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번즈 남작가로 향하던 태훈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생각해 보니 민감한 문제를 건드리는 것이기도 했다.
다음 날, 태훈은 선물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번즈 남작가는 제국 귀족층이 머무는 구역의 맨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그 말은 곧 남작가의 영향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문을 지나 마차에서 내린 태훈은 저택을 한번 훑어보았다.
자신이 받은 저택보다 낡고 시용인도 얼마되지 않는 것 같았다.
“반갑습니다. 번즈 남작님을 모시고 있는 로이든입니다.”
“유리아라고 합니다. 남작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번즈 남작가의 기사가 인사한 뒤 태훈에게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남작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받아 들어간 집무실에는 엣된 소년이 앉아 있었다.
사전조사로 반 년 전쯤 선대가 사망하고 어린 아들이 가문을 물려받았다고 알고 있었다.
‘들은 것보다 너무 어리군.’
태훈은 연장자답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번즈 남작님.”
“어서 오세요, 크로이츠 남작님.”
어린 남작은 밝은 미소로 그를 맞이했다.
“장안의 화제인 남작님이 저를 다 찾아오시다니.”
“하하, 그런가요. 다른 귀족들에게 두루 인사를 다니고 있습니다.”
“바스테리온 공작님과 친분이 있다고 들었는데 굳이 그러실 필요가…….”
“공작님과는 공무 때문에 알게 된 사이입니다. 사실 친분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조언해 주신다면 기쁘겠습니다.”
겉치레를 하며 태훈은 집무실을 훑었다.
특이한 것 없는 평범함.
너무 평범해서 귀족가의 집무실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이상하군. 위증을 해준 대가로 뭔가를 받았을 텐데.”
태훈은 번즈 남작가의 첩이 위증을 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탈론과 사제의 말이 사실이라면 범인은 따로 있었다.
그리고 태훈은 그것이 올리버라고 짐작했다.
“우선 선물입니다. 듣자 하니 남작님도 작위 계승을 한 지 반년 정도 되셨다고.”
“이건……?”
“선물입니다.”
“아, 저는 아무것도 준비한 것이 없는데.”
남작은 미안해하면서 선물을 받았다.
선물을 보고 흥분한 듯한 아이의 웃음.
‘다리아 번즈. 정실 부인의 막내아들이었던가.’
어린 남작은 선물을 꺼내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건 공예품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제 상회의 새 무역품으로 밀고 있죠.”
“상당히 비싸 보입니다.”
도자기를 본 남작은 깜탄한 눈초리였다.
“전문가 말로는 대금화 3닢 정도의 값어치가 있다고 하더군요.”
“대금화 3닢…….”
남작은 당황해하며 책상 위에 도자기를 조심히 내려놓았다.
“오늘은 어쩐 일로 방문을 하셨나요?”
“저와 비슷한 또래의 귀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번 찾아뵙고 싶었습니다.”
태훈의 공식적인 나이는 17세.
번즈 남작이 다음으로 나이가 어린 것이 공식적인 기록이었다.
“저는 생각도 못 했는데 감사합니다.”
“그런데 다른 가족분들은 안 계십니까?”
“아, 어머님 두 분이 계신데 두 분 다 몸이 안 좋으셔서 쉬고 계십니다.”
“저런, 그럼 제가 도움을 좀 드리고 싶은데요. 소문을 들으셨으면 아시겠지만 전 약을 전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주신다면 정말 감사합니다.”
다리아 남작은 기뻐하며 태훈을 안내했다.
정실 부인은 심한 신부전증을 겪고 있었다.
‘이건 투석하기에도 너무 늦었어.’
온몸이 붓고 노란빛이 감도는 피부.
투석이란 개념도 없었지만 한다 하더라도 많이 늦은 상태였다.
그는 정실 부인의 부어오른 손을 만지며 물었다.
“음, 신전에는 가보셨습니까?”
“네, 가보긴 했습니다만 별다른 차도가…….”
“배에 복수가 차고 온몸이 부었군요.”
“혹시 좋은 약이 있습니까?”
“고통을 덜어드릴 수 있는 약은 있습니다. 추후에 보내 드리죠.”
“아, 감사합니다.”
정실 부인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리아 남작은 그런 어머니를 보는 것이 일상적이었는지 별다른 감정을 보이지 않고 방을 나섰다.
다음으로 찾아간 것은 두 번째 부인.
태훈이 보고 싶어 했던 인물이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작은 어머님, 크로이츠 남작님이 오셨습니다.”
후실은 그렇게 살이 찌지 않았다.
환자를 살필 줄 안다고 소개한 그는 그녀를 찬찬히 훑었다.
그러면서 팔꿈치의 상처를 살폈다.
신관의 치료였는지 흉터는 없었지만 팔의 각도가 살짝 돌아가 있었다.
“외관상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어디가 불편하신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매사에 어지럽습니다. 가끔 복통이 있기도 합니다.”
“신전에서는 뭐라고 하나요?”
“약만 먹으면 낫는다고 해서 계속 복용하고 있습니다.”
“약?”
신전에서 약을 줬다는 말에 그는 의아해했다.
약을 보고 싶다고 하자 다리아 남작이 약병을 가져왔다.
‘포션은 아니야. 하지만 이 냄새. 어디선가…….’
태훈은 자신의 기억 속에서 약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왕자로 있던 시절 재배실에서 보았던 것임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남쪽 지방에서만 자라는 풀로 배탈에 좋은 약.
하지만 특정 약초와 섞지 않으면 그냥 독초였다.
치명적인 독은 아니었지만 식중독처럼 복통과 구토를 유발했다.
“이 약은 직접 신전에서 받아오신 겁니까?”
“아, 그것이……. 사실 저희는 신전에서 약을 구입할 정도로 재정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다리아 남작은 민망하다는 듯이 얼굴을 붉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신을 후원하는 상회에서 대신 약을 사다 준다고 했다.
“혹시 그 상회가…….”
“하이디 상회입니다.”
‘역시…….’ 태훈은 약병을 손 안에서 이리저리 굴렸다.
장기 복용하면 궤양까지 일으킬 수 있는 약이었다.
“하이디 상회와는 어떻게 아시게 된 겁니까?”
“왕실에서 소개해 주셨습니다. 둘째 어머님이 그, 험한 일을 당하셨을 때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입 밖으로 꺼내기가 꺼렸는지 다리아 남작은 말끝을 흐렸다.
험한 일이라는 것은 탈론과 관계된 사건이 분명해 보였다.
‘올리버가 저지른 일을 황실에서 덮어주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태훈은 부인의 증세를 살펴보고 싶다며 독대를 하고 싶다했다.
다리아 남작은 흔쾌히 수락했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좀 더 살펴보니 후실은 영양실조를 겪고 있었다.
말라 보이지 않았던 것은 부종 때문이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가 입을 열었다.
태훈은 약의 처방을 바꾸고 의료원에서 지속적인 치료를 받기를 권했다.
“그러면 나을 수 있는 겁니까?”
“건강한 몸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치료가 가능하다면 받고 싶습니다. 다만…… ”
“다만?”
“치료비가…… ”
후실은 부끄럽고 민망한지 얼굴을 붉혔다.
남작 가문은 사실상 수도 생활을 이어가기도 벅찬 상태였다.
“황실이나 하이디 상회에서 도와주지 않던가요?”
“네? 그게 갑자기 무슨…….”
“부인께서 겪으신 사건. 거기서 위증하는 대가로 얻은 게 있지 않으십니까?”
“그……. 그런 일 없습니다.”
태훈도 나름 조사를 해보았다.
먼저 살해당한 피해자들의 가문은 모두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귀족계에서 입김이 적어진다.
불평불만을 내도 들어줄 리가 없었다.
약자들을 노린 범죄였던 것.
“부인께서는 범인의 얼굴을 아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정말 그게 탈론이 맞습니까?”
“일 없습니다. 돌아가세요.”
후실은 태훈에게 등을 돌려 누웠다.
하지만 그는 굽히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부인의 몸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놈들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부인께서 복용하시던 약. 이건 약이 아니라 미비한 독입니다.”
“도……. 독?”
후실은 놀라며 다시 태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태훈은 맞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죽이면 주위의 의심을 사겠죠. 유일한 연쇄살인의 피해자에게 시선이 몰려 있으니까요.”
“하……. 하지만 그 약은 신전이 보증하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신전은 까맣게 모르고 있을 겁니다. 원하시면 믿을 만한 사람을 시켜 알아보십시오.”
“…….”
놀란 것인지 배신감에 치를 떠는 것인지 이불을 쥔 후실의 손이 떨렸다.
“어떻게 그런…….”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자, 그럼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후실은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은 태훈이 예상한 대로였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범인은 올리버가 아니었다.
“음, 그랬군요. 그럼 그는 부인의 탈출을 도운 자가 아닙니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기사들이 찾아와서 가문을 걸고 협박하는 바람에.”
“그럼 그들이 약속한 것은 뭡니까?”
“가문이 수도에서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다리아에게 유복한 가문과 혼인 할 수 있도록 신경 써준다고 했습니다.”
“그럼 결국 지켜지지 않았는데 어째서?”
“계속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대신 약은 정기적으로 주길래 믿고 있었죠.”
“사람들에게 알려보는 방법도 있지 않았나요?”
“결과를 번복하기엔 이미 늦었다고 생각해서. 그리고 제가 결과를 번복해서 3왕자를 지목했다면 아무도 안 믿었을 겁니다.”
범인은 올리버가 아니었다.
3왕자가 범인이었고 올리버는 입막음을 하고 다녔던 것.
분해하는 모습을 본 태훈은 그녀에게 거래를 제시했다.
치료에 최선을 다해주겠다.
경제적 지원은 물론이고 3왕자나 올리의 손길로부터 지켜주겠다고 했다.
“저도 남작님 소문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일개 남작의 신분으로 어떻게 황실을…….”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인께서 저를 믿어주시느냐 마느냐입니다.”
“가문과 다리아를 지켜주실 수 있습니까?”
“본인 자식이 아닌데 꽤나 아끼시는군요.”
“저는 자식이 없습니다. 하지만 다리아는 저를 어머니라 여겨주었습니다. 선대에게 제 친정이 도움을 받은 것도 있구요.”
태훈은 맹세코 지키겠노라 대답했다.
그러자 후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려달라 했다.
그는 지금까지 해오던 생활을 바꿀 필요가 없다 했다.
다만 매일 복용하던 약을 중지하고 자신이 보내줄 약을 먹으라 했다.
“약은 아무도 모르게 버리십시오. 제가 보낼 약도 선물로 치장해서 정기적으로 보내 드리죠.”
“크로이츠 남작님의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재판을 다시 열 계획입니다. 증인도 이렇게 있고 피해자인 당사자도 어렵게 살아남고 있습니다.”
“3왕자가 알아채기라도 한다면 크로이츠 남작님뿐만 아니라 저희 가문도 위험해집니다.”
태훈은 실력이 믿을 만한 자들을 가문의 호위로 붙여놓겠다고 했다.
다만 그러려면 다리아 남작이나 가문의 관계자들이 집 밖으로 나와선 안 된다고 덧붙였다.
“그럼 다리아에게도 말을 해야 합니다.”
“아직 어린 나이입니다. 진실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을 겁니다.”
후실은 다리아 남작을 불렀다.
다리아 남작이 방으로 들어오자 태훈은 자리를 비켜주었다.
문 밖에서 서성이며 기다리기를 십여 분.
문이 열리며 고개를 숙인 다리아 남작이 걸어 나왔다.
“이야기는 다 들으셨습니까?”
“크로이츠 남작님의 이야기는 전부 사실입니까?”
끄덕끄덕.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리아 남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곤 자그마한 주먹으로 벽을 내려쳤다.
“그런…….”
“어쩌실 겁니까? 저를 믿고 맡겨 보시겠습니까?”
“혹시 저의 친어머니의 병도 나으실 수 있습니까?”
태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타깝지만 너무 늦으셨습니다.”
“그럼 작은 어머니라도 살려야 합니다. 치료를 해주신다는 약속은…….”
“제 목숨을 걸고 말씀드리죠. 더 이상 후실 마님의 병은 깊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남작님 가문도 지켜 드리죠.”
“……알겠습니다.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까지…….”
“올리버라는 자에게 원한이 좀 있습니다. 단순한 저의 복수심이죠.”
“단순해선 안 됩니다. 이건 저희 가문이 걸린 일. 저희의 안전을 책임져 주실 수 있습니까?”
“염려 마십시오. 최고의 실력자를 저택에 붙여놓겠습니다.”
남작은 끝끝내 못미더웠는지 그 실력자를 보고 싶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뮤즈의 정체를 드러내야 했다.
하지만 이내 좋은 생각이 났는지 저택 뒤의 공터로 이동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뮤즈에게 가면을 쓰게 하고 나타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