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한밤중에 일어난 폭발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잠시 후 제국의 문양을 한 병사들이 달려왔다.
공국과의 협약으로 도시의 치안을 책임지는 병사들이었다.
“무슨 일인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폭발음이 들려서…….”
병사들을 인솔하는 기사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2층 건물이 있던 자리는 온데간데없었다.
1층이었던 부분의 석조만이 조금 남아 있었고 여기저기 판자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것을 본 기사는 마법사의 짓이라고 생각했다.
“너희는 모두 들어가라! 여기는 위험하다.”
기사는 사람들을 물리게 했다.
간혹 떠돌이 하급 마법사들이 사고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고 추가적인 위험이 있을 수 있었다.
후두두둑-
빗방울이 거세어지자 순식간에 시야가 흐려졌다.
병사들이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있을 때 빗줄기 사이에서 사람들이 나타났다.
“루데르. 오늘 당직인가?”
“글렌 의원님?”
사람들을 데리고 나타난 글렌 의원은 기사에게 다가갔다.
“수고가 많군. 무슨 일인가?”
“폭발이 있었다는 신고를 듣고 출동했습니다. 떠돌이 마법사의 짓인 것 같습니다.”
“그렇구만.”
글렌 의원은 현장을 한번 죽 둘러보더니 기사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고생이 많군. 여긴 내가 수습할 테니 들어가 보게.”
“네?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형편없는 실력의 마법사가 도박을 하다가 깽판 친 정도겠지. 심각한 건 아닌 듯하니 들어가 보게.”
“하지만 보고서도 써야 합니다. 일단 현장 수습을 하고 돌아가겠습니다.”
“비도 많이 오는데 제복이 다 젖는구만.”
기사가 두른 망토의 물기를 털어주는 척하며 글렌 의원은 그의 손에 뭔가를 쥐어주었다.
손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기사의 입가가 씰룩였다.
“거렁뱅이들이 싸움을 참 요란하게 하는군요. 집이 부서질 정도라니.”
“그러게 말이야. 단속을 자주 하던가 해야겠어.”
공국에서 허가받지 않은 가게에서의 도박은 불법이었다.
간혹 재력가의 일원이 불법 도박을 하다가 걸리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때마다 재력가들은 뇌물을 쓰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그럼 저는 보고서를 써야 하니 뒷정리를 맡아주시겠습니까?”
“음, 그렇게 하지. 고생했어.”
“어이, 철수한다!”
기사는 병력들을 철수시켰다.
제국 병사들이 사라지자 글렌 의원과 그를 따라온 사람들이 잔해를 뒤지기 시작했다.
잔해 속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글렌은 따라온 사람들에게 들쳐 업게 하고는 황급히 이동시켰다.
“너희는 이곳에 있던 걸 한데 모아서 가져와라. 단 하나도 놓쳐선 안 된다.”
“알겠습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잔해를 모으기 시작했다.
빗소리에 묻혀 그들의 소음은 퍼져나가지 않았다.
한 시간여 만에 잔해를 수습한 사람들은 홀연히 사라졌다.
이송된 두 사람은 바로 치료를 받았다.
구레드르는 심한 화상과 함께 곳곳에 타박상과 골절상을.
파케 영애는 가벼운 화상과 함께 타박상을 입었다.
그리고 둘 모두 고막을 다쳤지만 신관의 치료 덕분에 회복되었다.
둘 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파케 영애였다.
“공방은……. 공방은 어떻게 되었나요?”
“무너졌네. 그보다 어떻게 된 건가?”
글렌 의원은 노심초사했다.
비밀 공방은 약에 대한 자료도 있었지만 은화 제조에 참여했다는 핵심적인 자료도 있었다.
그렇기에 사건 현장에서 제국 병력을 서둘러 철수시킨 것.
“제국에서 사람을 보낸 건가?”
“아니에요. 홀든 님이…….”
사건의 전말을 전해들은 글렌 의원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렇다면 그가 배신해서 제국에 붙은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왕자님의 행방만 물었고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는 듯 보였어요.”
“그렇군. 당분간 숨어 있도록 하게. 장소는 내가 알아봐 주지.”
“감사합니다.”
방을 나온 글렌 의원은 고민에 빠졌다.
은화 제조에 자신이 가담한 것을 제국이 알면 일은 복잡해졌다.
공국을 싸잡아 죄를 물을 게 분명했고 자신은 죽은 목숨과도 다를 게 없었다.
그는 사람을 불러 둘을 감시하게 하는 한편 제국에 있는 상단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 * *
연합군이 국경을 되찾기 위해 전면적으로 공세를 취해오면서 아무드군의 사정은 급해졌다.
아직 완전히 북구되지 않은 요새에서의 농성전은 많은 피해를 가져왔다.
결국 아무드는 제국의 참전을 유도하기 시작했다.
귀족들의 물밑 접촉은 물론 왕가에서는 교섭을 위해 제국으로 왕가의 일원을 보냈다.
제국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도 충분한 이득을 보고 있었고 상아탑이나 다른 국가들과의 확전을 바라지 않았다.
결국 세레니스 제국의 참전이 불투명해지자 아무드군은 물러나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결국 휴전 협정을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
양국의 사령관은 날 선 신경전을 벌였다.
“우리의 요구 조건은 아무드군의 철수와 이번 전쟁에 대한 피해 배상이오.”
“우리가 말하러 온 것은 휴전이지 종전이 아니오만?”
“휴전? 누가 아쉽다고 휴전을 한단 말인가.”
연합군 사령관은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책상 위로 깍지를 꼈다.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휴전을 협정하리라 보는가?”
“애초에 이 전쟁은 그쪽이 야기 시킨 것 아닌가.”
“뭐라?”
연합군 사령관이 발끈하자 아무드 사령관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않은가? 보란 듯이 두 왕국이 연합해서 국경에 군을 주둔하는 게 시비를 거는 것 말고 뭐라 생각할 수 있지?”
“우리가 우리 땅에서 국경을 단단히 한다는데 그쪽의 양해를 구해야 한단 말인가?”
아무드 측은 1년간의 휴전을 요구하고 연합군은 정전과 함께 배상금을 요구했다.
한쪽은 무승부.
한쪽은 승리를 주장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귀국과는 전쟁을 할 수밖에 없군.”
“끝까지 가봐야 정신을 차리려는가.”
결국 회담은 파국으로 이어졌다.
협상 결렬 이후 아무드 군은 즉시 철수 준비를 했다.
자국으로 복귀하여 전열을 재정비하자는 계획이었다.
연합군도 그것을 눈치채고 요새를 단단히 에워쌌다.
“피해가 클 것 같습니다.”
“최대한 많이 살려야 한다. 이후를 기약해야 해.”
요새 안의 아무드군은 3만.
대부분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보병들은 어떻게…….”
“놔두고 간다. 데리고 가봐야 짐이고 포위망을 돌파하기도 전에 대부분 잃겠지. 그럴 바엔 여기서 적의 발목이라도 잡아야 한다.”
아무드의 사령관은 보병과 용병을 두고 가기로 했다.
요새 안에 적을 남겨두면 적도 전력으로 쫓아오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다.
요새의 문이 열리고 아무드군이 쏟아져 나왔다.
“전선을 돌파한다! 흩어지지 말고 뭉쳐라!”
“돌파당하지 마라! 여기서 아무드 놈들의 무덤을 만들어주자!”
뚫으려고 하는 창과 뚫리지 않으려 하는 방패가 맞붙었다.
아무드의 첫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두 번째 시도도 실패로 이어지자 아무드군은 요새의 문을 걸어 잠갔다.
태훈은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난감하군. 아무드의 철수를 돕자니 다시 정비해서 쳐들어올 텐데.’
아무드군이 철수한 이후의 일도 생각해야 했다.
철수를 돕는 것과 동시에 아무드의 기를 꺾어놔야 했다.
아무드군의 세 번째 시도가 시작되자 태훈은 뮤즈를 불러 무기화 시켰다.
그러곤 아무드군보다도 먼저 연합군의 방어선에 도착했다.
‘좋아, 할 수 있겠어.’
태훈은 준비해 온 스크롤을 펼쳤다.
8클래스 이상의 마법은 주문이 필요했다.
그 시간을 아끼기 위해선 마법회로가 들어간 스크롤이 필요했다.
“토네이도.”
스크롤이 증발하여 8클래스 마법이 펼쳐졌다.
요새를 감싸고도 남을 모래 폭풍이 태훈과 아무드 연합군을 감쌌다.
“우아아아악!”
병장기를 입은 연합군 병사들이 몸을 가누지 못했다.
바람에 휩쓸린 중장갑 보병이 나뭇잎처럼 나뒹굴면서 떨어져 나갔다.
“이……. 이게 대체…….”
연합군 측이나 아무드 측이나 넋을 놓고 거대한 바람 장벽을 보았다.
태훈이 아무드군의 선두에 다가갔다.
“네놈은 대체…….”
“뭐 해, 당장 꺼져.”
“…….”
“한 번만 더 이 땅에 발을 디딘다면 그날이 아무드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태훈은 태풍 속에 몸을 숨겼다.
아무드군의 기병이 달리기 시작하자 태훈은 요새에 남은 보병들도 움직이게 했다.
남은 병력들도 요새를 빠져나갔을 때 그의 몸이 휘청거렸다.
‘괜찮으세요, 주인님?’
“아, 괜찮아. 네가 있어도 장시간 마법 유지는 힘드네.”
8클래스 마법을 무려 30분 가까이 유지하고 있었다.
아무드군의 보병이 국경을 넘은 것을 보자 태훈의 몸이 무너지듯 쓰러졌다.
그러자 바람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뮤즈는 검의 형태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쓰러진 태훈을 들쳐 업었다.
은신처로 향하던 뮤즈는 숲 한 가운데서 멈추어 섰다.
그러다 이내 토끼처럼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펑- 펑-
그녀가 있던 자리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수류탄이라도 터진 듯 흙이 튀고 나무가 부서졌다.
심지어 바위마저 부숴 버리는 위력이었다.
뮤즈는 자신을 공격하는 적의 위치를 파악하고 빠르게 다가갔다.
그러곤 단 한 번의 뜀박질로 수 십 미터 언덕으로 날아올랐다.
조금 높은 언덕에서 활로 저격하던 적을 본 뮤즈는 눈썹이 꿈틀거렸다.
‘가면!?’
한 손에 낫을 소환한 그녀는 적이 있는 곳으로 착지하며 휘둘렀다.
깡-
서로의 무기가 맞부딪히며 스파크가 튀었다.
자신의 공격을 정면으로 막아냈다는 것에 놀라워하며 뮤즈가 땅 위로 착지했다.
‘신기로군.’
신기가 느껴지자 뮤즈는 혀를 찼다.
회복은 하고 있지만 태훈은 아직 의식을 잃고 있었다.
“너희들은 시간과 장소도 제대로 못 맞추네. 오붓하게 데이트하는 거 안 보여?”
뮤즈가 이빨을 드러내며 살기를 흘렸다.
그러다 가면이 들고 있는 활을 보고는 어금니를 보였다.
“그건 우리 주인님이 손수 만드신 건데 왜 네놈이 가지고 있어? 우리 편은 어디 있지?”
“그러고 보니 가면은 필요 없지.”
상대가 가면을 벗자 뮤즈의 표정이 차분해졌다.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 돌아왔다는 인사를 이런 식으로 해?”
“면목 없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도 미리 사과하지.”
“그 더러운 가면을 쓰고 신기를 가지고 있는걸 보니 배신인가?”
“그렇게 됐다.”
“하, 자신 있게 뛰쳐 나갈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뮤즈는 태훈을 바위 옆에 내려놓았다.
“설마 무반항인 상대를 공격하진 않겠지?”
“나는 전생에 장군이었다. 그렇게 비열하진 않아.”
“배신자가 비열하지 않다고 말하다니 우습…… 네!”
탓-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단숨에 거리를 좁히며 홀든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쾅- 쾅-
홀든의 신기가 그녀의 낫을 막아낼 때마다 주위에서 풍압이 퍼져 나갔다.
“감히 은혜를 이딴 식으로 갚아?!”
“…….”
“흥, 그래도 양심의 가책은 있나 보지?!”
뮤즈의 공격을 막아내던 홀든은 거리를 벌리기 위해 멀찍이 달아났다.
간격이 벌어지자 활로 바꾸어 시위를 당겼다.
“누가 가만히 놔둔대?”
순식간에 홀든의 옆으로 붙은 뮤즈의 낫에 화살은 하늘로 솟구쳤다.
뮤즈는 빛처럼 그를 내몰았다.
“푸하하하하! 그깟 신기 하나 생겼다고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여전히 기운차군. 하지만 그게 네 단점이지.”
자신에게 바짝 붙은 뮤즈를 향해 홀든은 대거를 휘둘렀다.
대거의 짧은 리치를 본 뮤즈는 코웃음을 쳤다.
“이젠 전투감각까지 상실했나? 나에게 닿지…….”
철컹-
그 순간 대거의 날이 튀어나왔다.
촤르르륵-
급격히 늘어나는 대거의 날을 본 뮤즈는 혀를 차며 몸을 틀었다.
핏-
수 미터 늘어난 대거의 날이 그녀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재밌는 무기네. 하지만 애석하게도 빗나갔어.”
“나도 애석하군. 사과함세.”
휘리릭-
대거의 날이 마치 채찍처럼 휘어졌다.
그러곤 허공에 떠 있는 뮤즈의 등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녀는 늦었다고 생각하고 홀든을 향해 낫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내 반색하며 말했다.
“그 알이라는 종자보단 내가 더 강할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