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다음 날 태훈은 기존의 상회 사무실에서 필요한 것들을 저택으로 옮겼다.
활짝 열려 있는 저택의 정문을 본 태훈은 짐을 옮기던 알에게 물었다.
“알, 너 다시 기사할래?”
“새삼스레, 전 원래 왕자님의 기사잖아요.”
“아니, 그거 말고. 명색이 제국 수도 귀족인데 기사랑 경비 병력은 둬야 할 거 아냐.”
“전 상회 부지배인인데 기사 작위를 받으면 주위의 의심을 살 텐데요.”
“하긴 상인이 기사가 되는 건 이상하지.”
태훈은 호송대에서 믿을 만한 자를 빼올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현재 호송단은 균형을 맞춘 상태.
일부만 빼오기에는 균형에 문제가 있고 다른 귀족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싫었다.
“모집하는 건 어떻습니까?”
“외부인을 받아들이는 건 싫어. 안면식이 있어야 하고 성격을 파악한 자여야 하는데.”
고민을 하는 사이 짐은 모두 옮겨졌다.
짐이 모두 정리되자 시용인들은 파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카나리스에서도 그랬고 새로이 귀족이 되는 자들은 파티를 열었다.
사교계에 입문하기도 해야 했지만 무엇보다도 연줄을 대려는 이유였다.
태훈은 제국 사교계에 관심이 없어 파티는 하지 않으려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오일 경은 펄쩍뛰며 만류했다.
결국 파티 준비를 간소하게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시용인들은 태훈의 지시와는 달리 꽤나 성의 있게 준비했다.
그들의 선견지명이었는지 저녁이 되면서부터 저택 앞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태훈이 제국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
뒤로는 재무부가 있고 바스테리온 공작과도 독대를 했던 사이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시용인을 통해 그런 소문이 퍼지고 있다는 것을 들은 태훈은 소문의 출처를 찾아냈다.
“여어, 크로이츠 남작!”
“오일 경 덕분에 이 성황이군요.”
비꼬는 말투였지만 오일 경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내가 힘 좀 썼지. 자네한테 연줄을 대려 하는 자들로 아주 바글바글하구만!”
오일 경도 나름 수확이 있었다.
만오천 골드라는 차익을 본 공작은 오일 경에게 작지만 상금을 내렸다.
바스테리온 공작과 황제의 눈에 들었다는 점에서 오일 경은 원하던 것을 이룬 셈이었다.
그는 마법을 사용해 얼굴의 형태를 조금 바꾸었다.
조금 더 얼굴을 각지게 보이려고 빛에 굴절을 주게 했고 목소리에도 변형을 주었다.
여러 귀족들과 상회의 대리인들은 그에게 얼굴을 보이기 바빴다.
“그나저나 남작님은 부인이 없으신가? 안주인이 안 보이시는구만.”
“하하, 아직 독신입니다.”
“어허, 이런 장래 촉망한 젊은 귀족이 혼자라니! 내가 다리를 놔주지!”
그가 독신이라는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다리를 놓으려 했다.
그중에는 자신의 가족을 팔아먹으려는 자들도 있었다.
이윽고 그들끼리 경쟁이 붙었고 이를 보다 못해 오일 경이 나섰다.
“자자, 이러지들 말고 무도회를 하는 건 어떻소?”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그렇군! 전국 제일 규수대회로군!”
“아니, 누구 맘대로…….”
태훈은 폭주하는 오일 경을 막으려 했지만 술에 취해 신이 난 오일 경은 말을 듣지 않았다.
자정이 넘어서야 끝난 사교계 데뷔 파티가 끝났다.
“기분이 어떻습니까?”
“무슨 기분?”
“도리아 공주님을 배신한 기분이요.”
알이 비꼬듯 능청거렸다.
“야, 이건 내 의지가 아니잖아!”
“네네, 그러시겠죠. 아아, 불쌍한 도리아 공주님. 거기다 홀든이랑 뮤즈도 없는데.”
“뮤즈…….”
문득 뮤즈가 떠오른 태훈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은 정령계에서 회복을 하고 있다지만 돌아와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여러 사달이 날 수 있었다.
“뮤즈한테 말하면 알지?”
“저야 왕자님 편이죠.”
“그나저나 이 녀석은 언제 돌아오는 거야.”
뮤즈의 회복 시간이 궁금해진 태훈은 뒤뜰로 향했다.
시용인들은 파티 뒷정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뒤뜰에는 아무도 없었다.
들고 온 물잔을 놓고 마법진을 만들었다.
이내 소환된 물의 지니에게 뮤즈의 상태를 물었다.
“호전되고 있어요. 그보다 그 상처. 뭐에 당한 거죠?”
“난 싸움 현장을 보진 못했어.”
“그 상처는 신기에게 당한 거예요. 그보다 그쪽은 모은 정보가 없나요?”
태훈은 품 안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지니에게 던졌다.
지니가 종이를 펴들자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놈들 아지트에서 발견한 거야. 이상한 신전도 하나 있던데. 아는 게 있나?”
“정령왕께 보고하죠. 다른 건요?”
“놈들 일당의 이름을 확보해서 조사 중이야. 중간 보스 격인 놈은 자살했고.”
“그렇군요. 그럼 이만 가봐도 되는 건가요?”
“뮤즈는 언제쯤 회복이 되는지 알 수 있나?”
물의 지니는 알 수 없다라고만 대답했다.
상처가 깊어 회복하는 데 오래 걸리고 있다는 정보만 전할 뿐.
“우린 거래를 했잖아. 정보도 전달했는데 그쪽에서 좀 더 신경 써줘야 하는 것 아냐?”
“우리도 그 혼종의 치료에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설마 우리가 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럼 됐어. 그 마법진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면 연락이나 줘.”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이라니까.”
물의 지니가 사라지자 태훈은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알을 불렀다.
“기사 후보자를 찾았어. 네 의견을 들어보고 싶다.”
“오, 누굽니까?”
“유리아.”
“그렇군요, 유리아. 네? 유리아?”
놀라 반문하던 알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음, 뭐 확실히 우리와 가까워지기도 했죠. 하지만 왕자님이 그 녀석을 믿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요.”
“그 녀석 꿈이 원래 기사라며? 좋은 기회이지 않을까?”
“그 녀석이 진심으로 충성을 다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네 의견을 듣고 싶다. 네가 생각하기에 어때?”
알은 사색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한참을 말이 없었다.
가문의 기사를 임명하는 것은 절대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주종 관계가 명확하고 서로 간의 유대감 및 무엇보다 기사의 충성심이 필요했다.
“제가 그 녀석하고 많이 가까워진 거 아시죠?”
“응, 언제 사귈지 지켜보고 있지.”
“그, 그런 사이는 아닙니다!”
발끈한 알은 헛기침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일단 그 녀석의 검술 스승으로 판단하건대 실력은 괜찮습니다. 그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기사가 될 수 없었으니까요. 다만 가능성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알이 말하는 것은 오리진을 다루는 능력의 유무였다.
오리진을 다루는 기사는 기본적으로 나라에서도 특급 대우를 받는 위치.
그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천부적인 재능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유리한테는 가능성이 없어?”
“그걸 제가 알면 점쟁이를 하겠죠. 일단 웬만한 기사들과의 싸움에선 밀리지 않을 겁니다.”
“그거면 충분해. 남작가의 기사인데 오리진까지 바라면 욕심이 과한 거지. 그래서 신용 쪽은?”
“그 녀석한테 가족이 있습니다.”
알은 그녀의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하역장 노역부로 일하는 아버지가 있고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호구조사까지 한 거야? 작정했구만?”
“처음에 조사하라고 시킨 건 왕자님이잖아요. 아무튼 자신이 출세 못 한 건 아버지 탓이라고 원망을 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근데 가끔 보면 아버지를 멀리서 지켜보더라고요. 겉으로는 쌀쌀맞지만 내심 챙기는 거겠지요.”
“뭐야, 츤데레인가?”
“츤, 뭐요? 아무튼 요즘 그녀의 아버지가 병에 걸린 것 같습니다.”
알은 유리아의 아버지가 몸이 아파 노역장에도 나오지 않는 날이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의료원에 데려가 봤냐고 했더니 의료원에서 약을 처방받았다고 했다.
“상태가 호전되긴 했지만 일을 쉬는 날이 많은 모양입니다.”
“그녀의 아버지를 돌본 의사를 데리고 와.”
잠시 후 알은 의사를 데리고 왔다.
의료원의 의사들은 대부분 약초학을 잘 아는 산골 출신이거나 떠돌이 신관들이었다.
태훈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자리를 비운 동안 전부 알이 고용한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고용주를 처음 만나게 된 의사는 공손하게 그녀 아버지의 병세를 말했다.
‘제노비아 왕비와 증상이 같구만.’
그런 생각을 할 때 의사가 덧붙였다.
“그 사람의 상태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습니다. 다만 환경이…….”
“잘 먹고 잘 쉬어야지. 유리아 월급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태훈이 알을 보며 물었다.
“그 녀석 월급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유리아가 말려도 아버지란 사람이 계속해서 고집해서 일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의사를 돌려보낸 태훈은 그녀의 아버지를 만나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유리아가 출근한 사이 태훈은 그녀의 집을 찾았다.
그녀의 아버지도 외출을 했는지 집은 비어 있는 상태.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그렇게 함부로 들어가도 됩니까? 남이 보기라도 하면.”
“나 제국 귀족이야. 귀족이 평민 집에 뭐 훔칠 거 있나 들어가겠어? 그냥 평민 시찰이라고 둘러대면 되지.”
“그럼 전 밖에서 망이라도 보겠습니다.”
태훈은 그녀의 집을 살폈다.
평범하다 못해 너무 평범한 낡은 집.
두 사람이 살기에는 충분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십 대 후반의 여자가 살기에는 많이 부족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곳곳에서 먼지와 곰팡이를 발견한 그는 신력을 사용해 정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방에서 준비해 간 상자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제노비아 왕비에게 시음용으로 주었던 것과 같은 약이었다.
크로이츠 남작이라는 이름이 적힌 종이를 함께 남기고 돌아서려는 그때.
텅-
발밑에서 빈 공간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이 낡아 꺼지려는 것인가 살폈다.
누군가 고의로 바닥의 나무를 잘라낸 다음 끼워 맞췄다는 것을 안 태훈은 나무판자를 들어 올렸다.
판자 아래는 자그마한 공간이 있었고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꺼내 보니 자그마한 항아리.
뚜껑을 열어보니 주화가 들어 있었다.
늘어놓고 보니 대부분 동화.
간혹 은화도 보였다.
‘뭐지? 저금통인가?’
푼돈을 훔쳐갈 생각은 없었기에 태훈은 다시 항아리에 주화를 담았다.
그러다 문득 항아리 뚜껑 안쪽을 보게 되었다.
손바닥만 한 낡은 양피지가 뚜껑 안쪽에 붙어 있었고 작은 글귀가 써져 있었다.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던 태훈은 말없이 뚜껑을 닫고 원위치 시켰다.
끼익-
문을 열고 나오는 태훈을 향해 알이 물었다.
“볼일은 끝나셨습니까?”
“어, 나중에 유리아가 물으면 의료원 보고를 들은 내가 조치했다고 해.”
“그녀석 자존심이 강해서 따지러 올지도 모릅니다.”
“직접 찾아와 주면 고맙지 뭘. 가자.”
태훈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걷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알이 물었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나요?”
“아니, 그냥. 오랜만에 흐뭇한 걸 봐서.”
“네?”
태훈이 웃는 것은 뚜껑 안쪽에 있던 글귀 때문이었다.
거기엔 서툰 공용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
‘우리 딸 결혼 비용’
?
태훈이 약을 두고 갔던 주의 주말.
유리아가 저택에 찾아왔다.
씩씩거리고 찾아왔으나 이제 태훈이 귀족이라는 것을 알고는 화를 가라앉혔다.
태훈을 만난 유리아는 대뜸 그에게 주머니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약의 대금입니다. 후하게 쳐서 드렸습니다.”
태훈이 보니 소금화 2닢이 들어 있었다.
“내가 두고 왔던 거?”
“부재중인 남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실례 아닙니까?”
“유리아 씨가 우리 상회 일도 자주 도와줬다고 알이 그러기에 고마움의 표시니까 도로 넣어.”
태훈은 다시 주머니를 유리아가 내밀었다.
“거절합니다. 제국 사무관은 뇌물을 받지 않습니다.”
“이게 왜 뇌물이야?”
“약의 대금으로 소유권이 넘어간 돈입니다. 제가 도로 받으면 뇌물이죠.”
그녀의 말에 태훈은 꽤나 귀여운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약은 왕족에게만 보내는 특급 상품이야. 하나당 최소 대금화 1닢은 하는 거라고.”
“대……. 대금화…….”
“약이 총 10병이었지? 그럼 이걸로는 한참 부족한데?”
잠시 자신이 내밀었던 주머니를 빤히 보던 유리아는 조심스레 주머니를 챙겼다.
“빚진 걸로 해두겠습니다.”
“뭐 나야 손해 볼 것은 없지. 참고로 그 약 하루에 하나씩 한 달만 복용하면 아버님 병은 깨끗이 나으실 텐데.”
“그……. 그게 정말입니까!?”
부동자세였던 유리아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내가 유리아 씨한테 거짓말 쳐서 이득 볼 게 있나?”
“그……. 그럼 그 약 한 달치만 주십시오. 돈은 제가 어떻게든 마련하겠습니다.”
“돈은 필요 없고 한 가지 제의할 게 있는데.”
“뭡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내 기사가 되어보는 건 어떻겠나?”
갑작스러운 제의에 유리아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