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잠시 시간을 주게.”
바스테리온 공작의 요청으로 태훈은 잠시 방을 나왔다.
혼자 남은 태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뮤즈는 잘 회복되고 있는 건가.’
물의 지니와 함께 정령계로 간 뮤즈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과다하게 힘을 사용하여 무방비하게 된 자신이 한심스럽기까지 했다.
‘내 걸 지켜가며 목표를 이루려면 좀 더 강해져야 해.’
상념에 잠겨 있을 때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공작은 태훈에게 8만 닢을 제안했다.
‘이번 전쟁으로 이득을 본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인색하군.’
태훈은 가격을 고수했다.
그러다 협상이 루즈해질 때쯤 제안을 했다.
“제 청을 들어주신다면 8만 5천닢으로 하겠습니다.”
“뭔지 말해보게.”
태훈은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오라를 살피고는 말을 꺼냈다.
“요즘 들리는 이상한 소문이 있습니다.”
“이상한 소문?”
“거대간 조직이 제국에 침투해 여론을 조작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여론을 조작한다?”
공작은 흥미를 보였다.
“국가 간의 분쟁을 부추기고 국력을 약화시킨다는 겁니다. 그 틈을 타 시장 경제를 뒤흔들려고 한다고 합니다.”
“자네는 그 소문을 어디서 들었는가?”
“저희 공국에서 불법 자금을 색출해 내는 것을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그 과정에서 불투명한 자금이 제국으로 흘러들어 왔고 저에게 조사 의뢰를 맡겨왔습니다.”
물론 그런 의뢰는 없었다.
불법 자금의 색출은 하고 있었지만 공국은 시간끌기용으로 활용하고 있을 뿐이었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가면 조직들의 목적은 시장 경제가 아닌 다른 무언가였지만 그럴듯하게 지어냈다.
“그래서 부탁은 뭔가?”
“그건 공작님하고만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태훈은 장내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오라를 체크했다.
그 결과 두 명의 오라가 변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중에 바스테리온 공작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제국 귀족이 연관되어 있는 건가?”
태훈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이 사람들을 무르자 장내에는 공작과 태훈 둘만이 남게되었다.
“말해보게. 제국의 어느 귀족이 관계된 건가?”
“아직 조사 중이라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여론 조장이 가능한 것은 고위귀족만이 가능하죠.”
“그래서 부탁은?”
“정보를 하나 입수했습니다. 그 거대 조직의 아지트로 의심되는 장소인데 상당한 실력자들이 모여 있다고 추정됩니다.”
“흠, 공국은 마땅한 병력이 없지. 그 말은 병력을 빌려달라는 것인가?”
끄덕끄덕.
그는 만반의 준비를 할 요량이었다.
신기를 가진 가면이 몇 명이 더 있는지도 모르고 특히 베닝스라는 전직 용병 출신의 중간 관리자는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었다.
“이 건은 자네만 아는 것인가?”
“지금은 그렇습니다. 본국에도 그 거대 조직이 있을지 몰라 정보 유지를 하고 있습니다.”
“나에겐 서슴없이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나에 대한 조사는 끝났다는 거군?”
“송구스럽습니다.”
사실 공작에게 태훈의 정보는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권력 다툼이 아닌 상업과 관련된 일이었고 공작은 상단이 없었지만 많은 부를 쌓고 있었다.
문제는 몰래 그런 집단이 생긴 데에 대한 모멸감.
자신이 모르는 움직임이 있다는 불쾌감이 컸다.
“자네에게 이용당하는 느낌이 없지만 이 나라의 질서는 어지럽힐 수 없지. 얼마나 원하는가?”
“오리진을 다룰 줄 아는 기사 30명과 상급 마법사 3명 정도면 될 듯싶습니다.”
“신관은 필요 없는가?”
“총국과는 관계가 원만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데리고 있는 신관도 있으니 괜찮습니다.”
“기일은 언제인가?”
“지금 바로 떠날 예정이었습니다.”
“궁정 기사단과 중앙군에서 차출하여 파견하지.”
그렇게 태훈은 자신의 보유한 권리의 2할을 판매한 대가로 대금화 8만 5천 닢이라는 거액을 손에 쥐게 되었다.
‘이거면 더 이상 은화를 찍어댈 필요가 없어. 위험부담은 줄었다.’
대금화 8만 5천 닢이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지금 당장 재산 순위로만 따져봐도 제국 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가 된 것이다.
태훈은 바로 공국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알이 따라오겠다며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네가 없으면 여긴 누가 맡으라고?”
“유리아에게 맡기면 됩니다.”
“그 녀석은 상회 사람이 아니잖아. 어디까지나 제국 공무원이야.”
“왕자님 없는 사이에 상황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태훈이 없는 동안 알은 유리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오일 경이 신경 써주라는 당부의 말도 있었기에 유리아가 협조한 것도 있지만 둘 사이가 생각보다 많이 발전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뭐야, 둘이 사귀어?”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강하게 부정은 못 하는구만. 잘하리라 믿지만 설마 뭔가 빌미를 주진 않았겠지?”
“중요한 건은 전부 제가 처리했습니다.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의 장담을 받고서야 태훈은 그를 동행시켰다.
태훈은 상단의 호위대 중 하나도 동행시켰다.
공국에 도착하자 글렌 의원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몸은 괜찮냐고 물어왔다.
그도 알로부터 태훈이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휴양 중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비밀스럽게 행동하고 있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었다.
그는 글렌 의원에게도 공작에게 했던 것과 같은 정보를 전했다.
“그러니까 비밀 공방을 습격한 건 그 비밀 조직이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레드크로스 상회가 커지니 이권을 노린 것 같습니다.”
“그럼 그들이 은화 제조에 대한 정보를 손에 넣었을 가능성은?”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은화에 대한 정보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면서 더는 은화를 제조할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공작에게서 받은 전표를 글렌 의원에게 보여주었다.
전표에 적힌 금액을 본 글렌 의원의 눈이 커졌다.
“이건 어디서 난 돈인가?”
“바스테리온 공작에게 상회의 제 지분 일부를 팔았습니다. 그중 대금화 1만 닢을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글렌 의원의 표정에서 만족감이 드러났다.
“그동안의 수고료라 이건가?”
“수고료라고 하면 정이 없지 않습니까. 저에게 보여주신 은혜에 대한 답례라고 생각해 주세요.”
“나머지는 어찌하려고?”
“전부 상회에 재투자할 생각입니다. 약 이외에도 다른 분야에 투자할 것이 많습니다.”
태훈은 글렌과 이동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주었다.
제국의 병력과 함께 적을 급습한다는 말에 글렌 의원이 물었다.
“그놈들이 이 근처에 있나?”
“여기서 동쪽으로 반나절 거리에 있습니다.”
“우리 쪽에서 도와줄 일은?”
“아무드와 연합군의 후처리에 대해 알아봐 주십시오. 전후 처리가 어찌 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알겠네.”
태훈은 파케 영애와 구르데르를 찾아갔다.
둘은 교외에 마련되어 있던 예비 비밀 공방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파케 영애는 움직일 수 있었지만 구레드르는 아직 침상 신세였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뭐, 보는 대로네. 면목 없구만.”
태훈은 군말 없이 구레드르의 몸에 손을 댔다.
신력이 흘러들어 가자 구레드르의 부러진 뼈들이 원래대로 맞추어졌다.
“신력? 자네 신관이었나?”
“여기서 본 것들은 전부 잊어야 합니다.”
무거운 분위기에 구레드르는 알겠다는 듯 무언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구레드르의 몸을 모두 회복시키자 그다음은 파케 영애에게 다가갔다.
파케 영애의 화상 흉터까지 모두 치료한 태훈은 다시 한번 과정을 물었다.
“이야기는 전해 들었는데 다시 한번 상황을 말해줘.”
“홀든님이 달라졌다는 건 그분이 잘못해서 구레드르 씨의 술을 마셨을 때였어요.”
“그밖에 다른 점은?”
“조금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 정도? 말투나 행동거지는 원래의 모습이었어.”
파케 영애와 구레드르는 홀든이 자신들에게는 적대적으로 대하지 않으려 했다는 증언을 들었다.
“그러면 공방은 왜 그렇게 된 거야?”
“구레드르 씨가 공격하니 홀든 님도 무기를 들었죠. 처음 보는 무기였어요. 그래서 경황이 없어서…….”
파케 영애는 풀이 죽은 채 실험 중인 플라스크를 던졌노라 했다.
“그 안에 뭐가 들었길래?”
“왕자님이 두고 가신 샘플을 섞은 게 들어 있었어요.”
“그걸 섞었어? 분명히 섞지 말라고…….”
“죄……. 죄송해요.”
파케 영애는 더욱더 풀이 죽어 고개를 숙였다.
섞지 말라는 경고에 그녀는 그것이 위험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호기심이 앞섰고 연금술에 대한 업적을 쌓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그녀의 욕심이었다.
“그래서?”
“그걸 홀든 님한테 던졌는데 그분이 칼로 내려치니까 폭발했어요. 그치만 정말 아주 조금 섞었을 뿐이에요.”
‘역시 불안정한가.’ 태훈은 자기 턱을 쓸어내렸다.
오히려 이만한 피해로 끝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파케 영애가 제조한 것은 니트로글리세린.
글리세린과 질산의 화합물이었다.
다이너마이트의 재료.
하지만 동시에 사람을 살릴 수도 있는 약이 되는 화합물이었다.
파케 영애가 혼나는 듯한 모습을 보고 있던 구레드르가 나섰다.
“파케는 잘못이 없어. 내가 실력이 부족했던 탓이야. 경황이 없던 상황이었네.”
“상황은 이해합니다. 저도 홀든한테 공격당했으니까요.”
“음, 그렇군. 하지만 그것도 내 잘못이야. 아무 생각 없이 자네 위치를 알려주었어.”
이번엔 구레드르가 풀이 죽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태훈은 괜찮다며 둘을 다독였다.
애초에 위험성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고 홀든의 배신은 예상에도 없던 변칙적인 일이었다.
따지자면 홀든을 혼자 보낸 자신이 원인이었다.
“일단 이곳을 본거지삼아 다시 재정비에 들어갑니다. 내일이나 모레쯤에 홀든을 데리러 갈 겁니다.”
“나도 돕겠네.”
구레드르가 앞으로 나섰다.
“죄송하지만 상대는 강합니다. 그것도 다수가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제국 병력과 호송대만을 데리고 갈 겁니다.”
“그렇다면 이거라도 가져가게나.”
구레드르는 자신의 침대 밑에서 뭔가를 꺼내주었다.
천에 쌓인 것을 풀자 검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특별한 장식은 없었지만 한눈에 봐도 명검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건 어디서 난 겁니까?”
“내가 만들었네. 파케 영애야 항상 공방에 박혀 있고 나는 지금 할 일이 없잖나.”
구레드르는 놀고 있는 가마솥과 장비를 이용해서 틈틈이 만들었다고 했다.
태훈이 검을 쥐어 보니 다른 검과는 무게부터가 달랐다.
검신도 일반적인 검보다 한 뼘 정도 길었고 가드 부분이 짧았다.
검신의 두께도 얇은 것이 노멀 소드와 레이피어의 중간 정도 느낌이었다.
“이 무게감은 어디서 오는 거죠?”
“우리 일족에 내려오는 비버이지. 다른 검보다 밀도가 2배 가까이는 될 거야.”
“이렇게 만든 이유는?”
“자네야 오리진을 다루니 검신이 두꺼울 필요는 없고 부러지지만 않으면 될 것 같았네.”
태훈은 검을 몇 번 휘둘러 보았다.
검의 무게 정도는 신력이나 마법으로 충분히 보완이 가능했다.
뮤즈가 없어 무기의 공백이 생겼기에 지금 쓰는 검의 대체로도 충분해 보였다.
“음, 좋네요. 마음에 듭니다.”
“마음에 든다니 마음의 짐이 좀 덜어지는구만.”
“잘 쓰겠습니다. 두 분은 다시 원래 일로 복귀해 주세요. 이쪽 일은 걱정 마시고.”
태훈은 더 이상 은화 제조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알과 함께 공국에 있는 거처로 이동했다.
명실공히 공국의 의원이었기에 그럴듯한 저택도 가지고 있었다.
다음 날 저녁이 되어서 제국의 병력이 도착했다.
기사 30명.
전원이 오리진을 다룰 줄 아는 기사들이었고 병사도 50명 정도가 딸려 있었다.
마법사는 4명.
전원 5클래스를 다룰 줄 아는 숙련된 마법사들이었다.
“지원 임무를 맡은 필레오 부기사단장입니다.”
“가고일 기사단이시군요.”
그가 가진 검의 가드 문양을 확인한 태훈이 말했다.
가고일 기사단은 제국의 8개 궁정 기사단 중 하나였다.
“그렇습니다. 우리 기사단에서 10명. 나머지는 중앙군에서 차출된 기사들입니다.”
태훈은 지원 나온 병력을 보면서 적어도 신기를 가진 적 하나쯤은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이기진 못하겠지만 시간은 끌어주기 충분하겠어.’
그들은 비공식적인 파견이었다.
그렇기에 전부 용병 차림을 하고 있었던 것.
전력을 확인한 태훈은 작전 수립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