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촛대가 돌아가자 바닥에 마법진이 생겨났다.
8클래스 마법진을 외우고 있는 태훈도 처음 보는 형태였다.
총국의 신전과는 전혀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던 신전.
지하에 이런 제대로 된 신전이 있던 시점부터 의심해 봤어야 했다.
마법진에 빛이 감돌기 시작하자 위기감을 느낀 태훈은 남아 있는 마나를 쥐어짰다.
손에 든 검에 그래비티를 걸자 검에 대해 가해진 중력은 32G.
7,8kg 정도 나가던 검의 무게는 순식간에 200kg이 넘어갔다.
검을 땅에 내려꽂자 육중한 소리와 함께 검이 박혔다.
쾅-
마치 해머로 내려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파편이 튀었다.
“아닛!?”
틈 하나 없는 바닥에 검이 박히는 것을 본 베닝스는 당황했다.
“으아아아!”
태훈은 남아 있던 오리진을 검끝으로 모았다.
그렇게 모여진 검기를 일순간 폭발시켰다.
쾅-
작은 폭발과 함께 태훈과 베닝스, 바닥이 부서지며 튀어올랐다.
두 사람이 바닥에 쓰러지자 걸려 있던 중력 마법이 사라졌다.
태훈의 푸른 마나가 모두 바닥이 났던 것.
혼미해져 가는 정신 줄을 간신히 붙잡은 태훈은 검을 지팡이 삼아 일어섰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비틀거리며 베닝스에게 다가갔다.
베닝스 역시 잘려 나간 팔이 대량 출혈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직 미약하게 남아 있던 붉은 마나를 이용해 베닝스의 출혈을 막으려던 순간 베닝스가 웃었다.
“크큭, 대단한 놈이군.”
“홀든은 어딨나. 그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해줄 말은 없어.”
“말하면 지금 당장 출혈을 멈춰주지.”
“어차피 이곳이 발각되고 파괴된 이상 난 그분에게 죽은 목숨이야.”
으득-
베닝스의 입에서 무언가가 으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다급하게 그의 입을 벌리려 했지만 베닝스는 피를 토하며 옆으로 쓰러졌다.
베닝스가 죽자 태훈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이내 괴성을 지르며 검을 내팽개쳤다.
“이 빌어먹을 자식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놈들이야! 젠장!”
울분을 토한 태훈은 재빨리 방을 나섰다.
바깥에는 적들과 아군이 뒤엉켜 쓰러져 있었다.
보는 눈이 없는 것을 확인한 태훈은 주변을 수색했다.
자신이 있던 방 말고도 다른 몇 개의 방을 찾을 수 있었다.
그중 서재로 보이는 듯한 방을 찾은 태훈은 검을 내려놓고 뒤졌다.
몇 개의 문서를 찾은 태훈은 밖에서 들리는 신음 소리에 문서를 자신의 품안에 쑤셔 넣었다.
바깥으로 나오자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사람들이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부단장 옆으로 태훈이 다가갔다.
“괜찮습니까?”
“뭐가 어떻게 된 일이지?”
“갑자기 몸이 무거워졌습니다. 전 간신히 계단 위로 몸을 피했구요.”
“설마 중력마법이었나.”
부단장은 몸을 추스르고는 적들을 경계하며 부하들을 챙겼다.
태훈이 싸우는 동안 바깥에도 희생자가 여럿 발생했다.
그도 다른 병사들을 도와 사태를 수습했다.
사다리를 타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는 것도 힘들었기에 바깥에 있던 호송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나저나 그 방에 있던 자는 어떻게 된 거지?”
부단장은 신전 안으로 들어간 태훈을 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계단 위에 있었다는 태훈의 말을 믿었다.
“글쎄요, 혀를 깨물고 죽어 있는 걸로 봐선 질 것 같아 자살한 게 아닐지.”
“그걸론 팔이 잘려 나간 게 설명이 안 되는데.”
“뭔가가 폭발한 것처럼 바닥이 터져 있었습니다. 그 폭발에 휩쓸려서 팔이 잘렸겠죠.”
부단장은 뭔가 미심쩍은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력에 눌려 사경을 헤매고 있던 그가 확인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래도 부단장은 사로잡은 적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저들을 데리고 가봤자 마땅한 정보를 캐내진 못하겠지.’
실행인들이나 베닝스를 보아 짐작컨대 가면의 조직들은 입이 무거웠다.
설마 입을 연다 하더라도 신기가 없는 단순 병정인 것으로 보아 정보도 많지 않아 보였다.
간신히 말에 올라탄 태훈은 호송대와 함께 공국으로 돌아왔다.
하루를 꼬박 잔 태훈은 일어나자 마자 가지고 온 문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문서의 대부분은 주고받은 편지.
다른 지방에 있는 중간 관리자들과 주고받은 듯한 내용이었다.
‘가명일지도 모르지만 조사해 보면 알겠지.’
그밖에도 조작원들로부터 온 편지도 있었다.
세레니스 제국은 물론 각 국가에 포진되어 있는 조작원들의 이름.
하지만 가장 중요한 홀든과 관련된 내용은 없었다.
‘두 가지 의문이 남는군. 홀든의 행방과 그 신전의 용도.’
태훈은 옆에 있던 종이에 자신이 보았던 마법진을 그려보았다.
짧은 순간이라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기억에 있던 것을 모두 그릴 수 있었다.
똑똑-
알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일어나신 것 같아 식사를 좀 가져왔습니다.”
“아아, 고마워.”
쟁반에는 음식과 식기가 담겨 있었다.
태훈은 편지에서 보았던 사람들의 이름을 한데 적은 종이를 넘겨주었다.
“이자들에 대해서 조사해 줘. 가명일 수도 있으니 꼭 솜씨 좋은 자들을 시키도록 해. 돈은 얼마가 들던 좋아.”
“낮에 글렌 의원이 다녀갔습니다. 급한 용무가 있으니 눈을 뜨면 찾아달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늦어도 상관없으니 찾아와 달라고 하시던데요.”
“후, 알겠어.”
아직 피곤했지만 옷을 챙겨 입은 태훈은 글렌 의원을 찾아갔다.
글렌 의원을 찾아간 태훈은 습격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럼 생포한 자들은 제국이 데려갔나?”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입은 쉽사리 열 것 같아 보이진 않았습니다.”
“흠, 뭐 하는 놈들인지 궁금하군. 우리나 제국을 상대로 여론 조작까지 할 정도의 규모라.”
글렌 의원은 가면의 조직을 상권 다툼을 벌이는 조직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럼 가봐도 되겠습니까?”
“용건은 아직 남았네. 제국에서 이런 서신이 왔더군.”
태훈은 글렌이 내민 서신을 건네받았다.
봉투에는 제국 황실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봉투 속 편지를 모두 읽은 태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 귀족이라. 예상 못한 바는 아니었습니다.”
편지는 황제의 이름으로 태훈을 남작 작위에 앉힌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자네 같은 부자를 밑에 두고 싶어 하는 거겠지.”
“그렇겠죠. 제국의 귀족이 될 경우 여차할 경우 재산 몰수도 가능하니까요.”
“꼭 그럴 목적은 아닐거야. 자네는 공국 의원이기도 하니까.”
글렌은 제국이 공국에게 유화 제스쳐를 보내는 것 같다 설명했다.
제국의 자금이 상당히 압박을 받는 동안 공국은 유리한 입장에 위치해 있었다.
이번에는 전쟁 특수로 제국이 많은 자금을 벌여들였지만 전쟁은 빨리 끝나 버렸다.
그럼 다시 자금의 압박을 받아야 하는 제국으로서는 빨리 숨통을 터야 했다.
“사실상 총국의 자금 상황은 위태위태해. 레드크로스 상회가 총국의 수입원을 빼앗아 가기도 했지만 지금 총국은 자금을 숨기기에 바빠.”
“지금 제국과 날이 선 상태니까요. 안 그래도 제국 측으로부터 자금 유통에 대한 압박을 풀어달라는 요청도 받았습니다.”
“자네가 시작한 일 아닌가. 이제 은화 제조도 할 필요가 없겠다 풀어줘도 그만 아닌가?”
사실 공국도 계속해서 자금 줄을 막고 있기가 불편했다.
제국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들의 눈총도 따가웠다.
거기에 많은 상단이 자금의 유통에 불편함을 겪자 원성도 많았던 것.
“이제는 풀어도 상관없겠죠. 괜찮습니다.”
“그럼 그 편지는 어떻게 할 텐가? 제국 황제가 직접 쓴 편지야.”
태훈은 손에 들린 편지를 쳐다보았다.
실제로 그냥 거절하기엔 제국 황제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것이었다.
“제국이 노리는 건 돈 아닙니까. 일단 5만 골드 정도는 레드크로스 상회의 개발비 명목으로 지금 바로 옮겨놓도록 하죠.”
“그럼 받아들이는 건가? 그렇게 되면 우리와 제국 간의 다리가 되는 셈이군.”
“영사 비슷한 개념이라고 봐야겠군요. 양쪽에 세금을 내야 하니 저로서는 불만이지만요.”
“기댈 곳이 하나 더 늘어났다고 생각하게.”
“그보다 전쟁 후처리는 어떻습니까?”
“둘 다 냉전 중이네. 두 국가의 국경마저 봉쇄된 터라 상인들의 불만이 자자하지. 풀리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릴 거야.”
태훈은 글렌의 집을 나섰다.
알에게 제국 귀족 건을 이야기하자 걱정했다.
“더 얼굴이 팔리겠군요. 본국이나 도리아 공주님 귀에 들어가면…….”
“허울뿐인 귀족 자리야. 큰 행사에 얼굴을 내밀 필요는 없겠지. 만약 있다고 하더라도 네가 나가면 돼.”
“그럼 앞으로 일정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뮤즈도 없고 홀든도 없어. 적의 본거지 하나는 소탕했으니 당분간은 이쪽도 몸을 사려야지. 정보가 모이길 기다리자.”
기다리는 동안 제국에서 작위 수여 일정이 잡혔다.
작위를 받기 위해 태훈과 알은 제국으로 이동했다.
큰 작위도 아니고 남작 작위였기에 작위식은 간소하게 치러졌다.
오일 경과 바스테리온 공작이 참석했고 몇몇 귀족들이 참석했을 뿐이었다.
황제는 태훈에게 수도의 저택을 하사했다.
제국에 거처가 있긴 했지만 공작은 귀족의 품위가 있다며 저택을 수여했다.
“정말 생각보다 조촐했네요. 제국 귀족 작위식은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겨우 남작 작위식인데 뭘 기대해. 뒷배경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수도 귀족이잖아요.”
영지가 있는 지방 귀족과 달리 수도 귀족은 격이 조금 달랐다.
같은 남작이라 하더라도 지방의 백작 정도의 영향력이 있었다.
“한때 왕성에서 살았던 놈이 뭘 부러워하는 거야.”
“아니, 뭐 그렇다고요.”
수여받은 저택은 3층짜리 저택이었다.
전체가 석조로 된 여느 귀족의 저택과 비슷했다.
저택에 들어서니 시용인들이 태훈을 보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남작님. 저희는 이곳에서 일하던 시용인들입니다.”
“아, 전 귀족이 데리고 있던 사람들인가.”
“네, 저는 시종장 네리오라고 합니다.”
네리오는 나이가 50이 넘어 보이는 중년이었다.
그 뒤로는 시용인이 남녀 합쳐 20명 정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전에 살던 귀족은 작위가 어떻게 됐나?”
“그분도 남작이셨습니다. 현재는 지방에 영지를 하사받으셨습니다.”
쉽게 말해 좌천이었다.
수도 귀족으로 존재하려면 많은 연줄이 필요했다.
더불어 그 연줄을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도 있어야 했다.
“당신들을 따라가지 않았나?”
“지방의 영주성에서는 이렇게 많은 인원은 필요 없다고 하셔서…….”
시종장은 태훈의 눈치를 살짝 보았다.
‘분명 돈이 쪼들렸겠지.’
시종인들에게도 급여는 지급된다.
하물며 수도 귀족에게는 시용인들의 급여 액수도 자랑거리.
또 시용인들의 품위도 중요했다.
전 주인은 지방으로 발령 나며 그들이 필요 없기도 했지만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비밀이 많은 태훈으로서는 생판 남이 저택에서 지낸다는 것이 불편했다.
“갈 곳은 있나?”
“…….”
시종장은 대답 대신 뒤를 돌아보았다.
그 누구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태훈이 받아주지 않는다면 그들을 저택을 나가 백수가 되는 길뿐이었다.
빚이 있다면 노예로 전락할 것이고 막노동이라도 하면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귀족 저택에서 살던 사람들이 바깥 생활을 할 리 만무했다.
태훈과 알의 눈이 마주쳤다.
알은 괜찮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좋다, 너희 모두를 고용하겠다. 전 주인보다 급여를 50프로 올려주지.”
“네에?”
시용인들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자신들을 받아줄지 말지도 모르는 판국에 모두 고용.
그것도 급여 인상이라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 너희들은 나에게 충성을 다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유심히 지켜볼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퇴출이야.”
“감사합니다! 남작님!”
“감사합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시용인들의 접견을 끝낸 태훈은 집 안을 둘러보았다.
평범한 귀족가의 저택.
튀지도 않고 딱 평범한 것이 그의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