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그런 반응을 예상했던 그는 잠시 시간을 기다려 주었다.
“왜 그런 제의를…….”
“유리아 씨와는 일면식도 있고 알의 제자이기도 하지. 알한테 들었는데 실력이 괜찮다지?”
“하지만…….”
유리아가 주저하자 태훈은 뭔가 걸리는 게 있다면 말해보라고 했다.
유리아는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강조했다.
태훈은 개의치 않는다고 문제를 가볍게 넘겼다.
“귀족의 기사라는 건 그렇게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주종간의 충성심과 연대감이…….”
“어차피 공개 모집을 해도 생판 남이 오게 될 텐데 툭 까놓고 유리아 씨랑 그들이랑 다를 게 없잖아.”
“알 군이 있잖습니까. 그의 실력은 다른 기사와 견주어 뒤지지 않습니다.”
유리아는 알이 오리진을 다룰 줄 아는 기사인 줄은 모르고 있었다.
다만 그에게 검을 배움으로서 상당한 경지라는 것만을 알고 있었다.
“알은 부지배인. 내가 없을 때 내 대신 일을 봐야 하는데 기사가 되면 따라다녀야 하잖아. 상회 일을 믿고 맡길 사람이 필요해.”
이런저런 이유를 대도 태훈이 합당한 반론을 내놓자 유리악는 말이 없어졌다.
유리아가 쉽게 결정을 못 내리자 태훈이 패를 내밀었다.
“뭐 유리아 씨에게 대단한 충성심을 바라는 건 아니야. 그럼 계약직은 어떤가?”
“계약직?”
“아버님의 약값을 갚을 때까지만 해두는 거지.”
귀족이 기사를 고용할 때 기간을 정해두는 계약직도 존재했다.
흔히 실력은 좋지만 용병이나 출신이 불분명할 때 쓰는 방법이었다.
다만 기사가 되면 귀족 측에 들어가기 때문에 계약 기사인 경우는 사교계에 보고를 해야 했다.
“그때까지 내 기사 일을 해보고 내키면 정식으로 기사가 되는 게 어떻겠나?”
나쁘지 않은 제의라고 생각한 유리아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크로이츠 남작가의 계약 기사가 되겠습니다.”
“음, 좋아. 약 한 달치 값으로 계산해서 계약기간은 반 년.”
약의 값어치는 한 병에 대금화 2닢.
한 달 치면 대금화 60닢이었으니 한 달 급여가 대금화 10닢이었다.
궁정 기사였던 알보다도 훨씬 높은 금액이었고 제국 궁정 기사와 맞먹는 금액이었다.
“그건 너무…….”
“많다고?”
“저도 양심이 있습니다. 그런 금액은 받을 수 없습니다.”
“내 기사 일은 빡세. 일반 귀족과는 다르다. 목숨을 걸어야 할 경우도 많아. 이건 진심이야.”
태훈이 힘주며 진지하게 말했다.
유리아는 그가 농담을 하는 게 아님을 알고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왜 무서운가? 무서우면 그만두던가. 약값은 다른 방법으로 내도 무방해.”
“아니요, 하겠습니다. 위험하지 않은 기사직은 없습니다.”
용케 용기를 내는 모습에 태훈은 피식 웃었다.
“좋아, 그럼 여기 사인해.”
유리아는 태훈이 내민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계약이 마무리되자 태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도 기사 작위인데 약식은 지켜야지.”
태훈이 책상 위에 있던 검을 들어 올리자 유리아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검을 뽑아 그녀의 머리 위에 가져 다 댄 다음 서약을 읊었다.
“나 크로이츠는 유리아를 가문의 기사로 임명한다.”
본래 기사의 서약이 이루어질 때 성이 없는 자에게는 성을 하사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계약 기사는 계약 만료 후 원래의 신분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성을 주는 관례는 없었다.
“저 유리아는 몸과 마음을 다해 크로이츠 님을 섬길 것을 맹세합니다.”
서약이 끝나자 태훈은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검집째 유리아에게 내밀었다.
“선물이다.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 말라고 주는 거야.”
“감사합니다.”
유리아는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검을 살펴보던 중 깜짝 놀랐다.
“이건 미스릴 검입니까?”
“아아, 부담 갖지 마. 방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어디 가서 맞지 말고 다니라고 주는 거니까.”
“감사합니다. 소중히 하겠습니다.”
태훈이 그녀에게 준 검은 제노비아 왕비에게서 받은 검이었다.
그 검이 있다고 그녀가 오리진을 다룰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리진을 다루는 상대를 만났을 때 검이 두 동강이 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태훈은 계약서를 주며 귀족 회의에 보고하라고 했다.
“재무부에서는 언제 나올 생각이지?”
“서류를 내면서 사직서를 제출하겠습니다.”
“오일 경한테는 내가 어제 말해뒀으니까 어려운 서류는 없을 거야.”
그 말에 유리아가 놀랐다.
“제가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수도 있잖습니까.
“받아들이게끔 만들 생각이었지.”
당했다는 듯한 표정을 짓던 유리아는 이내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유리아가 방을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시종장이 그녀에게 뭔가를 건네주었다.
열쇠였다.
“이건?”
“남작님께서 거처를 옮기시라고 했습니다. 다른 시용인이 안내해 줄 겁니다.”
본래 기사는 귀족 저택에 항시 머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유리아 입장에서는 필요 없는 집이었지만 아버지의 병에 깨끗한 환경이 필요하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다.
시용인을 따라간 곳은 남작 저택에서 걸어서 10분도 걸리지 않는 곳이었다.
깨끗하고 온전히 석조로 된 2층짜리 건물.
필요한 집기들도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식량 창고 역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미 다 준비가 되어 있었던 거구나.’
그의 철두철미함에 졌다는 표정을 하고 있을 때 다른 시용인이 그녀의 아버지를 데리고 왔다.
아버지와 눈이 마주친 유리아는 어색해했지만 이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금일부로 남작가의 계약 기사가 되었어. 아빠도 남작님께 누가 안 되도록 행동해.”
“오, 오!”
그 이야기를 들은 그녀의 아버지는 감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남작가의 시용인이란 사람이 찾아왔을 때 그는 겁에 질려 있었다.
귀족이 평민을 찾는 이유는 대게 좋지 못했다.
자신의 딸이 어릴 때부터 기사가 되고 싶어 했던 것을 잘 아는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잘됐구나! 축하한다!”
“그……. 그만해! 다시 일하러 가야 한다고!”
껴안는 아버지를 밀치는 유리아의 손은 매몰차지 않았다.
시용인과 유리아가 집을 나서자 혼자 남은 그녀의 아버지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태훈은 다음 신약의 출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가 위험하다며 조심하라고 당부했던 니트로글리세린.
위험한 폭발물이기도 했지만 심장 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획기적인 치료제이기도 했다.
고도비만이 판을 치는 이곳에서 사람들의 혈관 상태는 최악이었다.
꽉 막힌 고속도로만큼이나 혈액 순환에 문제 있는 자들이 많았다.
가장 필요한 것은 운동이었지만 기사나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을 제외하곤 개먹이 따위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의료원에서 건강에 관한 책자를 내고는 있지만 반응은 미비했다.
우선은 임상 실험이었다.
그간 개발해 내놓은 약들은 기존의 약초 효과를 증대시킨 것.
하지만 이번은 화합물을 이용한 새로운 치료제였다.
임상 실험이 필요했고 그 대상을 물색해야 했다.
협심증 환자를 물색하던 태훈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태훈이 없는 사이 알은 의료원에 VIP 룸을 만들어 운용하고 있었다.
의료원이 병을 잘 다룬다는 소문은 귀족을 움직이게 만들었던 것.
다만 평민들이 드나들다 보니 체면 때문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알이 캐치해 낸 것이다.
의료원에 등록된 증상들을 검색하던 그는 몇 명의 후보들을 가려냈다.
협심증의 환자 대부분은 고도비만의 귀족들.
태훈은 사람을 시켜 그들의 저택에 편지를 띄웠다.
그중에는 바스테리온 공작의 처남도 있었다.
모인 사람은 총 다섯 명.
0.1톤은 우습게 보이는 체구를 가진 사람들의 나이대는 다양했다.
십 대 중반부터 오십 대까지.
“모두 잘 오셨습니다. 제가 연락을 드린 크로이츠 남작입니다.”
“흠, 소문은 익히 들었네. 그래서 우리 병을 낫게 해줄 수 있다고?”
바스테리온 공작의 처남이 물었다.
그의 나이는 20대 초반.
하지만 가장 큰 거구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직 시중에 유통할 단계는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을 모신 이유는 약의 효과가 어떤지 알아보기 위함입니다.”
태훈은 작은 유리병을 내밀었다.
니트로글리세린이 담긴 병.
작은 충격에도 폭발할 수 있기에 그의 손은 조심스러웠다.
“아직 실험중이라면 우리한테 실험하겠다는 건가?”
“기분 나빠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껏 만든 약이 실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 안심해 주십시오.”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중년의 남자가 못 미더운 눈치로 말했다.
“레드크로스 상회의 약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네. 하지만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이야.”
“협심증이라는 증상입니다. 피가 도는 도로가 막히는 거죠. 가슴이 타들어가듯이 아플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의심하던 사람들은 잠시 서로를 쳐다보았다.
협심증의 가장 큰 증상은 가슴의 통증.
그러다 발작으로 이어지고 이윽고 심정지로까지 이어졌다.
“아마 여러분의 선대분들로 그런 증상을 겪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외람되지만 근시일 내에 사망하실 확률이 높습니다.”
태훈의 말은 사실이었기에 사람들은 군소리를 할 수 없었다.
“여러분은 당분간 합숙을 해주셔야 합니다.”
“합숙? 여기서 지내란 말인가?”
“아닙니다. 의료원에 특별 병실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곳에서 정해진 일정에 맞추어 지내셔야 합니다.”
태훈은 3개월의 시간을 제시했다.
약을 복용시킴과 동시에 운동 처방을 할 생각이었다.
“아마 빡빡한 일정이 되실 겁니다. 정해주신 대로만 하신다면 3개월 후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실 수 있습니다.”
“고위 신관도 어쩔 수 없는 병을 약으로 치료한다라…….”
사람들은 긴가민가한 반응이었다.
하나에 대금화 수 닢이나 하는 최상급 포션으로도 그들의 병은 고칠 수 없었다.
그런 병을 검증되지 않은 약으로 치료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자율적인 참여가 있어야 합니다. 의지가 없다면 제 치료법은 소용이 없습니다.”
“흠, 난 가겠네. 어차피 살아갈 날도 많지 않은데 정체 모를 약을 복용할 순 없지.”
가장 나이가 많은 중년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작님. 치료를 받으시면 좀 더 편한 노후를 보내실 수 있습니다.”
“말은 고맙지만 사양하지.”
중년의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남은 사람은 네 명.
모두 젊었고 삶에 대한 집착이 있었는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럼 남으신 분들은 협조해 주시는 겁니까?”
침묵으로 긍정을 표한 사람들.
태훈은 그들에게 서약서 한 장을 내밀었다.
철저한 외부인 출입 금지.
정해진 식단.
정해진 일과.
3개월간 지켜야 할 수칙을 본 사람들은 얼굴을 찡그렸다.
“꽤나 빡빡하군.”
“건강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소소한 희생이죠.”
“뭐 좋아. 그대를 믿어보지.”
태훈은 그길로 네 명을 입원시켰다.
그리고 혹시나 있을지 모를 탈출과 외부 음식 반입을 막기 위해 경비를 두었다.
태훈은 이번 치료에 신경을 많이 쓰려 했다.
환자들의 신분도 신분이지만 고위급 인사들의 입김이 필요했다.
의료원에서 전파하는 건강지식 책자는 무시당하기 일쑤.
고위급 인사들이 산증인이 되어준다면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공국의 공방에 편지를 띄웠다.
약으로 쓰는 니트로글리세린을 공급해야 하는데 운반에 있어 최악의 물질.
안정적인 이동을 위해 그는 구레드르에게 완충에 신경을 쓴 용기를 제작하도록 부탁했다.
먼저 가져온 약이 바닥이 날 때쭘 공국으로부터 물건이 도착했다.
알려주지도 않았던 스프링의 개념이 적용된 상자가 도착했다.
그리고 또 다른 짐을 확인하고 유리아를 불렀다.
짐을 건네받은 유리아는 감격에 겨워했다.
여자의 체형에 맞는 풀메이트 갑옷이 도착한 것.
구레드르에게 부탁한 유리아의 갑옷이었다.
“감사합니다. 이런 훌륭한 것을.”
“드워프 수제품이야. 대금화 수닢은 될 거다.”
유리아가 갑옷을 들고 좋아라 방을 나섰을 때 방 안의 마나가 요동쳤다.
찻잔에 들어 있던 액체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잠시 뒤 물의 지니가 모습을 드러내었고 그 옆에는 뮤즈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