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사이온 루메드.
루메드는 사로잡은 가면의 사내의 이름이었다.
뮤즈는 옆에서 루메드가 대답을 하지 않으면 고문을 했다.
두꺼운 천으로 얼굴을 감싸고 뒤로 젖혀 물을 붓는 형식이었다.
신기가 없는 루메드는 그저 평범한 남자였고 그때마다 생사를 넘나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가 악착같이 버티자 태훈은 직접 전격을 써가며 대답을 요구했다.
태훈은 과거와 달리 강하게 나가고 있었다.
인질 사건으로 자신이 강하게 나가지 않으면 주위의 사람들이 힘들어진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망설임이 없었다.
“후, 그냥 죽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고문을 받을 땐 상당히 고통스러워하던 루메드는 여유롭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보아하니 넌 신기 없으면 평범한 사람 같은데 다 불고 평범하게 사는 게 어때?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돈은 주겠어.”
“그냥 죽이시는 게 빠를 겁니다. 시간낭비하시는 겁니다.”
“주인님, 일단 손톱이랑 발톱부터 뽑으시죠.”
태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뮤즈는 망설임 없이 루메드의 손톱과 발톱을 뽑아버렸다.
비명과 신음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다 말하면 자금과 함께 풀어주겠어.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다시 시작해.”
“크크큭, 웃기는 소리.”
여유 있게 자신을 비웃자 태훈은 이번엔 직접 루메드의 손을 내려쳤다.
콰직-
마치 우유 곽을 밟듯 루메드의 손이 아작 났다.
“으아악!”
“어디 한번 끝까지 가보자. 어디까지 버티는지 보겠어.”
태훈은 신력으로 손을 복구하고 손톱과 발톱을 복구했다.
뮤즈는 또다시 손톱과 발톱을 뽑고는 소금물에 담갔다.
그러길 수차례.
루메드는 계속해서 제국을 멸망시킨다는 보증이 없다면 입을 열지 않겠다고 했다.
끝까지 버티는 루메드를 보며 태훈은 노선을 틀었다.
“어째서 그렇게 제국에 집착하는 거지?”
“……길고 지루한 이야기입니다.”
“말해봐. 혹시 아나? 네 말을 듣고 결정을 바꿀지.”
“……좋습니다.”
루메드는 제국 귀족의 종자였다.
여타 종자처럼 평민보다는 나은 삶을 살고 있었다.
주인의 권세를 등에 업고 사람들의 위에 서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다 그는 결혼을 하게 됐고 예쁜 신부를 맞이했다.
부인의 배 속에 아이까지 생겼고 그의 주인도 승승장구하며 그의 인생은 행복했다.
그러다 어느 날 주인이 그를 도둑으로 몰았다.
루메드는 끝까지 항변했지만 자신의 방에서 도둑맞은 물건이 나오자 여지없이 체포됐다.
보통 절도는 태형의 형벌이 내려지지만 그는 무려 3년이나 감옥에 있어야 했다.
그는 자신의 부인이 다른 귀족의 첩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찾아갔지만 그쪽 귀족의 저택에서 쫓겨났다.
설상가상 원래 일하던 저택에서도 쫓겨났다.
돈 한 푼, 물건 하나 건지지 못했고 입고 있는 옷이 전부였다.
3년간 온갖 골병이 든 상태에서 그는 간신히 몸을 추스렸다.
몇 날 며칠을 저택 앞에서 기다리며 부인을 기다렸다.
그리고 만나게 된 자신의 부인은 휘황찬란한 옷을 입고 있었다.
자신의 아내가 배신했다는 것을 안 루메드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참고 참으며 배 속 아이의 행방을 찾았다.
알고 지내던 지인의 안내로 도착한 곳은 자그마한 무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살아 있는 채로 묻혔다고 했다.
“그럼 배신한 여자를 탓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감옥에 있었고 그 여자는 온갖 협박을 당했겠지. 아이 때문에 버티고 버텼는데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빼앗겼을 것이오. 옷은 화려해도 내면은 울고 있었을게 분명합니다.”
“아내가 원망스럽진 않았나?”
“잘못이 있다면 나를 3년간이나 가두고 아내를 팔아넘긴 전주인과 아내를 데려간 귀족이겠죠. 아내는 잘못이 없소.”
“그런데 그걸 왜 제국 전체와 연관 짓나?”
“그 후에 두 귀족놈들에게 복수하려 했습니다. 모든 걸 잃기 전에 뿌려둔 돈이 좀 있었고 그걸 갚는 대신 도움을 받았습니다. 모든 건 완벽했죠.”
그 후 루메드는 전주인이 자주 드나드는 창관 앞에서 기다렸다고 했다.
하지만 전주인 대신 나타난 것은 치안대였고 그는 그길로 잡혀갔다고 했다.
“도움을 줬다던 놈들이 배신했군.”
“은화 50닢에 날 팔았더군요. 귀족 살인 미수죄로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러다 교수형 바로 전날 감옥으로 한 남자가 찾아오더군요.”
“그자가 베닝스인가?”
“내 이야기는 여기까집니다. 어떻게 생각은 바뀌셨습니까?”
루메드는 자신과 아내를 팔아먹은 귀족과 지인들을 모두 저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책임을 제국 전체에 묻고 있었다.
“네 주변인들의 잘못을 제국 전체의 잘못으로 돌리기엔 무리가 있는 거 아냐?”
“그놈들이 그놈들이죠. 제국이란 나라 자체가 치가 떨립니다.”
“네 사정은 잘 알았다만 고작 너 한 명의 복수를 위해 제국 전체를 상대하려는 건 미친 짓이야.”
“훗, 역시 당신은 그분을 따라갈 수 없어. 그분은 충분히 그럴 능력이 되거든.”
‘타협점을 찾을 수 없는 건가?’ 흑마법사나 루메드나 그분이라는 존재에게 맹목적인 믿음을 보이고 있었다.
은신처에서 나온 태훈은 바위에 걸터앉았다.
‘대체 장군님은 어딜 가신 거지.’
가면들에 대한 정보와 은신처를 알아내겠다며 떠난 홀든의 모습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연락이 오래 끊긴 것도 큰 걱정거리였다.
무엇보다 지금 그가 정보를 가지고 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일단 눈앞의 일부터 처리하자. 이 전쟁부터 끝내놓고 생각하는 게 좋아.’
그때 새 한 마리가 그에게 날아들었다.
연합군에게 편지를 보냈던 새의 다리에는 편지가 달려 있었다.
연합군은 국경을 되찾으면 북진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다만 휴전은 아니며 정전으로 결론을 낼 것이며 전쟁 배상금을 물릴 것이라 쓰여 있었다.
태훈의 손 안에 든 편지가 불길에 휩싸이더니 사라졌다.
* * *
과제들 때문에 파케 영애는 항상 시름에 잠겨 있었다.
과제들은 태훈이 지구에서 알고 있던 지식들을 기반으로 한 것들이었다.
그는 지구와는 다른 이곳의 화학 정보를 파케 영애로부터 상당량 얻을 수 있었다.
그 정보를 토대로 약의 베이스들을 개발하는 것을 그녀의 업무로 배정한 것.
반면 파케 영애는 처음 그의 지식에 많은 의구심을 품었다.
어디서 그런 지식을 얻을 수 있었냐는 물음에 태훈은 경험이라고 답했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인 태훈이 그런 많은 경험을 했을 리 없다고 생각한 영애는 끈질기게 정보의 출처를 물었다.
재야에 있던 스승이나 모두에게 잊혀 있던 금단의 책을 얻을 것이라 생각했다.
태훈은 당연히 그런 것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대신 어릴 때부터 연금술을 공부했다는 말로 대체했다.
일관된 태훈의 반응에 시간이 흐를수록 영애의 생각도 바뀌었다.
의구심보다는 자신보다 천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처음엔 시기 어린 마음도 들었지만 존경심으로 바뀌어 있었다.
“으어어어, 힘들다.”
“방 안에 처박혀서 소꿉장난하는 게 힘들단 말인가?”
그녀의 투덜거림에 구레드르는 콧방귀를 끼었다.
영애는 옆에 있던 걸레를 던지며 그를 나무랐다.
“누구처럼 몸을 쓰는 게 아니라 머리를 쓴다구요. 아주 쉴 틈 없이.”
“흥, 그래봐야 밤낮으로 망치를 두들기고 무거운 틀을 옮기는 나만하겠나.”
그러면서 구레드르는 자신의 팔뚝을 자랑스러운 듯 꺼내 보였다.
“보라! 이 근육을! 이건 근육을 뛰어넘어 성실과 근면의 산물이다! 힘의 상징이지!”
“징그러운 것 좀 그만 보여줄래요? 그런 거 없어도 충분히 강하다구요.”
“뭐? 지금 내 근면 성실한 60년 묵은 근육을 모욕한 건가?”
그의 코에서 콧김이 분출되며 수염이 떨렸다.
“왕자님은 그런 무식한 근육 없어도 강하던데요?”
“크흠, 그건 그 인간이 특별한 거지. 오리진을 다루는 인간하고 비교하면 반칙이지.”
구레드르는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이내 반색하며 말했다.
“그 알이라는 종자보단 내가 더 강할걸?”
“구레드르 씨도 오리진을 쓸 수 있어요?”
영애는 의외라는 듯이 놀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흥, 오리진 따위는 이 순수한 근육에서 나오는…….”
“저 바쁘니까 이만 돌아가 주실래요? 구레드르 씨가 가져온 물건 살펴봐야 해요.”
영애는 구르드르가 가져온 물건으로 눈을 돌렸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흙더미.
태훈은 그녀에게 일반 흙을 걸러내어 순수한 성분을 요구했다.
“흠흠, 그럼 나는 목이나 좀 축여볼까?”
“또 술이에요? 하여간 술주정뱅이.”
구레드르가 못 들은척 휘파람을 불며 잔에 술을 따랐다.
똑똑-
비밀 공방의 출입문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영애와 구레드르는 일순간 숨이 멎었다.
비밀 공방을 아는 존재는 손가락에 꼽았다.
탁자에 있던 망치를 집어 든 구레드르가 문으로 다가갔다.
드륵-
의자로 올라가 철로 된 빗장을 슬쩍 열며 바깥을 본 구레드르의 표정이 편해졌다.
“괜찮아.”
“휴.”
누가 온다는 기별을 없었기에 갑작스런 방문에 영애는 경직되어 있었다.
철컥-
끼이익-
문이 열리자 갓 형태의 모자를 쓴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세요, 밖에 비가 오나요?”
“아아, 그렇소.”
파케의 물음에 그는 뒤집어쓴 가죽 외투의 물길을 털어냈다.
문이 다시 닫히고 사내는 탁자에 앉았다.
구레드르는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잔을 건넸다.
“날도 후덥지근하고 눅눅한데 고생했군. 시원하게 들이키게.”
“아아, 고맙소.”
“짐은 여기다 두게.”
“괜찮습니다. 금방 다시 가봐야 합니다. 그보다 왕자님 소식은 아십니까?”
구레드르는 입으로 가져가려던 술잔이 든 손을 멈추었다.
“지금 같이 있다 오는 게 아닌가?”
“몇달 전 일이 있어서 개별 행동을 했었습니다.”
“지금 전장에 가 있지. 그쪽으로 가면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렇군요. 빨리 합류해야겠습니다.”
드륵-
금세 자리에서 일어나는 남자의 손을 구레드르가 잡았다.
“벌써 가려 하는가?”
“전장이라면 한시가 급할 겁니다. 서둘러 합류해야 합니다.”
“목이라도 축이고 가게나. 갈 때 가더라도 목 축일 시간은 있어야지.”
“음, 그러죠.”
남자는 아무 생각 없이 탁자에 있는 잔을 집어 들었다.
그러다 실수로 자신의 잔이 아닌 다른 잔을 집어 들었다.
구레드르도 잔이 바뀐 줄 모른 채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가 술이 아닌 물이란 것을 알았다.
구레드르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남자가 잔을 놓고 돌아서는 순간 구레드르가 책상 밑에서 자신의 도끼를 꺼내 들었다.
그러곤 순식간에 남자의 머리를 쪼개 버릴 기세로 내리쳤다.
콰앙-
책상과 남자가 앉아 있던 의자가 산산조각이 나며 파편이 튀었다.
남자는 어느새 박살이 난 의자에서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자네 언제부터 술을 그렇게 잘 마셨지? 거기다 나를 구레드르 씨라고 불렀지? 녀석은 나를 영감님이라고 불러.”
“…….”
“넌 뭐 하는 새끼냐?”
척-
구레드르는 도끼로 남자를 가리켰다.
남자는 자신의 모자를 벗었다.
홀든의 얼굴이 들어나자 두 사람은 헛숨을 들이켰다.
“진짜 홀든은 어디 갔어?”
“제가 홀든입니다.”
“내 도끼에다 대고 다시 말해봐라.”
구레드르가 짧은 다리를 구르자 순식간에 홀든의 눈앞까지 뛰어올랐다.
쾅-
도끼가 벽에 부딪히며 흙과 돌멩이가 튀었다.
“이러지 마십시오. 다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건방진 놈! 어서 정체를 밝혀!”
쿵- 쿵-
수차례 좁은 공간에서 공방전이 벌어졌다.
구레드르의 도끼는 벽을 부수기 일쑤였다.
간혹 자신이 피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한 경우, 홀든은 대거로 그의 도끼를 막아냈다.
‘대거 따위로 내 도끼를?!’
“어쩔 수 없군요. 저를 원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홀든이 든 대거에서 순간 빛이 새어 나왔다.
“마나!?”
영애는 마나를 눈치챘다.
그사이 홀든의 대거가 구레드르의 심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다급해진 파케는 가장 가까이 있던 플라스크를 집어 던졌다.
홀든은 아무 생각 없이 플라스크를 반 토막 냈다.
번쩍-
콰앙-
거대한 굉음과 섬광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