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가면의 인물이 갑자기 나타나자 남작은 자신도 모르게 태훈의 뒤로 숨었다.
“이, 이자는 누굽니까?”
“이쪽은 제가 계약하고 있는 용병입니다. 혹시 들어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
태훈은 남방 연합과 아무드의 전쟁 이야기를 꺼냈다.
그곳에서 중립으로 활동했던 용병이라 말하자 다리아 남작의 눈빛이 달라졌다.
“마스터 최상의 경지와 7클래스 마법사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설마 이분이?”
“그 인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이 몸담고 있는 조직의 일원입니다.”
태훈은 뮤즈가 그 당사자라는 사실은 숨겼다.
다리아 남작이 조금 실망하는 눈치를 보였다.
태훈은 그 인물 중 한 명이 아끼는 자라며 뮤즈의 평가를 올렸다.
“이분이 우리를 지킨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녀 혼자서도 궁정 기사 100명은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이니 걱정 마시지요.”
“100명!? 그런데 남작님은 어떻게 그들과 알게 된 사이입니까?”
“사업상 관계를 맺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 이상은 말씀드리기가 곤란하군요.”
태훈은 그에게 비밀을 유지해 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다리아가 아직 어린 점을 생각하여 주의를 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가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만약 말이 새어나가면 다리아 남작님이나 저나 하루를 채 넘기지 못할 겁니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남작가를 나오며 태훈은 뮤즈를 불렀다.
“당분간 여길 지키면 돼. 의심되는 인물이나 침입자는 배제하고.”
“알겠습니다.”
“너 정말 아무 문제 없는 거야?”
여전히 무감정으로 대하는 그녀를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몸에는 아무 이상 없습니다.”
“알겠어. 일단 여길 잘 지켜. 문제 있으면 바로 보고해 주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태훈은 다시 한번 찜찜함을 느끼며 저택으로 돌아왔다.
처방전을 적고 있을 때 알이 들어왔다.
“마침 잘 왔어. 처방전을 줄 테니까 의료원에 전달 좀 해줘.”
“안 그래도 저도 의료원 일 때문에 왔습니다.”
“무슨 일 있어?”
“입원시킨 귀족들이 말썽입니다.”
협심증 치료를 위해 입원시킨 귀족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다는 말에 그는 직접 의료원으로 향했다.
그를 본 귀족들은 다짜고짜 성을 냈다.
“이제야 왔구만! 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무슨 짓이라니요? 저는 여러분의 치료를 돕고 있습니다.”
“음식도 없이 운동만 시킨다는 말은 안 했잖은가!”
공작가의 차남이 태훈의 멱살을 잡았다.
뒤에 있던 다른 귀족들은 힘에 부친 듯한 표정이었다.
“이런 치료법이 있다는 것은 들어본 적 없어.”
“여러분은 기본적으로 살을 빼야 합니다. 그 병은 비만이 원인입니다.”
“추해지라는 건가?”
뚱뚱할수록 미의 기준이 되는 이곳에서 다이어트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오래 사시는 것과 추해지는 것. 둘 중 하나는 선택하셔야 합니다.”
“그럼 제대로 설명이나 하게. 왜 이게 치료인지.”
태훈은 동맥경화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귀족들이 물었다.
“그러니까 피가 돌아다니는 길이 막혔다는 건가.”
“그게 살을 빼는 것과 무슨 상관이야?”
“여러분의 혈관을 막은 것은 온갖 지방덩어리입니다. 그걸 없애야 하는데 식이요법과 운동은 필수죠.”
“자네가 주는 약은?”
“그 약은 일순간뿐입니다.”
“그럼 그 약이나 많이 줘. 돈은 얼마든지 낼 테니까.”
공작가의 차남은 약이 얼마나 비싸든 지불하겠다고 했다.
차남의 말대로 약만 지어줘도 되었다.
문제는 보관법과 복용법이 조심스러워야 했다.
일자무식에게 니트로글리세린을 맡긴다는 것은 논외였다.
“그 약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약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을 약이 없어도 되는 상황까지 만들어 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처음과 말이 다르잖나. 약만 먹으면 된다면서.”
“속인 것은 죄송합니다. 하지만 뻔히 죽을 것을 알면서 그냥 보내 드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진심 어린 말에 사람들은 잠시 침묵했다.
그래도 공작가의 차남은 그의 멱살을 놓지 않았다.
“이렇게 살 바엔 병으로 죽기 전에 굶어죽어!”
‘참을성이라곤 없는 자식이군.’ 태훈은 자신의 멱살을 잡은 손을 힘을 주어 떨어뜨렸다.
“여러분을 쉽게 죽게 만들진 않습니다. 여긴 사람을 살리는 의료원이고 훈련받은 자들이 대기하고 있죠.”
“대체 얼마나 더 이래야 하는 건가?”
“3개월. 3개월 후에 결정하겠습니다.”
“그 말은 더 길어질 수도 있다는 건가?”
“본래라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잡아두기도 싫으니 3개월 후에 여러분의 의지로 결정해 주세요. 대신 3개월은 저를 믿어주셨으면 합니다.”
귀족들은 고민하는 듯했다.
입원하고 나서부터 하루 세 끼는 제공됐지만 육류는 제외.
그리고 식후 30분 후에 한 시간 운동이 스케줄이었다.
협심증 환자라 무리가 될까 운동은 단순한 걷기와 PT 정도의 수준이었다.
별것 아닌 처방이었지만 한평생 운동과 조절이란 것을 해본 적 없는 그들이었다.
한 귀족이 해보겠다고 하자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동의했다.
공작가의 차남만이 남은 상황.
“필레온 님. 부귀영화도 살아남아야 누리는 겁니다.”
“차도가 없다면 3개월 후에 저자를 문책하면 될 일입니다.”
귀족들이 나서서 차남을 설득했다.
필레온은 말없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3개월 후에 차도가 없다면 기만죄로 널 귀족회에 고발하겠다.”
“좋습니다. 대신 제 치료법에 따라주시길 바랍니다.”
태훈은 현재 치료법에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이미 의료원의 처방은 정평이 나 있는 상태.
하지만 위생 개념과 올바른 식습관 등 중요한 정보를 담은 책자의 인지도는 없었다.
하지만 구제 불능의 귀족까지 치료했다는 소문이 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다.
성공 사례가 된다면 제국, 나아가 다른 나라들에도 홍보가 될 수 있는 상황.
확답과 3개월간 지시에 따르겠다는 공증까지 받은 뒤에 태훈은 두 부인의 약을 지어 보냈다.
다음 날에는 아침부터 저택이 분주했다.
오일 경이 제시했던 반려를 고르기 위한 무도회가 있는 날이었다.
이미 한번 경험이 있던 태훈은 그러려니 했다.
“기분이 어떠십니까? 이번이 처음은 아니신데.”
“그냥 덤덤해.”
“도리아 님이 걸리진 않습니까?”
“거기서 왜 도리아가 나와? 이제 각자 갈 길 가는 거지. 나는 내 나름대로 신세를 갚고 있고.”
실제로 도리아가 힘써준 레드크로스 상회는 잘 굴러가고 있었다.
더불어 막대한 수익금도 보내지고 있었다.
“그럼 아무렇지 않으시겠네요.”
알은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도리아의 할아버지인 글렌 의원에게서 온 편지였다.
편지엔 도리아가 자국 내 공작가의 자제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적혀 있었다.
“잘됐네. 도리아도 마냥 혼자일 수는 없으니까.”
“또 있습니다.”
알이 또 다른 서신을 내밀었다.
파케 영애의 조부에게서 온 편지였다.
현재 카나리스에서 태훈의 생사를 아는 자는 파케 백작이 유일.
태훈에게 소식통이 되어주고 있었다.
“아넬리아 누님이 결혼?”
“네, 프로이센 가문의 장남과 결혼하신답니다.”
프로이센 가문은 카나리스에서도 손에 꼽히는 대부호 가문이었다.
“아, 그래? 하긴 누님도 결혼할 나이는 넘었지.”
태훈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가장 아끼던 두 사람이 결혼한다는 소식은 기뻐할 일.
다만 자신은 공식적으로 축하를 해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는 상회 지배인 이름으로 선물을 보내라고 지시했다.
“남작님,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시종장 네리오를 따라 로비로 내려가자 화려한 파티장이 펼쳐져 있었다.
왕궁에서 펼치는 무도회만큼은 아니었지만 꽤나 돈을 들였다는 느낌이었다.
“얼마나 들었어?”
“대금화 3닢입니다.”
네리오는 고개를 숙이며 영수증을 내밀었다.
상당히 많은 영수증을 본 태훈은 알에게 넘겨주었다.
“상회 경비 처리로 처리해 줘.”
“그런데 유리아 녀석은 어딨습니까?”
“오늘 경비 문제 때문에 경비대에 갔을 거야.”
“사병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유리아 혼자서 하루 종일 지킬 수도 없는 노릇인데요.”
“너 유리아 신경 많이 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경비 문제는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네리오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앞으로 나섰다.
“혹시 사병을 찾으신다면 소개해 드리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데?”
“전에 이곳을 경비하던 사병들이 있습니다. 전부 흩어지긴 했지만 연락이 닿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생판 모르는 용병들을 고용하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었다.
“실력은?”
“경비대랑 큰 차이가 없을 겁니다.”
“그 정도면 확실히 인건비를 아낄 수는 있지.”
경비대에 경비 병력을 요청하는 것은 상당히 번거롭고 돈이 드는 일이었다.
비번인 병사들을 고용하는 것인데 본래는 불법이었다.
수도 경비대의 월급은 적기에 투잡을 뛰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유리아가 경비 책임자니 그 녀석과 이야기해. 비용은 걱정 말고.”
“감사합니다. 모두들 좋아할 겁니다.”
석양이 질 무렵부터 마차가 저택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초대 명단에는 바스테리온 공작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공작가가 참여한다는 이상 수도의 웬만한 귀족들은 참석을 해야 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수도의 귀족뿐만이 아니라 인근 영지의 지방 귀족들도 속속 도착했다.
가문의 수장이 직접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보통 반려자의 무도회에는 혼기가 찬 여성과 차기 가문의 당주들이 오는 경우가 많았다.
“안녕하십니까, 남작님.”
“……백작가의 장남인 오스카입니다. 동생인 나탈리와 함께 왔습니다.”
태훈은 저택으로 들어오는 여성들을 보았다.
카나리스에 있을 때나 아무드의 무도회 때와 마찬가지로 살찐 돼지들만이 눈에 띌 뿐이었다.
오늘도 헛된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 태훈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건배사로 파티가 시작되었다.
반려자에 대한 기대는 포기한 지 오래인 그는 큰 상회를 가진 귀족가와 접촉했다.
큰 상회일수록 타국에 지부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을 통해 다른 왕국의 귀족과의 접점을 만들 수도 있었다.
바쁘게 장내를 돌아다니던 중 태훈은 한쪽 구석에 있는 테이블을 보았다.
파티 전까지만 해도 탁자가 없던 곳에 놓인 탁자.
그 위에는 다른 테이블에 비해 먹을 것과 마실 것도 적었다.
그리고 그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여성에게 시선이 갔다.
한눈에 봐도 여자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얄상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장내 경비를 서고 있던 유리아를 손짓으로 불렀다.
그녀의 정체를 묻자 품에서 명단을 꺼낸 유리아는 그녀가 백작가의 차녀라 대답했다.
“동행인은 없나?”
“네, 없습니다. 혼자서 오셨습니다.”
동행이 없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가문에서 내놓은 사람이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
그런 사람을 이런 파티에 보냈다는 것은 그 가문에 미혼 여성이 그 사람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명목상으로 보낸 것이었다.
태훈은 호기심에 그녀를 눈여겨보였다.
그녀도 그렇고 모든 미혼 여성은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파티의 1부는 유력자들 간의 대화의 장.
2부가 되어서야 본래 목적인 영애들과의 인사가 시작되었다.
인사가 시작되자 동행과 함께 여성들이 태훈에게 인사를 해왔다.
인사를 받는 척하며 귓등으로 흘리면서 그의 신경은 파티의 구석에 쏠려 있었다.
모두의 인사가 끝났음에도 여자는 태훈에게 인사를 하러 오지 않았다.
오히려 인사 시간이 끝날 때쯤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스윽-
그녀가 문으로 다가가자 문을 지키고 서 있던 시종장이 문을 열어주려 했다.
끼이이-
턱-
태훈은 잽싸게 달려가 열리는 문을 멈추어 세웠다.
여성이 놀란 듯 태훈을 올려다보았다.
면사포에 가려지긴 했지만 그 너머로 놀라는 듯한 표정이 훤히 보였다.
“보스완 백작가의 영애님이시죠? 아직 인사를 받지 못했는데 어딜 가시는 겁니까.”
“네? 아, 그게…… ”
그녀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다는 것을 알자 식은땀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