고 이런 경우도 처음은 아니었다.
“딸아이도 오자마자 용서를 빌더군.”
“용서를 빌어요?”
“음, 자기가 아무래도 실수를 한 것 같다고 하더군. 자세한 건 물어보지 않았네만 혹시 딸아이가 실수했다면 정말 미안하네.”
백작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백작이 남작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될 일.
하지만 태훈의 뒤에 재무부의 대신과 바스테리온 공작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막강한 배경이었다.
“아닙니다, 결례를 범한 건 접니다. 영애께서는 잘못한 것이 없으니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엉? 그럼 왜 찾아온 건가?”
백작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태훈이 알에게 턱짓을 하자 알은 바깥으로 나갔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상자를 든 저택의 시용인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백작의 옆에 놓인 상자는 모두 3개.
상자를 열자 거기엔 온갖 사치품들이 들어 있었다.
“이게 다 뭔가?”
“어젯밤에는 저 때문에 영애께서 놀림감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그에 대한 사과입니다.”
백작은 자세한 상황을 말해달라고 했다.
있는 그대로를 설명한 백작은 다시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사과할 일인가?”
“따님이 창피를 당하셨습니다. 사과를 해야지요.”
“아, 미안하네. 자네 말이 맞기는 한데 그런 일은 처음 있는 일도 아니라. 오히려 자네가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아서 말이지. 용건은 정말 그것뿐인가?”
한 번도 이런 일이 없던 백작은 태훈의 용건이 다른 데 있다고 생각했다.
평상시대로라면 기분이 매우 나쁜 귀족이 등장하여 으름장을 놓고 사라진 경우가 허다했다.
“아, 한 가지 용건이 더 있습니다. 차녀님과 좀 더 만나보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귀족간의 연애는 당연히 부모의 허락을 맡아야 했다.
그렇지 않고 만남을 이어간다면 그건 귀족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에 충분.
거기다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짓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백작은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이야기가 진실인지 아니면 조롱의 또 다른 방법인지 고민하는 듯했다.
“자네가 정식으로 만나보고 싶다면 허락은 하겠네만 정녕 진심인지 믿기지 않는군.”
“절대 조롱이 아닙니다. 제 명예와 목숨을 걸지요.”
백작은 심각하게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잠시 기다리게.”
백작은 사람을 위층으로 보냈다.
잠시 후 어제처럼 면사포를 드리운 영애가 나타났다.
영애는 계단을 내려오다 멈칫했지만 아버지의 성화에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여기 계신 남작님께서 너와 정식으로 만나보고 싶다고 하신다.”
“하지만…….”
그녀가 거부하려는 듯하자 백작은 딸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윽박지르듯 말했다.
“네가 지금 거절할 처지더냐! 크로이츠 남작은 장래가 촉망한 재력 있는 가문이야!”
“…….”
“네가 그간 많이 우롱당했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내가 보니 그는 진심이야.”
“알겠습니다.”
마지못한 듯이 영애가 수락하자 백작은 몸을 돌렸다.
그러곤 활짝 웃었다.
“딸아이도 좋다는군.”
“제 뜻을 헤아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님.”
“허허, 아니네. 부족한 여식이지만 잘 부탁하네.”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태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백작은 왜 벌써 돌아가느냐며 말렸다.
“아직 아침 식사 전이라면 같이 식사하는 게 어떤가.”
“배려는 감사합니다만 오늘은 공작님에게 가려던 길에 들른 것이라서요.”
전날 파티가 끝날 무렵 공작에게서 전갈이 있었다.
공국 근처의 은신처에서 사로잡은 자들에 대한 문초가 끝났다며 이야기하자는 내용이었다.
“아, 그런가. 공작님에게 가는 길이었나.”
“네, 모처럼 신경 써주셨는데 죄송합니다.”
태훈은 영애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그녀의 손을 양손으로 잡으며 자신의 명치 앞으로 끌어 올렸다.
“내일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내일은 얼굴을 보여주셨으면 좋겠네요.”
백작의 환대를 받으며 저택을 나온 태훈은 마차에 올랐다.
태훈이 떠나간 뒤 백작의 저택은 떠들썩했다.
미래가 유망한 귀족이 추하다는 이유로 외면받던 자신의 딸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은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보스완 백작은 신이 나 귀족회의에 가서 자랑을 하고 다녔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귀족들은 반반으로 나뉘어졌다.
남작이 장난삼아 백작 영애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는 반응.
또 다른 하나는 남작의 취향이 변태적이라는 반응이었다.
한편 공작가에 도착한 태훈은 공작의 표정을 보고 잘 풀리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전원 입을 열지 않아.”
“이단심문관을 써보시지 그러십니까. 아, 지금 총국과는 껄끄러운가요?”
“이단심문관도 써봤어. 하지만 전부 쓰잘데기 없는 자료뿐이었네.”
태훈에겐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런데 내 자식 놈은 어쩌고 있나?”
“의료원 처방에 잘 따라주고 있습니다. 3개월 후에는 많이 좋아지실 겁니다.”
“신경 좀 많이 써주게. 아내가 유난히 말썽이라서 말이야. 사실 장인어른도 비슷한 병으로 돌아가셨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인데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그는 처음 불려 갔을 때 오라가 바뀐 두 명의 귀족들을 언급했다.
두 명의 이름이 나오자 공작은 조금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두 명은 왜?”
“저희 정보에 의하면 그들이 정체불명 조직과 접촉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대체 그 정보를 주는 자들은 누구인가? 나에게 말해줄 수 없나?”
“죄송합니다. 그건 공국 기밀이라…….”
“……그 둘은 포로들을 잡아온 날부터 행방불명이야. 비밀로 실종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나 보군.”
포로들이 자신들에 관련된 것을 불었다간 큰 문제였다.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 바엔 가문과 재산을 두고 도망친 것을 선택했을 쪽이 높았다.
공작과의 면담을 마치고 나온 태훈은 마차에 올랐다.
알은 상회의 일을 보러 갔기에 마차 안에는 그 혼자였다.
번즈 남작가 앞을 지나던 태훈은 골목에서 뮤즈를 불렀다.
침입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저택으로 돌아온 그는 유리아가 다른 자와 검을 맞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둘 다 목검이었고 다른 자들도 뒤에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