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툭-
발치에 뭔가가 떨어지자 태훈의 시선이 땅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잠시 눈가가 움찔해지더니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걸 왜 네가 갖고 있는 거지.”
“그녀들을 데리고 있습니다. 이제 대화할 마음이 생기셨는지?”
가면이 던진 것은 아넬리아의 브로치였다.
왕궁에 있을 때 그녀가 항상 하고 있던 물건이었다.
‘탈출에 실패한 건가?’
내막을 모르는 태훈은 갈팡질팡했다.
동시에 분노에 찬 눈빛으로 가면을 쏘아보았다.
강렬한 눈빛과 지금까지 없던 살기가 뿜어져 나오자 주변의 흙이 휘날렸다.
“찢어죽일 놈. 인질을 붙잡다니.”
“그녀들은 무사합니다. 그러니 무기를 내려놓고 대화하죠.”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태훈은 검끝을 내렸다.
검을 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만약 둘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너를 찢어놓을 거다.”
“장담하죠. 그녀들은 무사할 겁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가면이었다.
“이 전쟁에서 빠져준다면 두 공주의 목숨은 보장하죠.”
“거절한다.”
“어째서죠? 카나리스 왕자 때의 인연은 아니라고 했잖습니까.”
“방관도 죄다. 막을 수 있으면서 막지 않으면 그것도 죄지.”
“흠,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게 아니신지? 혼자서 이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믿지 못하겠으면 확인해 보시던가.”
태훈이 다시 검을 고쳐 쥐자 가면은 다시 손바닥을 내보였다.
“당신의 힘은 충분히 알았습니다. 제 보호막을 깰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말해, 왜 이 전쟁을 일으켰는지.”
“말이 이상하군요. 우린 이 전쟁을 일으킨 게 아니라 거들었을 뿐입니다. 이 전쟁은 아무드가 오랜 세월 바라던 것이었으니까요.”
“그럼 부추긴 이유가 뭐야?”
“그건 자세히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분이 시키는 일만 할 뿐.”
“하…….”
대화는 제자리걸음이었다.
아무드의 궁전에서 만났을 때와 다를 게 없는 대화 내용.
“네놈이나 흑마법사나 아는 건 쥐뿔도 없는 건가?”
“흑마법사? 누굴 말씀 하시는 건지?”
“네놈과 한패잖아. 수정구 형태의 신기를 가진 늙은이.”
“우린 서로의 활동을 모릅니다. 간혹 연계하는 놈들이 몇 있다고는 들었지만 우린 서로의 정체를 모르는 게 룰이거든요.”
“뭐야?”
태훈은 그간의 정보를 종합해 보았다.
조직원들이 서로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
자신들은 그저 그분이라는 존재가 시키는 일에 충실한 것일 뿐.
일종의 체스의 말과 같았다.
“큰 그림은 체스를 두는 쪽만 안다는 건가.”
“체스가 뭔지는 모르지만 큰 그림을 그리는 건 그분이라는 말은 인정하죠.”
“그럼 너희는 존재의의가 뭐야. 무슨 목적으로 그 자식을 돕는 건데?”
“우리는 저마다의 요구 사항이 있습니다. 누구는 권력, 누군가는 재물이죠.”
“용병이라는 건가?”
“쉽게 말하자면 그렇겠군요. 그리고 그분은 그걸 능히 이룰 수 있는 존재고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그놈은 강한가?”
“강합니다. 당신이 아무리 강한다한들 그분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가면의 망설임 없는 확답에 태훈은 입술을 깨물었다.
가면은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저는 당신께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무슨 제안?”
“서로 이득이 될 수 있는 제안입니다.”
“들어는 보지.”
가면과 태훈은 상당한 시간을 대화했다.
대화가 끝났을 때 태훈은 미심쩍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강한 주인을 뒀으면서 뭐 하러 그런 거래를?”
“아까도 말했다시피 우린 용병의 개념입니다. 영리한 토끼는 굴을 하나만 파지 않습니다.”
“네 목적은 대체 뭐길래? 그놈한테 뭘 보장받았지?”
“그것만은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동의하시나요?”
태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면이 제시한 것은 자신에게 있어 답답함을 해소할 수 있었다.
다만 눈앞의 전쟁을 빨리 끝내겠다는 당초 목적을 실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가 고민하자 가면이 쐐기를 박았다.
“당신의 목적은 인명 살상은 피하면서 여러 사람을 살리는 것 아닙니까? 전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만.”
“그래서?”
“아무리 각오를 다져도 전장에 서게 되면 언젠간 손에 피를 묻히게 됩니다. 조금 전에도 저를 죽이겠다고 망설임 없이 말했습니다. 안 그런가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전쟁을 여기서 포기할 순 없어. 그러기 위해 기른 힘이야.”
“잘 생각하십시오. 생판 모르는 남보다 눈앞의 두 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태훈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결정한 듯 말했다.
“난 두 사람도 구하고 이 전쟁도 끝내겠다.”
“유감이군요. 합리적인 판단을 기대했는데요.”
“합리적인 판단이야. 너하고의 싸움을 이기면 그만이거든.”
그 순간 검은 그림자가 가면의 뒤에서 나타났다.
광기마저 보이는 매서운 눈빛의 뮤즈는 낫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어느새?!”
“그 녀석의 몸은 신기 그 자체다. 너희는 그 기운과 동화되어 있어서 이질감을 못 느끼는 모양이더군.”
깡!
뮤즈의 낫이 보호막과 부딪히며 튕겨졌다.
하지만 보호막도 단 한 번의 공격에 박살이 났다.
태훈은 가면의 정면으로 뛰어들어 가며 가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넬리아와 도리아가 인질로 잡혀 있다는 것을 안 이상 사로잡아 두 사람의 위치를 알아야 했다.
“뮤즈! 녀석을 죽이면 안 돼!”
태훈의 외침에 뮤즈는 낫을 버리고 육탄전으로 돌입했다.
앞뒤로 주먹과 발이 날아드는 상황이 연출되자 가면은 당황하는 듯했다.
가면의 몸 곳곳에 태훈과 뮤즈의 손길이 닿기 시작했다.
태훈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둔탁한 느낌으로 가면의 옷 안에 갑옷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기다 체술이라고 하기엔 민망할 정도의 모습을 보고 직감했다.
‘이놈은 싸움을 할 줄 모른다.’
여리여리한 몸에 이렇다 할 공격도 하지 못하고 피해만 다니는 가면.
주도권은 태훈에게 있었다.
하지만 결판은 쉽사리 나지 않았다.
‘안에 있는 갑옷이 데미지를 완전히 막아주는 건가?’
쉼 없이 꽂히는 주먹과 발길질에도 가면은 쓰러지지 않았다.
맷집이 좋아 보이는 것은 아니었기에 옷 안에 있는 갑옷이 신기라고 직감했다.
턱-
가면의 가슴팍에 손을 댄 태훈은 세 기운을 합쳐 흘려보냈다.
펑-
“쿨럭!”
경을 맞은 상대는 가면 너머로 한 움큼의 피를 토해냈다.
가면의 몸이 활처럼 구부러지자 뮤즈와 태훈의 발이 동시에 한 곳을 향해 움직였다.
둘의 발차기가 가면의 얼굴 양옆을 동시에 가격했다.
가면의 목이 기이하게 꺾였고 가면은 순식간에 박살이 났다.
콰과과과과-
적은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땅 위를 뒹굴었다.
바닥에 처박힌 적의 움직임이 없자 태훈은 그에게 걸어갔다.
상당히 젊은 얼굴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너덜너덜해진 그의 상의를 벗기자 나무 재질로 된 얇은 튜닉이 나타났다.
이전 신기와 같은 기운이 느껴지는 것을 확인한 태훈은 튜닉을 벗겼다.
그러곤 정신을 잃은 그를 들쳐 업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새롭게 만든 거처로 가면을 데리고 온 그는 전격 마법으로 그를 깨웠다.
정신을 차린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이게 웃어? 뒤질라고?”
뮤즈는 남자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태훈은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물었다.
“말해, 둘은 어디 있어?”
“거래를 하시죠.”
“지금 거래를 제안할 입장인가?”
“아까와는 다른 제안입니다. 아주 구미가 당길 만한 제안이죠.”
“이게 덜 맞았나?”
뮤즈는 남자의 얼굴에 손바닥을 날렸다.
짝-
남자의 입에서 강냉이가 후루룩 떨어지며 피가 한 움큼 땅에 떨어졌다.
“말해, 우리 아가씨 어딨어.”
뮤즈가 쌍심지를 치켜들며 남자의 멱살을 흔들었다.
“말 안 하면 내일부턴 죽만 먹어야 할 거야.”
“너같이 발정난 말 같은 녀석과는 이야기하지 않아.”
“넌 내일부터 채식만 해야 될 거다.”
뮤즈의 손이 다시 한번 높게 들리는 순간 태훈이 제지했다.
“배포가 큰 건가 아니면 겁을 상실한 건가?”
“배포도 크고 합리적인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이죠. 서로 손해는 아닐 겁니다.”
“말해봐, 이 상황에 내가 솔깃할 만한 거래가 뭔지.”
사내는 자신이 아는 모든 정보와 두 사람의 위치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대신 자신의 바람을 한 가지 이루어 달라고 했다.
“소원이 뭔데?”
“제국의 멸망.”
“제국? 세레니스 제국 말인가?”
“그렇습니다. 황족부터 평민까지 모든 인간을 죽여주시면 뭐든지 협조하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라 태훈은 잠시 당황했다.
전쟁의 최대 수혜자인 제국.
태훈은 이들의 우두머리가 제국과 연관이 깊은 인물이거나 황족이 아닐까 생각하던 터였다.
“네놈들은 제국과 관련이 없는 건가?”
“그분은 제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왕국이든 제국이든 한낱 도구에 불과하죠.”
“넌 제국의 멸망을 조건으로 그놈한테 협력하는 고고?”
“그렇습니다.”
태세 전환이 상당히 빠른 사내를 보며 태훈은 입을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넌 전투 타입이 아니군. 싸움도 그렇고 머리를 쓰는 쪽인가?”
“정확합니다. 신기는 그저 몸을 보호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남자의 대답에 태훈은 머리가 아파왔다.
흑마법사는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정보를 발설하지 않았다.
나이 먹은 노인도 버티는 마당에 자칭 책사라는 젊은 사내가 쉽사리 입을 열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살상은 안 하는 걸 알면서 그런 조건을 제시하는 건가?”
“당신은 선택지가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아직은 아니지.”
태훈에게는 아직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 있었다.
뮤즈와 함께 방을 나온 태훈은 뮤즈에게 물의 지니를 호출하게 했다.
잠시 뒤 나타난 물의 지니에게 태훈은 나무 갑옷을 내밀었다.
“이게 신기입니다.”
“이건…….”
“아시는 게 있습니까?”
“마도 문명시대 때의 물건 같군요. 하지만 이게 지상에 있을 리가 없는데.”
“자세하게 말해주시죠.”
물의 지니는 마도 문명에 대해 설명했다.
천 년 전쯤의 대륙엔 초 거대문명이 있었다.
마도 제국이라 불린 한 국가가 대륙을 통일.
군비 걱정이 없던 제국은 모든 국력을 마법 문명에 집중했다.
그 결과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마도 문명을 일으켰다.
“그 시대의 물건이라는 겁니까?”
“맞아요. 하지만 그들은 자연의 섭리마저 거스르려 했습니다. 그래서 정령왕님들께서 징벌하셨죠.”
“정령왕들의 징벌이라…….”
“정령왕님들께서는 그 시대의 지식들이 기록된 모든 문서와 물건들을 불태웠습니다. 이런 게 남아 있을 수 없어요.”
“하지만 이렇게 버젓이 남아 있습니다.”
“음?”
물의 지니는 나무 갑옷을 들여다보다 이내 뭔가를 발견한 듯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러곤 이내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건 최근에 만들어졌군요.”
“그걸 어떻게 압니까?”
“그 시대에 연금술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군데군데 연금술의 흔적도 보이네요.”
“본론을 말하죠. 이런 걸 만들어낼 수 있는 인간이 있습니까? 이걸 만든 자가 지금 대륙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지금은 말해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물의 지니의 말에 태훈은 돌벽을 때렸다.
“지금 장난합니까? 신기를 가져오라 해서 가져왔는데 여기까지 와서 나에게 비밀로 한다는 겁니까?”
“오해는 말아주시죠. 말을 안 해주는 게 아니라 못 해주는 겁니다. 마도 제국의 일은 정령왕님들밖에는 몰라요.”
“지금 가까운 사람들이 인질로 잡혀 있습니다. 당장 정보가 없다면 곤란합니다. 정령왕과 대화를 원합니다.”
“……기다려 보세요.”
물의 지니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역시 마음에 안 들어요.”
“뒷정리는 어떻게 됐어?”
“연합군의 마장기는 모두 무사히 돌아갔어요. 아무드군의 마장기는 모두 파괴했습니다. 복구는 못 할 거예요.”
“고생했어. 너가 아니었으면 저놈 잡는 건 힘들었을 거야.”
“에헴, 뭐 이 정도야. 그나저나 얼른 아가씨를 구해야 할 텐데요.”
잠시 기다리고 있던 사이 물의 지니가 다시 나타났다.
물의 지니 옆에는 자그마한 푸른색 구슬이 허공에 떠 있었다.
“물의 정령왕님의 분신입니다. 잠시 저 혼종의 몸을 빌려야 합니다.”
어느새 뮤즈가 낫을 소환해 물의 지니의 목에 들이대며 말했다.
“오늘 여러모로 신경을 건드리는 새끼들이 많네. 너도 강냉이 좀 털어줄까?”
“정령왕님은 계약이 아닌 이상 지상에 강림할 수 없습니다. 그나마 분신이 머무를 수 있는 시간도 한정적. 저 혼종이 잠시나마 정령왕님을 이곳에 머무르게 할 수 있어요. 정령왕님과 대화하고 싶다고 한건 그쪽일 텐데요.”
그러자 태훈이 뮤즈의 낫을 손으로 내렸다.
“뮤즈 부탁할게. 지금은 정보가 급해.”
“주인님이 원하신다면야.”
뮤즈가 체념한 듯 낫의 소환을 해제하자 푸른색 구슬이 뮤즈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